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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ㅎㅈ May 15. 2016

관계 끊기

대학은 인간관계를 시험하기에 가장 좋은 장이다

 대학은 인간관계를 시험하기에 가장 좋은 장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의 집합체 속에 소속되어 있지만 그것을 결속으로 이끄는 것은 오로지 개인의 노력 여하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애써 사람을 찾아 나설 필요도, 떼어낼 필요도 없다. 동아리 활동과 팀 프로젝트, 대외활동과 스터디 등등 온갖 종류의 새로운 만남이 한없이 가능하다. 따라서 대학에서는 끝없는 실험을 통해 내가 어떻게 타인과 '관계 맺기'를 하는 사람인지, 또 어떻게 타인과 '관계 끊기'를 하는 사람인지 알 수 있다.


 나 역시 대학에 입학하고 수많은 관계를 맺고 끊으면서 그전까지는 미처 알지 못 했던 사실 하나를 알게 되었다. 내가 '관계 끊기'에 매우 능하다는 것이었다. 첫 번째 경험은 1학년 때였다. 수업 내 팀 프로젝트를 통해 친해진 언니와 수차례 단둘이 현장 답사를 나가면서 가까운 사이가 되었고, 우리는 수업 외적으로도 자주 만났다. 만남이 계속되자 나는 이내 온갖 고민을 털어놓을 만큼 언니에게 의지하게 되었고, 그때마다 언니는 고학번답게 항상 현명한 조언으로 나를 달래 주었다. 어느 날, 언니는 그런 위로를 자꾸만 보채는 내가 부담스러워졌다고 했다. 아직은 낯설었던 관계 문제에 대해 그만큼 많은 조언을 해준 언니였지만, 그 언니는 그 언니답게 쿨하고 솔직한 이별을 고했고 우리는 자연스럽게 헤어졌다.


 두 번째 경험은 이와 비슷한 시기에 일어났다. 대학에 처음 발을 들이고 가장 먼저 만난 사람이었는데, 1년 넘게 좋은 친구로 지내다가 어느새 나도 모르게 이성으로서 좋아하게 된 동기였다. 어떻게 관계를 끊었는지는 굳이 언급하지 않으려 한다. 하지만 그것은 그동안의 관계를 완전히 깨부수는 가장 강렬한 단절의 경험이었다.


 이후에도 관계 끊기는 비일비재하게 일어났다. 대학에 와서, 혹은 대학 밖에서 열 손가락으로 다 셀 수 없을 만큼 수많은 사람들과 다 그런 식으로 헤어졌다. 신기하게도 매번 한 사람이 떠나가면, 새로운 사람이 나타나 빈자리를 채웠다. 내가 굳이 누군가를 알고자 노력하지 않아도, 항상 상대방이 먼저 내게 다가왔다. 우리는 친해졌고, 일상을 공유했다. 때로는 함께 여행을 떠나기도 했다. 하지만 그 끝은 항상 나 홀로 남았다.


 이런 경험들이 시사하는 건 아마도 내가 아주 친밀한 관계를 맺기엔 부적절한 사람이라는 사실이 아닐까 생각한다. 특히 일상을 공유하고 매일매일을 부대끼며 지내는 관계라면, 나는 상대방에게 '언어의 폭탄'을 투척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사실 나는 감정 기복이 꽤나 심한 사람이라, 기분에 따라 사용하는 언어가 확연히 달라지곤 한다. 특히 예민할 때에는 꼬투리 잡기의 달인이 되고, 상대를 짓밟는 언어의 신이 된다. 때로는 잘 알지도 못하면서 나를 다 안다고 착각하는 상대방이 싫고, 때로는 이유 없이 친한 척하는 상대방이 싫고, 때로는 나이에 안 맞게 바보처럼 구는 상대방이 싫고, 때로는 자기가 상처를 줘놓고 어물쩍 넘어가려고 하는 상대방이 싫다. 그럴 때면 나는 그냥 지나가는 것 없이 즉석에서 '폭탄'을 투척한다. 펑-, 상처가 되는 언어들의 향연. 그게 관계의 끝이다. 서로 뒤도 한번 돌아보지 않는 세상에서 가장 차가운 관계 끊기가 이루어진다.


 물론 이처럼 관계 끊기에 능하다는 것이 내가 누구든 다 쳐낸다는 말은 아니다. 내가 잘 지내는 관계의 유형은 따로 있다. 바로 '1년에 세 번 이하'로 만나는 친구들이다. 이런 친구들의 특징은 우리의 관계가 그간 오랫동안 지속되어 왔다는 것이다. 자주 연락을 주고받지 않아도, 굳이 날을 잡아 얼굴을 보지 않아도, 심지어는 만나서 서로 멍하니 얼굴만 쳐다봐도 불편하지 않고 편한 사람들이다. 이러한 관계의 장점은 서로에게 충분한 자기 공간이 주어진다는 것. 애써 내 시간과 에너지를 소비해 만나려고 할 필요도, 혹은 상대방에게 그렇게 요구할 필요도 없기 때문에 관계 유지를 위한 비용이(그것이 물질적이든 정신적이든) 훨씬 적게 소모된다. 덕분에 우리는 자신을 상대방에게 맞추는 것에서 훨씬 자유로워지고, 이따금 생각날 때 안부를 전하거나 가끔은 몇 시간씩 통화를 해도, 그것이 우리가 가장 원하는 순간에 이루어지기 때문에 서로 예민하게 굴 일이 없다.


 적어도 대학 내 인간관계에 있어서, 나는 내가 혼자가 더 편한, 혹은 대부분의 시간을 혼자 보내는 게 더 편한 사람이라는 잠정적인 결론에 이르렀다. 그동안 십 수명에게 일 년 내내 온 정성을 다 쏟아보기도 하고, 한두 명과 한 학기 내내 붙어지내보기도 하고, 다수의 사람들에게 쌀쌀맞게 굴어보기도 했지만 그것은 모두 다 너무나 많은 에너지를 소비하는 일이었다. 그래서 나는 있는 그대로, '노력하지 않는 나'가 되기로 했다. 멋있어 보이려고 애쓰지 않는 나, 대화의 어색함을 메꾸기 위해 횡설수설 말하지 않는 나, 함께 밥을 먹기 위해 기다리지 않는 나, 상대방의 감정을 헤아리기 위해 눈치 보지 않는 나. 나는 그냥 하고 싶은 대로 남의 눈치 보지 않고 지내는 게 제일 편하다는 것을 깨닫고 나에게 집중했다.


 물론 때로는 헤어진 이들이 보고 싶을 때도 있었다. 특히 외로울 때면 익명의 문자메시지라도 보내 그렇게 상처 줘서 미안했다고, 혹은 따뜻하게 다가와줘서 고마웠다고 말해야 하나 고민하기도 했다. 하지만 전화번호부를 뒤져보면 그 사람들의 번호는 이미 내 휴대폰에서 지워지고 없었다. 항상 관계를 끊을 때면 다시 돌아갈 수 있는 다리까지 홀라당 태워버리는 통에 ("Burn Bridges" - 좋게 말하면 맺고 끊음이 확실한 성격이고, 나쁘게 말하면 속 좁은 사람이라) 그렇게 놓쳐버린 좋은 사람들이 많은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가만히 우리들의 관계를 되돌아보면, 내가 가장 행복했던 순간은 '그와 함께 있는 순간'이 아닌 우리가 마음을 터놓고 나눈 '대화의 순간'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우리가 왜 더 이상 그런 대화를 나눌 수 없게 되었는지를 생각하면, 이별의 아쉬움이 곧잘 희석되고는 했다.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끊게 될지 잘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오는 사람 막지 않고 가는 사람 붙잡지 않는 무정한 사람으로 남을 계획이다. 수틀리는 경우가 생기면 언제나 용납하지 않고 나의 '관계 끊기 스킬'을 가차 없이 시전 하겠다는 다짐 역시 마찬가지이다. 누군가는 이런 나의 태도가 잘못되었다 말할지 모르지만, 나이가 들어 조금은 무뎌지고 순해지지 않는 한 이런 나의 고집은 아마 꺾이지 않을 것 같다. 좀 많이 못나고, 못됐고, 이기적이지만 이게 나니까. 관계 맺기로 에너지를 소비하기보다 차라리 그 비용을 오롯이 나 자신에게 쓰고 싶어 하는 나는 아직도 장난감 하나 나눠 갖기 싫어하는 어린아이와 같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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