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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구불시착 김택수 Aug 29. 2023

주머니 속의 장르 8

익숙하고 낯선 계동의 여름밤


옥인동에 사는 오랜 지인의 닉네임은 옥인동 강이다. 나는 그를 옥강이라고 부른다. 이것저것 잘 챙겨주는 스타일로 특히 음식에 관해서는 아끼지 않고 챙겨준다. 맛이 괜찮다는 식당에 가면 머릿수에 상관없이 먹을 수 있을 만큼 대차게 주문해 준다. 언젠가는 내가 좋아하는 푸딩을 사 왔는데, 푸딩으로 유명한 맛집이라면서 일부러 여의도까지 갔다 왔다고 한다. 내가 있는 곳은 공릉동, 옥강이 출발한 곳은 서촌이니 여의도까지 간다는 건 여간 불편한 상황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해내고 마는 억척스러운 면이 옥강에게는 자연스럽다. 나는 그렇게까지 옥강을 챙겨준 적이 있던가? 부끄러운 일이었다.


옥강은 그림을 그린다. 수채화와 색연필 붓과 먹을 사용해 채색한 다양한 패턴 여러 점을 전시하는 것은 인스타그램을 통해 알고 있었다. 계동의 한옥으로 이사한 갤러리 ghf에서 '창창당의 여름 초대'라는 전시였다. 책방에 발이 묶인 나는 좀처럼 외출이 쉽지 않다는 핑계로 여러 번 그의 전시를 모르는 척했다. 지난 금요일은 옥강의 전시마감을 하루 앞둔 날이었다. 오기로라도 그동안 옥강의 마음이 고마워서라도 시간을 내어 볼 생각이었다. 급한 마음에 국선생님께 전화드렸다. 국선생님은 마을에서 의협심이 가장 돋보이는 선생님이다. 여러 단체의 봉사에도 항상 얼굴을 보이는데 뒤에서 묵묵히 할일을 하시는 분이다. 처음엔 다소 난감한 목소리였는데 괜찮다며 다녀오라고 하신다.


가방에 해리포터 한 권과 존버거의 풍경들을 넣고 출발했다. 전철에서는 책이 제법 읽힌다. 하지만 존버거의 순서는 돌아오지 않고 해리포터만 마지막 페이지까지 읽었다.

안국역 3번 출구, 아주 오래전이라면 굉장히 익숙한 곳이다. DSLR 카메라를 들고 원서동과 계동 삼청동 북촌을 여러 번 돌아다녔고, 주말이면 아이들을 데리고 가벼운 산책과 외식을 즐기던 곳이었다. 10여 년 전의 일이다. 계동 길의 원형은 그대로였지만 촘촘한 가게들의 일면은 거의 새롭게 바뀌어있었다. 큰 비가 지나간 다음날 하늘에 에는 하얀 구름이 떠다니고 선선한 바람이 불었다. 저 멀리 보이는 남산 타워 꼭대기엔 이미 달이 차올랐음에도 계동의 여명은 단단하게 코팅된 것처럼 빛나는 푸른색이었다. 휴대폰 카메라를 켜고 남산, 달, 구름, 골목의 풍경을 찍고 갤러리를 향하는 걸음은 바빴다. 종로 ghf이후 계동 ghf는 처음이지만 나의 촉은 익숙하고 낯선 곳까지 자석처럼 이끌렸다. 어려움 없이 갤러리를 찾을 수 있었다.


적당한 거리감에 익숙한 모습으로 갤러리는 안성맞춤으로 이질감 하나 없이 자리 잡고 있었다. 탐이 날 정도로 예쁘고 작은 아크릴 간판에는 ghfART라고 쓰여있었고. 그 아래 입구는 시원하게 열려있었다. 눈에 가장 먼저 보인 것은 이제 작가님이었다. 이제 작가님은 드로잉 그룹 월간 잡초의 리더이자 편집장으로 잡초 멤버들의 전시는 빠지지 않고 모습을 드러낸다. 잡초 멤버의 중축인 옥강의 자리에서 이제 작가를 만난다는 건 예상 가능한 범위었다. 이제 작가님이 반갑게 맞아줬다. 그녀의 잔잔한 에너지 파장의 그래프가 잠시 출렁인 정도였지만 충분히 반가웠다. 그리고 딜러님이 보였고 손님들에게 그림 설명을 하고 있었다. 예상보다 작은 공간이었지만 작품을 전시하기에는 알찬 공간이었다. 잠시 그림을 둘러볼 여유도 없이 옥강이 지인과 식사를 하고 돌아왔다. 조용한 갤러리는 어느새 활력이 차올랐다. 옥강은 수제 맥주 세 병과 뻥튀기를 들고 왔다. 그리곤 "택수 밥 먹었어? 멕여보네야 하는데."라는 식량 보충의무감을 보인다. 옥강은 왜 나만 보면 먹이려 하는지 모르겠다. 출발 전에 도시락을 충분히 먹었다고 했다. 실제로 그랬기에 별다른 식욕은 없었다.


한옥 기와지붕 아래 4인용 식탁을 6명이 둘러앉아 이런저런 수다를 떨다 보니 시간이 빨리 지나갔다.

불청객 모기 한 마리가 대단한 활약을 했다. 전기 모기채를 들고 있던 딜러님이 테니스 선수를 닮았다는 말에 모두 크게 웃었다. 그의 복장이 하얀 폴라티셔츠와 반바지였다. 얼핏 보면 모기 잡는 대회에 출전한 테니스 선수임에 틀림없었다. 하지만 그의 점수는 러브였다. 내가 앉은 바로 옆에는 옥강의 대표작이 걸려있었다. 직사각형을 여러 개 붙인 패턴의 그림인데 크기는 4절보다 큰 것 같았다. 직선으로 반듯하게 긋은 대지위에 먹과 색연필 수채화로 채색이 되어있다. 칸칸마다 이름이 쓰여있고 그 위에 또다시 같은 색으로 더했다. 옥강은 어떤 지인들 느낌을 색으로 채워났다고 한다. 연한 보라색에 미하의 이름이 보였다. 그림은 백만 원을 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림의 이름은 잊어버렸다. 나는 작품을 살 여유가 없어 미안한 마음이 더했다. 흥정도 할 수 없었다. 그림은 마치 조선 사대부의 혼숫감 같은 전통적인 느낌마저 들었다.


갤러리를 나와서 이제 작가님과 옥강, 나는 계동의 골목을 걸었다. 상점들 대부분은 불이 꺼져있었고 외국인 관광객들이 간간히 우리들의 그림자와 얽혔다가 풀어졌다. 돌아오는 길이 아쉬워 조금 늦은 시간까지 열려있는 카페에 들어갔다. 어니언이라는 카페였는데 인테리어가 어마어마한 핫플레이스 카페였다. 나는 여기서 여러 장의 사진을 찍었는데 갤러리보다 더 많이 찍은 것 같아서 또 미안한 감정이 생겨 휴대폰을 가방 깊숙하게 밀어 넣었다.


점원이 폐점 시간을 알리고 돌아갔다. 우리는 카페를 나와 달빛을 향해 걸었다. 길 건너 버스정류장과 타고 가야 할 버스를 알려주는 옥강의 말을 마음에 담고 버스에 올라탔다. 가방에서 조금 전에 밀어 넣었던 스마트 폰을 다시 꺼내는데 가방 안에는 예쁘게 포장된 어니언의 빵 봉투가 있다. 집에 가져가서 가족들과 먹으라며 챙겨준 옥강의 얼굴이 잊히지 않는 금요일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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