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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구불시착 김택수 Oct 12. 2023

주머니 속의 장르 11

나의 소원은 수필

나의 소원은 수필나의 소원은 수필

사람은 언제 늙는가에 관하여 이야기하면 나이가 먼저 떠오르지만, 나이만으로 늙음을 짐작하기엔 무리가 있다. 외형을 어림잡아 나이를 가늠해 본다 한들 그 어떤 나이로 보여진다해서 할아버지, 아저씨, 아줌마로 불리는 것도 기분 좋은 일은 아닐 것이다. 


나는 요즘 늙어가고 있다. 나이가 몇이라서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고 버스 창에 기대어 일렁이는 햇살을 받으며 생각했다. 여느 때 같으면 버스 와이파이에 의지해 유튜브나 릴스에 집착했겠지만 오늘은 공공 버스 와이파이가 먹통이다. 평소와 다르게 쉽게 포기하고 창밖을 응시했다. 사람들과 나무, 아파트와 상가가 지나간다. 나는 또 지나가는 것들에 관해 관심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됐다. 그러고 보니 많은 것들이 지나가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시간과 계절이 눈코 뜰 새 없이 지나간다. 


아시안 게임이 끝났다. 추석 연휴도 지나고, 해리포터도 다 읽었다. 하나가 지나가면 그만큼 커다란 공백이 남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그 공백이 채워지기까지 꽤 긴 시간이 걸린다. 오늘 내 공백을 채울 수 있는 건 뭐가 있더라. 몬스테라 분갈이를 해야겠다, 창고를 정리해야겠다, 포스터의 재고를 알아보자, 물을 더 많이 마셔야겠다고 하는 일들은 정답이 아니다. 

오픈 준비를 끝내고 버스 창에 기대었던 표정과 같은 얼굴을 하고 모니터를 한 참 응시하는 일과가 지루하다. 한숨을 길게 걸러내고 모니터의 화면을 닫았다. 

책이라도 읽으려 했을 때 택배가 왔다. 어제 주문한 책이었다. 좋아하는 최민자의 수필과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책, 무라카미 하루끼의 책이 왔다. 그것은 오늘 하루의 좋은 일이다.


요즘 나에게서 멀어진 것이 너무 많다. 영화, 음악, 여행, 친구들과의 만남, 데이트가 사라졌다. 예쁜 카페, 빵집, 성수동이나 망원 같은 핫플레이스도 희미해졌다. 반면 다행이라 할까? 이글이글 타오르는 것도 있다. 쉽지 않지만 글을 잘 쓰고 싶다. 나는 글을 쓰고 싶을 때 피천득의 수필을 읽는다. 그 책을 읽으면 글이 써질 것만 같다. 피천득의 수필처럼 나이 들고 싶다. 잠을 즐기고, 매일 찾아오는 토요일마다 젊어짐을 느끼는 어른이 되고 싶다. 흥미로움이 하나씩 멀어지더라도 내가 좋아하는 수필의 담백함에는 어른들이 좋아하던 맹숭한 평양냉면 같은 맛이 있다. 그 맛에 한 번 빠지면 아무리 밋밋한 하루에도 맛깔난 글을 쓰게 될 것이다.

피천득의 수필집 인연과 나의 인연은 길지 않지만 깊다. 원릉동의 헌책방에서 인연을 사 읽은 것이 지금으로 30여 년 전이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가장 많이 산 책이 인연이기도 하다. 나는 선생이 화병에 꽂으려 장미 6송이를 사 돌아오는 길에 하나씩 나눠주고 빈손으로 돌아온 에피소드처럼 오랜 친구들에게 한 권씩 나눠주기를 해왔다. 그들이 책을 읽건 말건 내어주는 기쁨을 느끼게 해 준 책이기도 했다. 

민음사에서 인연을 다시 출간한다고 해서 너 할 나이 없이 기뻤지만 표지가 너무 올드하고 또 좋아하는 서문 산호와 진주 이야기를 빼는 것이 괘씸해 그 책을 읽지 않기로 했다. 오래전 샘터에서 나온 저자의 인지가 붙어있는 책은 언제 보아도 반갑고 설렌다. 나는 또 그 책을 사서 누구에게 줄 것인가를 생각하는 것은 커다란 즐거움이다. 

기쁨을 누린다는 것이 심각할 정도로 소원해지고 있는 가운데 피천득의 수필만은 내 옆에 오래오래 남아주길 바라는 마음이다. 최민자도 좋고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도 좋지만, 피천득의 수필로 가을의 긴 공백을 메워보기로 한다.


늙어가고 있음을 느낀다는 것은 다른 의미로 흥미를 잃어간다는 말일지도 모른다. 여간 안타까운 일이 아니다. 흥미로움이 하나씩 멀어지고 바라는 일도 대수로운 게  없을 때 나의 소원은 수필이 된다. 












김택수

instagram @illruwa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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