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운의 '에디톨로지'1

PART 01 : 지식과 문화의 에디톨로지

by 책 커피 그리고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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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운의 '에디톨로지'는 제가 읽었던 '나는 아내와의 결혼을 후회한다', '가끔은 격하게 외로워야 한다'에 이어 세 번째 접하는 작품입니다. 작가의 책을 읽을 때마다 느끼는 건 '어쩌면 저렇게 글을 맛깔나게 쓸 수 있을까?' 참 부러운 능력입니다.


'에디톨로지'는 저의 베스트 목록에 상위에 속하는 책으로, 읽는 동안 많은 생각을 이끌어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 번에 서평을 쓰기에는 제가 이 책을 통해 느낀 점을 모두 표현할 수 없을뿐더러, 글쓰기에 그리 자신이 없기에 3회에 걸쳐 쓰려고 합니다.


이번 글은 첫 번째 파트인 '지식과 문화의 에디톨로지'입니다.


이 책의 첫 장은 무척 인상적입니다. 남자?라면, 오랫동안 눈길을 사로잡는 사진 한 장이 있는데, 아름다운 여자가 나체로 해변에 누워있고, 배꼽 아래 아이팟이 놓여 있는 사진입니다. 눈을 감고 이 사진을 상상해 봅시다. 남자라면, 누구나 한 곳을 보게 될 것입니다. 작가도, 저도 그랬듯이 바로 아이팟, 사실 이 사진 한 장이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에디톨로지(편집학)'에 대한 전체적인 묘사이며, 사진의 이해로부터 시작됩니다.


잠깐 저의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올해 42살이니, 벌써 22년 전 대학교 재학 시절 리포트를 작성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합니다(벌써 22년이 지났다는 것을 절대 인정하기 싫은 마음에, 20대처럼 입고 다니고 있습니다.)


글을 쓴다는 건 기본적으로 창작의 행위입니다. 학부 시절 가장 어렵고, 귀찮은 것은 리포트를 작성하는 일이었습니다. 글 솜씨도 빈약했을 뿐 아니라 초등학교 시절 독후감을 강제로 제출할 경우를 제외하고 글쓰기 경험이 거의 없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이 책 저 책을 짜깁기하여 제출하는 것이고 이렇게 작성된 내용은 주제도 맞지 않고, '그리고', '그래서', '그러나' 등 '이어주는 말'의 개념에 맞지 않게 사용하여 말도 안 되는 글이 되기 일쑤였습니다. 다시 말해, 헛소리를 자연스럽게 연결하는 것처럼 '사기 치기'에 바빴습니다.


그러나 정말 큰 문제는 글의 첫 부분과 뒷부분이 서로 정반대의 의견을 제시한다는 것입니다. 첫 번째 문장이 '~하지 말아야 한다'가 맨 끝부분 '~해야 한다'라고 바뀌다 보면, 도대체 제가 무엇을 쓰고 있는 것인지, 저 자신도 모를 경우가 많았습니다.


더군다나 그 당시(94학번)는 워드로 문서를 작성하는 것 조차 몰랐고 컴퓨터를 사용하기 어려웠던 시절이었습니다. 이미 작성한 난감한 문장을 다시 수기로 수정하는 것은 글 전체를 다시 써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였고, 저의 손가락 근육을 혹사시키기 싫어 그저 술 먹고 빨리 잊고 싶은 심정에 대충 작성하여 제출했던 기억이 납니다.


논리적으로 비약이 있을 수 있는 생각이지만, 제가 생각하는 '글을 쓴다'는 행위는 '나'의 생각을 표현한다는 것입니다. '나'의 생각을 표현하는 것인 '내'가 그 주제에 대해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그 주제에 생각하는 것은 '내'가 세상을 바라보는 주체자로서 존재한다는 의미입니다.


이러한 점에서 그 당시 '나'라는 존재가 있었을까?라는 의심이 듭니다. 그래서, 주체자로서의 '나'가 빠져 있기에 제 나이 40이 되기까지 그렇게 지독한 존재자로서의 외로움을 느끼고 방황했는지 모릅니다.


저의 글쓰기는 대학원에 입학하고 논문을 통해 글쓰기 체계를 잡아갈 수 있었습니다. 이후 몇 번의 연구보고서를 쓰게 되었고 '논문 쓰기' 방식은 저의 글쓰기에 많은 도움을 주었습니다. 또한 대학원은 제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무엇을 이야기하고 있는지'에 대해 명확하게 하기 위해 고민을 하기 시작한 시기이기도 합니다.


물론 한 가지 아쉬운 점은 '논문 쓰기' 자체가 시나 에세이를 쓰는 것과 달리 체계적인 사고를 요구하는 것이기에 객관적 사실과 명확한 근거, 화려한 미사여구를 배제한 쓰기 방식은 저의 사고마저 건조하고, 감정을 배제하도록 만들었던 것 같습니다.


아무튼 저에게 있어 글을 쓴다는 건, 저를 만들어가는 동시에 '나는 이런 사람이다'라는 저의 존재를 확인하는 과정으로 의미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글쓰기는 저에게 고통의 작업입니다. 일상에서 나를 고통 없이 즐겁게 하는 것들이 수 십 가지가 되지만, 그러한 것을 포기한 채, 고통을 받으며, 글쓰기를 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글쓰기가 저를 아주 즐겁게 하는 몇 안 되는 것들의 하나라는 점이, 이 책에서 이야기하는 즐거운 창조적 행위와 일치합니다. 이러한 점에서 저는 고통 속에서 즐거움을 찾는 '변태(김정운의 문체를 흉내 내어)'이며, 글쓰기는 나에게 있어 행복을 주는 의식(ritual)입니다.




PART 01. 지식과 문화의 에디톨로지에 관하여


PART 01에서는 '에디톨로지의 정의', '창조의 본질', '하이퍼텍스트와 지식 권력', '편집의 확장성과 가능성'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앞서 제가 굳이 대학교 시절을 이야기한 것은 'PART 01'을 읽으면서, '지식 권력', '하이퍼텍스트(쉽게 '링크'라고 표현할 수 있음)', '편집'이란 주제들이 저의 대학 시절 리포터를 작성할 때, '짜깁기 글쓰기'에 관한 내용과 관련이 있기 때문입니다.


지식을 구성해 가는 방식은 네트워크가 기본 바탕이 되는 하이퍼텍스트의 발명 이전과 이후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하이퍼텍스트 이전의 지식의 구성 방식은 기본적으로 상위의 지식을 체계적으로 습득하는 과정이며, 지식은 자연스럽게 계층적인 구조로 구성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지식의 계층적 구조 덕분에 상위 지식과의 연결을 통해 '지식 권력'이 발생하였으며, 지식 권력자들은 지식을 독점적으로 제한, 통제할 수 있었습니다. 작가 또한 많은 학비를 지불하며, 대학을 다니는 이유 중 하나를 지식의 계층적 구조에 대한 메타 지식을 배우기 위한 것으로 제시합니다.


그러나 하이퍼텍스트 이후의 지식 구성 방식은 네트워크의 수평적 연결을 활용하여 계층적 지식이 아닌 편집자의 원하는 방향에 따라 구성하는 '편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재미있는 점은 하이퍼텍스트 존재하기 위한 기본 환경인 네트워크는 그 자체가 어디든지 '튈 수 있는 구조'로 수많은 신경망이 복잡하게 얽혀서 연결되어 있는 사람의 두뇌와 닮아 있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작가는, 사고가 튀는 것에 대해, '천재'와 '또라이'는 종이 한 장 차이로, 천재는 생각이 튀었다가 돌아오는 것과 달리 또라이는 계속 튀기만 한다는 표현에 공감하지만, 인간의 두뇌 자체가 네트워크와 비슷한 구조인 점에서 원래 필연적으로 인간은 ''또라이'가 아닐까'라는 의문점이 생깁니다. 그래서 인터넷이 '또라이'를 위한 최적의 환경을 제공하기에 오늘날 '또라이'들을 많이 볼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여기서 또라이란 다른 사람들에 즐거운 자극을 주는 긍정적 또라이를 의미함).


편집과 창조에 관한 예는 '노트'와 '카드'를 통해 구체화되는데, 편집 가능성 여부에 따라 내용의 일부분만 떼어 옮기기 어려운 '노트'와 필요한 내용만 순서대로 섞을 수 있는 '카드'의 차이점에 대한 설명으로 창조의 기본이 되는 편집의 가능성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또한 카드가 지식을 구성하는 자유도가 더 높다는 점에서 '편집 가능성이 있어야 좋은 지식이다'에 동감합니다.


PART 01를 정리하면, '하이퍼텍스트', '카드', '스티븐 시걸의 무표정한 감정 연기' 등을 통해 21세기 지식정보화 사회에서 창조를 위한 편집학에 필요성과 가능성에 대해 설득력 있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다시 저의 이야기로 돌아와, 대학시절 리포트를 짜깁기 조차 어려웠던 것은, 리포트 주제에 관한 메타 지식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무엇이 중요하고 필요한지' 판단할 수 없었고 '편집학'에서 기본 전제인 많은 양의 데이터베이스가 절대적으로 부족했기 때문입니다.(리포트와 관련된 주제의 책을 빌리기 위해 도서관에 가면, 벌써 남들이 대출한 경우가 대부분이었음)


또한 하이퍼텍스트와 비슷한 역할 또는 메타정보를 제공하는 역할을 하던 도서 카드의 경우에도 제목만 보고는 과연 나에게 필요한 책인지 판단하기에 매우 어렵다는 점도 하나의 이유였습니다.


정말 재미있는건, 과장된 비유이지만, 먼저 리포터 작성의 결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는 도서를 대출한 친구들은 정보를 소유했다는 점에서 '권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시절 생각해보면, 그 친구에게 빌려달라고 사정을 하지만, 빌려줄 순서가 있어 차례를 기다리거나, 그 친구와의 친밀도 등, 정보(도서)가 하나의 권력처럼 존재하는 것은 하이퍼테스트 이전의 체계적이고 수직적인 계층구조의 권력과 닮아 있다는 점입니다.


그렇다면... 만약, 제가 그 시절 편집학의 기본 개념을 알게 되고, 인터넷이 가능한 환경이었다면, 훌륭한 리포트를 완성했을까요?


저의 대답은 '불가능'입니다. 애초부터 주제 자체에 대해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즉, '무엇을 써야 하는지', '무엇을 원하는지' 조차도 몰랐기 때문에 리포트를 작성하기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이것은 환경의 문제가 아니라 '무엇을 생각하고 있느냐'에 대한 존재의 문제입니다. 그래서 '에디톨로지(편집학)'는 '자신이 무엇을 모르는지', '무엇을 알고 싶은지'에 대해 더 나아가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는 의미가 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그저 재미있는 책, 그 이상이 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내가 무엇을 모르는지' 알기 위해 공부가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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