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영지 Sep 20. 2020

취향을 아는 힘

취향에도 훈련이 필요하다. 

#1 

일 많은 디자이너  

주변에 널리고 널린 것이 디자이너다 보니, 그들의 작업을 유심히 들여다보면 저마다 스타일이 보인다. 물론 아직은 그 형태가 뚜렷이 보이지 않는 사람도 많지만, 그들이 좋아하는 스타일은 분명 보인다. 그 스타일은 결국, 각자의 취향이다.


그러다 보니 작업을 의뢰하는 사람들의 반응은 딱 두 가지였다. 

"아! 이 디자이너의 작업 스타일 좋아. 여기에 맡겨야겠어" (GOOD CASE) 

또는 

"아, 이 디자이너는 잘하긴 하는데.. 왠지 이런 스타일로 만들 것 같아." (BAD CASE) 

이다. 

그러다 보니, 정말 잘하고 독특한 스타일인데도 배를 곪는 친구들이 많이 있고 - 내가 보기엔 그저 그래도 요즘 트렌드에 잘 맞아 승승장구하는 친구들도 있다.  어떤 디자이너가 잘 먹고 사냐의 여부는 실력의 정도도 있지만, 취향의 차이도 분명 있다. 


나는 그리고 이런 대개의 경우에 잘 해당되지 않는 사람이었다. 좋게 말하면, 나는 거의 모든 스타일의 것들을 소화하는 편이다. 나의 클라이언트 중에 나에게 이런 내 작업이 좋았으니, 그렇게 자기도 해달라고 하는 사람은 없다.  대게는 레퍼런스를 들고 왔다. 이런 무드로 만들자고 한다. 그러면 나는 그 무드를 '잘' 소화한다. 클라이언트는 만족하고, 나는 그들에게 원하는 것을 잘 들어준 능력 있는 사람이 된다.  그렇기에 경력도 짧은 나 같은 프리랜서가 아직도 잘 먹고 잘 사는 것 같기도 하고, 어디에 포폴 하나 안 올려도 계속 소개소개로 일이 이어지는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문제는, 여기에 내 취향은 어디에도 없다. 클라이언트들은 언제나 자신들이 원하는 스타일, 또는 다른 디자이너의 작업을 들고 온다. 아무것도 들고 오지 않는 클라이언트들에게 나는 원하는 스타일을 직접 찾아오라고 얘기해준다. 그게 작업을 가장 쉽고, 효율적으로 하는 방법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아마, 내가 어디서 깽판을 치지 않는 이상 - 일은 계속 들어올 것이다. 다만, 언젠가 내 작업을 쭈욱 공개했을 때 반드시 나여야만 하는 사람들이 있을까.  아니면, 자기가 꼭 원하는 사람이랑 하지 못해 차선책으로 나에게 온 사람들만 많이 있을까.  나는 일 많은 디자이너다. 일만 많은 디자이너다. 





#2 

그림 그리기 싫은데요

아는 사람은 다 안다. 나 사실 그림 그리는 거 별로 안 좋아한다.  하지만 내 SNS 계정을 그림으로 도배해놔서 그런지, 나와 가까이 있지 않은 사람들은 내가 그림 그리는 것을 엄청 좋아하는 줄 안다.  

최근에는 동기들이랑 프로젝트할 일이 있어 오랜만에 만났는데, 회의 중에 내가 설명하려고 끄적거리는 것을 보고 갑자기 내 그림에 대한 소감을 얘기하는 것이 아닌가. 


"오~ 역시, 일러스트레이터." 


이런 평을 들을 때마다 난처하다.  그림 그리는 것을 즐기지도 않거니와  매번 브런치 글을 쓸 때마다 그림을 억지로 그리는 것도 힘들기 때문이다. (그러니 오늘은 안 올리겠다! )  그리고 나도 안다. 아직은 스타일도 없고, 뭔가 애매하다는 것을 말이다.  


하지만, 나도 한 때는 내 스타일이 있었다. 대학교 4학년 때 졸업 전시할 때 이야기다. 이렇게 말하는 것이 우습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했다. 내 담당 교수님은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제품 디자인 전공'인 나에게 그림을 졸전으로 내라고 하셨다. 결국 나는 대학교 4년 내내 제품을 디자인하는 법을 배우고, 생뚱맞게 졸전으로 거대한 벽화 두 점을 그렸다. 



이런 사람들이 500명 등장하는 거대 벽화를 그렸다.


어찌 됐건 그래도 졸업전시니까, 교수님의 지도는 계속 받았다. 그래서 평소에 내가 스케치하는 스타일로 한 점, 친구들과 상의해서 왠지 이렇게 하면 멋있을 것 같은 스타일로 한점.  내 스타일대로 그린 그림은 어딘가 어설펐고, 친구들과 상의한 그림은 누가 봐도 예뻤다.  친구들과 상의한 그림으로 졸전을 하면 누가 봐도 정말 멋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샘플 두 점을 들고 찾아뵀는데, 교수님은 그냥 보자마자 전자의 직업을 찍어주셨다.  그리고 작업하는 내내, 결과에 대한 의문을 품고 작업을 했는데 반응은 상상 그 이상이었다. 다들 내 스타일을 너무 좋아했다. 물론 호불호는 갈렸지만, 결국 나는 그림 때문에 취업하기도 했다.  전에 다니던 회사에서 나한테 먼저 연락을 줬었다.  이 정도면 꽤나 성공한 것 아닌가.  그래서 한때 나는 일러스트레이터로서의 작은 꿈도 꿔보기도 했다. 하지만 물론, 생각대로 되지는 않았다. 나의 그림은 분명 스타일이 있었고, 내 스타일을 모두가 좋아하지는 않았다. 일은 졸업 후에 운 좋게 받은 것이 끝이다. 그마저도 내 친한 후배가 소개해준 것이니, 일러스트레이터로서 나는 그다지 벌이가 좋지 못하다. 그냥 손이 굳지 않게 그림과 함께 글을 쓰는 것이 다이다. 


그렇게 그림이 아주 천천히 나와 멀어졌는데, 가장 결정적인 계기는 출판사와 미팅에 있었다. 사실 나는 정말 여러 출판사와 미팅을 가졌었는데, 정말 신기하게도 모! 두! 나의 그림을 짚고 넘어갔었다. 

물론, 나의 그림 스타일이 미완이어서 이랬다 저랬다 하는 것도 있지만 그들은 모두 나에게 '색'을 쓰라고 권유했다. 글이 약간 차분하고 , 살짝 어두운 감이 있어 그림만이라도 밝았으면 한다는 것이다.  한 명이 그랬다면, 그러려니 하고 넘겼겠지만, 여러 명이 그러니 내가 문제가 있나 싶어 졌다. 

"헉! 내 그림이 어둡다고?" 

"헉! 역시 내 그림체는 대중들이 선호하는 스타일이 아닌가. " 

하고 말이다. 


그래서 요즘. 컬러를 쓴다. 

진짜 죽겠다.  그림 그리기 싫어서. 너무 재미없다!  화려하게 튀는 색의 조화보다는, 선의 강약의 맛에 더 희열을 느끼는 사람인가 보다. 내 가까운 지인들은 글을 발행할 때마다 그림 이야기부터 한다.  물론, 내가 그림이 마음에 안 든다고 운을 띄워서 이기도 하지만 말이다. 그들은 내게 '요즘 그림, 너 스타일이 아닌데?'라고 이야기한다.  그럼 나는 얘기한다. 


"내가 언제 스타일이 있긴 했니?" 





#3

팬과 구매율

최근에 내가 그렇게 주! 구! 장! 창! 이야기하던 가게를 공개했다. 길게 이야기하면 홍보 같으니 짧게 링크만 달겠다. 


나름 야심 차게 몇 달을 준비했다. 물론 몇 달에서 한두 달은, 다른 일에 치여 거의 손에 잡지 못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최근 들어 가장 몰입했던 프로젝트 같다.  제품의 셀렉부터, 사진의 콘셉트, 기획까지 매 순간 몰입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보기엔 그래도, 인스타그램에 올리는 사진의 순서까지 매일 몇 분씩 고민하고 올릴 정도니 말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 모든 것을 준비하는 기간 동안 어느 누구에게도 피드백을 딱히 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올 곳이 나의 직감을 믿어갔고, 즐겁게 준비했다.  예전의 방식이 조금 흔하다고 생각했고 많은 것을 바꾸었다. 그리고 오픈 당일, 나는 수십 통의 메시지를 받아야 했다.  메시지는 모 아니면 도였다. 


"오잉, 이름 바꿨네. 사진 스타일 바꿨네. 전이 훨씬 나은데?" 

"오! 이름 바꿨네, 스타일도 바꿨네! 이게 훨씬 낫다!!" 


좋은 반응일 때는 괜히 하루 종일 기분 좋고 설레지만, 미적 찌 근한 반응일 때는 걱정부터 앞선다. 그리고 어찌 됐건 '돈을 벌어야 유지는 되는' 그런 구조의 가게이다 보니, 구매로 이어지지 않지는 않을까 걱정이 이어졌다. 

예전과 달라진 사진에 상대적으로 '좋아요'개수가 줄어있는 것을 보고 예전처럼 사진을 다시 찍어야 하나 한참 고민했다. 내가 보기엔 지금이 좋은데.. 역시 예전 스타일이 유행하는 스타일 인가 하고 말이다.  실제로 판매율도 전보다 훨씬 떨어졌다.  예전처럼 제품이 눈에 미친 듯이 사로잡히는 사진이 아니니 그럴 수밖에. 잠도 잘 못 자고 설칠 정도로 고민을 많이 하기 시작했다. 재밌자고 한 일에 스트레스 제대로 받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얼마 전에 메시지 한 통을 받았다. 


"사장님, 저랑 콜라보해요!" 

필름 사진작가였다. 유명한 사람은 아니었지만, 작업이 너무 좋아 몰래 팔로우해 보고 있던 그런 작가였다. 그녀는 내 사진이 좋다고 이야기했다. 내 가게의 콘셉트가 좋다고 얘기했다. 가게의 이름도 너무 맘에 든다고 했다. 

보자마자 팬이 되어버렸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당장 다음 주 목요일에 그녀와의 미팅이 잡혔다.  판매는 진짜 오지게 안되는데, 팬부터 생겨 버렸다.  비록 한 명뿐이지만 말이다. 


이번에 가게에 새로 내민 사진의 느낌들





#4 

취향을 아는 힘 

물건을 판매하는 가게이다 보니, 어떤 물건을 들여오는지에 대한 고민이 제일 크다.  얼마 전에 이제까지 매입한 물건의 총액을 계산해보았다. 몇 년간에 걸쳐 조금씩 사모은 것인데, 또 모아 보면 양이 크지 않다 보니 한 100만 원 가까이 되지 않을까 싶었다. 그런데 다시 계산해보니 그 금액이 자그마치 몇 백이었다. 정확히 얼마인지는 말하지 않겠다. ( 이 브런치를 우리 엄마도 보고 계시고, 남자 친구 부모님도 보고 계시고, 얼마 전에 나 돈 없다고 징징 거렸던 친구들도 보고 있고....)    하여튼, 엄청나게 큰 금액이었다. 분명 돈을 디자인해서 잘 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통장에 돈이 별로 없는 이유가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모은 물건 중에 팔 물건이 없다는 것이다. 어떤 것은 정말 퀄리티가 좋지 않아, 이것을 팔면 내가 손해다 라고 생각하는 것들이 있다. 그런데 문제는, 내가 '이런 것이 잘 팔리더라, 이런 것이 유행하더라, 얘를 좀 매입해볼까?' 하고 샀던 제품들이다.  

빈티지에도 (국내) 유행이 있고, 한국 소비자들에게 잘 팔리는 그런 제품들이 있다. 기성품처럼, 이런 빈티지 제품을 가져야 해 하는 것들이 있다. 그래서 그런 것들이 팔리겠구나 싶어 구매한 제품들은, 여러 가지 이유로 결국 팔지 못했다. 


첫째로, 누구나 다 팔고 있는데 나는 좋은 도매 거래처를 알지 못하고, 매입의 개수에도 한계가 있다 보니 가격 경쟁이 되지 않았고 -

둘째로, 어떤 디자인들은 빈티지 제품이라는 이름 하에 공장 제작을 시작해버렸다.  다시 한번 가격차이를 뚫을 수가 없었다.

셋째로, 시작단계인 내가 너도나도 다 팔고 있는 제품을 올리니 정말 '더' 별 볼 일이 없어졌다. 


그래서 '이 제품은 정말 독특하고 판매할 가치가 있어' 하며 나만의 기준으로 필터 해보았더니 그 몇백만 원어치의 제품 중에 남는 것이 별로 없었다.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의 제품들도 아니라 쓰지도 못하는데, 그렇게 어디 되팔지도 못하는 것들이 산더미 같이 쌓여있는 것이다.   그렇게 잘못된 매입을 해보니, 주변의 많은 가게들이 다시 보였다. 그들은 자신의 취향을 잘 알고 있었다. 물론 나처럼 필터링을 한 참 거쳐 남은 물건들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쨌건, 그들의 가게에선 취향이 보인다.  


내 가게를 운영하는 데에는 추진력도 자본력도 필요하다. 하지만 여느 사업과 달리, 사람들이 찾아오는 그런 가게를 만들려면 '취향을 아는 힘'이 필요하다. 유행이나 구매율에 연연하지 않는, 오롯이 나의 취향을 보는 힘 말이다. (그러니 자본력이 필요한 것일지도) 

그런데 이 힘을 길러가는 데에는 연습이 필요하다.  주변의 반응을 적당히 무시할 줄 아는 것도 필요하고, 내 안의 직감에 귀 기울이는 훈련도 되어야 한다. 어쩌면 시작단계에서는, 취향을 위해 꾸준히 하다 보면 지칠지도 모르겠다. 나라도, 지금처럼 돈만 펑펑 써대면 좋아하는 일이 스트레스만 받을 것 같다.  하지만  훈련은 '계속' 되어야 한다.  천천히, 오랜 시간 동안 내 취향에 의미 있는 시간을 쏟아붓다 보면, 어느새 속근육이 단단히 차올랐을지도 모른다. 


스타일을 가진 가게. 스타일을 가진 작가. 스타일을 가진 디자이너.  어쩌면 나는 그들을 '천재'라고 정의하며, 나와 한참 다르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우리 모두에게는 취향을 아는 힘이 미약하지만 있고, 그 힘을 묵묵히 길러 낸 사람들에게 스타일이 생긴다.  그리고 그 수가 적건 많건, 우리는 그런 사람들과 가게를 계속 찾아가게 된다.   물론 진짜 비즈니스가 되고, 잘 유지하고 있는지는 저마다의 상황에 따라 다른 것 같긴 하다. 나의 취향과 대중의 소비의 어느 중간 점에서, 자신의 취향을 올곳이 펼치는 사람들이 오랫동안 지속되더라.  취향을 아는 힘 말고, 비즈니스 적인 생각도 필요한 것이다. 하지만, 아직은 시작단계인 나에게 필요한 것은 한 명의 구매자를 늘리는 것이 아니라, 한 명의 팬을 더 늘리는 것이다. 당분간은 내 취향을 기르는 힘에 집중해야겠다. 


오늘은 조용히, 내 안에 기울일 것이다.  그리고 내 직감을 계속 유지하는 법에 대해 고민해봐야겠다. 그러다 보면, 언젠가는 - 내 작업과 가게에 먼저 문을 두드리는 사람들이 있지 않을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