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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솔티 May 05. 2023

올리브 나무가 거기에 있었을 때

올리브 나무가 서있네


11:30

피렌체로 열차가 들어오고 있다.

토스카나에서 남은 건 숙취와 도둑 맞은 지갑

그 지갑에 아무것도 없는데 불쌍한 도둑


11:50

몰래 그의 계좌번호를 메모해두었다

돈을 입금 시켜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로부터 꽤 오랫동안

올리브 나무가 서있네

라는 문장을 적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12:47

시 대회에 나가 상을 받은 것이 생각났다.

그 시는 나와 애인이 바다에 몰래 유골을 뿌린 일이 적혀있다

입금 할 돈도 없는데

진짜인 걸 들켜서 벌금 물면 어쩌지 

다시는 누구도 내 시를 찾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14:02

올리브 나무가 저 멀리 서있네

라고 문장을 고친다

아주 아주 멀리에 서있네

라고 문장을 다시 고친다

그런데 올리브 나무가 왜 이렇게 자세히 보이냐고.. 

어딜 어떻게 고쳐야 할지 모르겠다


14:05

(카톡!) 지갑 잃어버려서 어떡해 돈 좀 보내줄까?


14:05

뭐? 니가 돈이 어디있어 

쓸데없는 소리 하지마 

나 돈 많아라고 답장을 보낸다

(그리고 올리브 나무는 한 그루에 얼마일까 생각한다)


14:10

(띵동!) 전자금융입금 200,000  잔액 217,550

(카톡!) 맛있는 거 좀 사먹어 내 선물은 사오지 마 


14:16

몰래 그의 집주소를 찾아본다

올리브 나무를 선물 하기위해

쓸모는 없지만 버릴 수도 없는 것들을 위해 

20만원보다는 쌌으면 좋겠다

제발 이것만큼은 불법이 아니었으면 좋겠다


21:45

이거 내가 적은 문장이야

선물이야

그치만 집에 가기 전에 꼭 버려 (사진)


21:58

올리브 나무다! (사진)


22:38

버렸어?


22:38

(카톡!) 버렸어



* 2019년 7월 피렌체에서 로마로 가는 기차 안. 끝없이 펼쳐진 올리브 나무들을 보면서 노아의 방주 이야기를 생각했다. 노아는 재앙이 끝났는 지를 알고자 비둘기를 날려보냈고, 올리브 잎사귀를 물고온 비둘기 덕분에 마른 땅이 있다는 증거를 찾았다는 이야기. 그래서 비둘기는 평화의 상징이라는 이야기. 근데 대체 왜 평화의 상징이 되는 영광은 비둘기 혼자 독차지를 했는지. 거기에 서있던 올리브 나무는 그럼 무엇이었는지. 올리브 나무는 억울하겠다. 올리브 나무가 거기에 서있었는데.


올리브 나무가 서있다는 사실만 기억에 남을 글을 쓰고싶었다. 그 이야기에 비둘기는 나오지 않았으면 했다. 그러다 문득, 나에게 올리브 나무는 누구일까 생각하기. 조금의 고민도 없이 나의 유일한 올리브 나무를 떠올리기. 저 멀리 한국에 잘 있는 나의 올리브 나무.


(나의) 올리브 나무가 서있네. 저 멀리에 서있네.

그러나 너무 자세히 보이는 나의 올리브 나무가 서있다.


그런가하면 나는 여기에 서있다. 정말로 지갑을 잃어버린 나. 그 애가 돈이 없어 밥 굶을까봐 몰래 그의 계좌번호를 메모해둔 나. 올리브 나무를 살까 고민했으면서, 그 애한테 돈을 보내줄까 고민했으면서, 나 돈 많다고 큰소리 쳤으면서 되려 입금 받아버린 나, 이십만원을 받아서 이십 일만 얼마쯤 있는 나..

그런 내가 그냥 있다. 


그 애의 올리브 나무는 누구일까 생각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겨우 그 애의 비둘기 밖에 안될 것 같은 나.

갑자기 비둘기도 꽤 괜찮은 친구라고 옹호하고 싶어진 11시 30분부터 14시 16분까지의 이야기.

밥값 대신 올리브 나무를 선물하고 싶었다.

그러면 그 애는 나를 비둘기가 아닌 올리브 나무를 준 사람이라고 기억 할테니까, 

잘하면 올리브 나무라고 착각할 수도 있으니까.


‘올리브 나무가 거기에 서있네’라는 문장을 선물하고, 답장하지 않는 그 애에게 그냥 버려달라고 하고싶었던.

그럼 그 애는 정말 버릴 것 같아서, 차마 버려달라고 할 수는 없었던 21시 45분부터 22시 38분까지의 이야기. 없었던 이야기.


그리고 지금

올리브 나무도 비둘기도 그냥 서있거나 아무렇게나 있을테고

그 애는 아직도 이 시가 자기 얘기인 줄 모른다는 것. 

나는 피자에 올라간 올리브도 빼고 먹는 데, 그 애의 작은 사치는 비싼 올리브를 사먹는 것이라는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사실들은 남아있고, 좋은 올리브 나무는 정말 이십만 원쯤 한다는 이야기를 친구의 전남친에게 들었고, 얘는 왜 갑자기 나한테 말을 걸지..? 미친놈인가? 하면서 그 사람 인스타그램을 뒤적거리다가 실수로 좋아요를 눌러버린 일이 있었고, 네이버 지식인을 통해서 한국의 기후는 올리브 나무를 키우기 힘들다는 작은 지식이 추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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