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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솔티 May 05. 2023

나 너랑 사귀지도 않는데 왜 차임?

살면서 아주 많은 편지를 써왔습니다. 그중 하나를 골랐습니다. 

언젠가의 제가 누군가와 이별 하기 위해 쓴 편지입니다.


전송 시각: 11시 42분


오빠 전부터 생각했던 건데.. 오빠는 좋은 사람이야. 오빠의 도덕성이라든가, 꿈, 그리고 꿈을 위해 한 노력들 같은 것들… 오빠 말대로 오빠는 좋은 환경에서 자라왔고 그걸 잘 누려온 사람이란 것도 알아. 그래서 나한테 해준 것들 보면.. 말이 좀 웃기지만 요즘 애들 같지 않게 참 재고 따지고 이런거 안하는구나. 사랑 받으며 자랐고 그래서 사랑을 주는 법을 아는구나. 주고도 아까워 하지않는 사람이구나! 라는 걸 느꼈어. 


그런 점이 좋아서 오빠가 궁금했고, 계속 만나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었어. 그리고 오빠가 말하는 오빠의 장점들도 있지. 좋은 학교와 좋은 차, 지금의 직업 같은 것들. 근데 난 그런 것들은 사실 좋은 점이라기 보다 잘난 점이라고 생각해. 그리고 난 두 세번만 만나도 알 수 있는 그런 것들. 뭐가 얼마나 잘났느냐 하는 것들 말고, 오빠의 머리 안에 들어있는 취향과, 가치관, 원하는 삶 같은 정말 개인적인 것들. 난 그런 게 정말 중요한 사람이라서 오빠한테 계속 그런걸 물어봐왔었어. 우리가 엄청 오래 본 건 아니니까 내가 물론 오빠를 다 알지는 못하겠지만. 그런 와중에도 우리가 잘 맞지 않는다고 느꼈어. 취향과 가치관이라는 건 맞고 틀리고의 문제가 아니니 맞춰 갈 수도 있는 거 아닌가? 생각 할 수도 있어.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근데 난..오빠가 내 세계를 궁금해하는지.. 잘 모르겠고.. 나도 오빠의 세계가 궁금한가? 생각해보면 잘 모르겠어… 전에 내가 월남쌈 먹으면서 그랬었잖아. 나는 망원동에서 신혼집을 차리고 싶다는 로망이 있다고, 주말 아침에 느지막히 일어나서 같이 망원시장에서 짜파게티를 사오고, 한강에 피크닉을 가고, 친구 몇명 초대해서 소소하게 놀고 그런 걸 해보고싶다고. 그 동네의 분위기가 좋다고. 근데 그 때 오빠가 그러더라구 "거기는 학군이 안좋지 않나?" 라고. 그날 집에 가면서 생각했어. 오빠가 원하는 것과 내가 원하는 것은 너무나 다르고, 오빠는 내가 원하는 것을 원하는 날이 없을 것 같다고. 


어쩌면 내가 몇년 뒤에는 오빠처럼 학군부터 걱정하는 사람이 될 수도 있겠지만.. 음.. 적어도 지금은 그렇지 않아. 그리고 그렇다 한들.. 로망을 이야기 할 때 학군부터 떠오르는 사람과 내가 앞으로 어떤 대화를 나누게 될까 난 오래 고민했어. 어제도.. 내가 잘 모르고 관심 없는 롤 이야기를 한시간 가까이 들으면서… 어떻게 반응 해줘야 할지 모르겠음과 동시에 만약 내가 이렇게 게임을 모르지 않았다면 오빠는 더 재밌게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고 있겠지 라는 생각을 했어.


맞춰준다는 건,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을 위해 의견을 다 굽히는 게 아니고, 서로의 다름을 좋아하는 거라고 생각해. 오빠는 내가 재밌게 산 사람이라서 좋다고 했잖아. 오빠랑 달라서 좋다고. 근데 막상 내가 재밌게 살며 가지게 된 나의 취향과 가치관을 이야기 할 때, 오빠는 별로 관심이 없어보이더라고. 내가 원하는 신혼집, 내가 좋아하는 노래, 라이프 스타일 등등 오빠와는 너무 다른 그런 것들. 그리고 나도 마찬가지로 오빠가 좋아하는 주식이라든가 게임 노래 라이프스타일 등등.. 내가 진정으로 좋아할 수 있을지 잘 모르겠어. 우린 아마 더 오래 만나도 서로가 서로에게 관심 없는 분야를 꾸준히 얘기하는 한 쌍밖에는 안될 것 같다고 생각해. 


그리고 우리 둘다 자기 자신에게 자신감이 있는 사람들이라 가치와 의견을 바꿔가며 만날 의향도, 필요도 없는 사람들이기도 하고. 착한 사람이고, 누군가한테 잘해주는 방법을 잘 아는 사람은 드물어서 오빠는 나한테 소중한 사람이었지만, 문제는 내가 이** 라는 딱 그 한 사람의 세계를 온통 다 사랑할 수 없을 것 같아.


더 정들기 전에 나의 생각을 말해주고 싶었어. 만난 시간들이 즐거웠어. 

얼굴을 보고 얘기하면 내가 차분히 얘기를 못할 것 같아서 이렇게 전해.



1. 이 편지를 받은 그는 3분만에 제게 전화해 자기가 나에게 다 맞추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이 글을 다 읽기는 한걸까요?


2. 휘에게 나 이렇게 카톡 보냈어 하고 저 글을 보내줬더니

 “어우씨 푸쉬 뜬 것만 보고 개놀람. 나 너랑 사귀지도 않았는데 왜 차임?” 하며 식겁했었습니다.


3. 휘는 “글을 천천히 읽어봤는데 존나 예의를 한껏 갖추어 정중하게 빡대가리 노잼 새끼 돈만 많다고 만나기엔 내 청춘이 아깝자나 시발로마 라고 썼네” 라고 말했습니다. 사실입니다. 


4. 그는 “훈련소 환희랑 같이 있었는데 애들이 환희 꼬추 보러가자!!!! 이러면서 놀았었고 나도 따라가서 봤는데 환희 표정 진짜 안 좋더라 개웃겼어” 라고 말했었습니다. 저는 휘에게 그 일을 전하며, 어쩌면 좋지 진짜 존나 너무 없어보이는 그의 얄량한... 인간성 와 존나 쓰레기네..까지의 생각은 안들지만 와 되게 허접하다. 얘의 일상과 가치관 존나 허접하다. 라는 평가를 남겼습니다.  


5. 그는 “내가 예전에 의사 여친도 만나보고 로스쿨도 만나보고 그랬었는데 다 나랑 너무 비슷한 삶이어서 그런가 어쩌고저쩌고 재미가 없었고 근데 너는 다르고 어쩌고저쩌고” 하며 제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돌이켜보면 그에게 저는 게르마늄 팔찌였던 것 같습니다. 착용만 해도 건강해지는 게르마늄 팔찌만 있다면 당신도 초건강인?! 같은 광고문구가 있는 팔찌.저를 착용하고 다니면 자신도 힙해질 수 있을 것이라는 착각이 드는 그런 게르마늄 팔찌. 


6. 제가 만약 그와 결혼해서 산다면 크고 좋은 신축 역세권 아파트에서 살 수 있었겠지요, 그러나 저는 그냥 그 집의 화초가 되어야 했을 것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저에게 어울리는 삶은 아닌 것 같습니다.


7. 아무리 짧은 시간이었다지만, 저는 그를 왜 만났던 걸까요? 저도 가끔 저를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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