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센트 반 고흐-슬픔]
"당신을…. 조, 좋아해요."
저질러버렸다. 끝내 말하고 말았다. 1873년 어느 날, 스무 살의 빈센트 반 고흐는 그렇게 외제니 로예에게 고백했다. 곧 호감을 표할 생각이긴 했지만, 이처럼 뜬금없이 일을 벌일 계획은 없었다. 로예는 고흐의 영국 하숙집 주인 딸이었다. 도도한 인상의 열아홉살 소녀였다. 고흐는 그런 성숙한 분위기의 로예에게 오래전부터 연심을 품었다. 사이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날 고흐가 일을 저지른 후 둘 사이에는 어색한 침묵만 흐르고 있었다. 고흐는 이 정적이 차츰 두려워졌다. 차라리 무슨 말이라도 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무렵…. "빈센트. 미안해요." 귓가에 닿은 로예의 말이었다. 눈을 내리깐 그녀는 그에게 일말의 여지도 주지 않았다. "아, 아니. 내가 더 미안해." 고흐는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는 채 뒷걸음질쳤다. 얼굴이 새빨개진 그는 도망치듯 물러났다. 고흐는 좁은 방에서 숨죽여 울었다. 그는 로예가 하숙집의 다른 청년과 진작부터 눈이 맞았다는 걸 모르고 있었다. 둘이서 몰래 약혼까지 한 일 또한 한참 후에야 전해들었다. 그땐 정말 바보가 된 기분이었다.
그리고 8년 뒤, 고흐는 또 다시 사랑의 열병을 앓았다.
이번 상대는 사촌 코넬리아 키 보스스트릭커, 줄여서 케이였다. 그가 네덜란드 뇌넨에 있는 동안 함께 산 여인이었다. 얼마 전 남편을 잃은, 고흐보다는 일곱살이 많은 과부였다. 고흐는 그녀에게 거침없이 다가갔다. 호감 상대를 다시는 놓치지 않겠다는 각오였다. 케이는 그런 고흐가 귀찮았다. 동정심도 많고 배려심도 깊은 케이였지만, 그녀에게도 이 남자의 행동은 부담스러울 뿐이었다. 고흐는 분명 따뜻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뿐, 너무나 순수하고 이상적이었던 그는 현실 속 삶에는 늘 서툴렀다. 사랑에는 더더욱 서툴렀다. 케이의 마음을 모른 고흐는 끝내 그녀에게 청혼까지 했다. "싫어, 싫어. 절대로 안 돼!" 인내심을 내려놓은 케이는 대놓고 질색해버렸다. 이는 거절 이상의 절규였다. 케이는 이제 고흐가 무서웠다. 그녀는 고흐를 놔둔 채 암스테르담의 부모 집으로 재빨리 떠났다.
그런데, 그가 이곳까지 찾아올 줄은 몰랐다.
고흐는 애원하며 집 벽을 쾅쾅 두드렸다. "제발, 케이를 만나게 해주세요." 그는 문을 열어준 삼촌 앞에서 울먹였다. 그 또한 울컥하는 마음을 다잡지 못하고 있었다. 고흐는 고개를 이리저리 거칠게 돌렸다. 시선은 현관을 밝히는 램프 불꽃에서 멈췄다. "케이를 데려오지 않으면…." 고흐는 불꽃 앞으로 다가갔다. "제 손을 여기에 집어넣고 있겠어요. 그녀가 나올 때까지 계속 그렇게 하고 있을 거예요." 고흐는 슬픔과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그 또한 억지라는 걸 알았지만, 이것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고흐는 누가 말릴 틈도 없이 불에 손을 넣었다. 고흐의 비명이 온 집안에 울렸다. 숨어있던 케이가 오기도 전, 고흐는 기절하고 말았다. 그는 케이를 다시 보지 못했다. 그는 이제 몸도, 마음도 피투성이였다.
1882년 1월, 고흐는 헤이그의 골목길을 비틀대며 걷고 있었다.
그는 보풀이 잔뜩 묻은 외투 안으로 몸을 말아넣은 채 흐느적거렸다. 그의 그림자는 가난과 먼지 냄새를 폴폴 풍겼다. 고흐의 발걸음을 멈춘 곳은 술집이었다. 동전을 털어 한 잔만 더 걸치고 갈 생각이었다. 고흐는 거기서 또 거짓말처럼 사랑에 빠졌다. 바 테이블 구석에서 누군가 버린 술을 홀짝이려는 여인, 클라시나 마리아 시엔 호르니크였다. 줄인 이름으로 시엔이었다.
"그녀도, 나도 불행한 사람이야. 그래서 함께 지내며 서로의 짐을 나눠들고 있어. 그게 바로 불행을 행복으로 바꿔주고, 참을 수 없는 일을 참을 만하게 해주는 힘 아닐까? 그녀는 시엔이라고 해."
그 해 봄, 테오는 친형 고흐에게서 이런 내용의 편지를 받았다. 그가 그린 그림도 한 장 받아볼 수 있었다. 무릎을 팔에 괸 채 얼굴을 묻고 있는 나체의 여자였다. 지저분한 머리카락, 거친 손발, 앙상한 팔다리의 여성이었다. 몸을 파는 거리의 여인임이 분명했다. 아랫배가 불룩한 걸 볼 때, 곧 출산을 앞둔 임신부라는 점을 알 수 있었다. 앙상한 풀와 밑동뿐인 나무에서 그녀가 지금 늙고, 지치고, 병든 상태라는 것 또한 예측할 수 있었다. 그림 밑에 쓰인 제목은 '슬픔'이었다.
그림이 풍기는 분위기 그대로였다.
시엔은 고흐보다 한 살 많은 몸 파는 여인이었다. 그녀는 다섯 살 딸을 데리고 다녔고, 또 누군가의 아이를 임신하고 있었다. 가난과 성병, 알코올 중독 등 상황도 썩 좋지 않았다. 고흐는 술집에서 처음 본 시엔을 자기 작업실로 데려왔다. 먹을 걸 주고, 잘 곳을 챙겨줬다. 그녀의 늙은 어머니와 어린 자식이 살 공간까지 내어줬다. 늘 그랬듯 고흐는 이번에도 진심이었다. 고흐는 사랑을 사랑했다. 무수한 종교책을 읽은 그는 이 감정만이 인류의 구원이라고 믿는 사내였다. 고흐는 길 잃은 고양이를 사랑하듯 시엔을 사랑해보기로 했다. 시엔 또한 자기와 다를 바 없는 부랑자 같은 이 남자를 끌어안기로 했다. 둘의 드라마는 그렇게 동정과 연민의 늪에서 꽃을 피웠다.
행복한 순간이었다.
고흐는 시엔을 두고 그림을 그렸다. 상상력이 부족한 시엔은 자세를 취하기에 다소 투박했다. 그래도 모델 고용비 한 푼 없는 고흐에게는 소중한 연습 상대였다. 고흐는 시엔이 낳은 아기도 봤다. 그는 자기 자식일 리 없는 아이에게 빌럼이라는 이름도 붙여줬다. "사랑하는 그 여인이 아기가 잠든 요람 옆에 앉아 있었어. 내 마음에는 깊고 강렬한 감정이 밀려왔지." 고흐가 테오에게 쓴 글이었다. 둘은 때때로 헤이그 근처 바닷가인 스헤베닝헨을 찾았다. 고흐는 모래사장에 철푸덕 앉아 유화 작업을 했다. 시엔은 그런 그 옆에서 밀려오는 흰 파도를 봤다. "빈센트, 나는…." 시엔은 종종 눈시울을 붉힌 채 속삭이듯 말했다. "언젠가, 꼭 물에 빠져 죽어야만 해." 고흐는 그럴 때마다 시엔을 안아줬다. 시엔은 그 품에서 또 울었다.
둘의 찬란한 순간은 길지 않았다.
너무 가난한 사랑은 두 사람이 함께 가기에 너무 높은 산이었고, 너무 깊은 늪이었다. 별 다른 직업 없는 고흐는 테오가 보내주는 용돈으로만 살고 있었다. 그는 물감도 마음껏 갖지 못했다. 그가 살 수 있는 건 굳은 빵과 식은 우유 따위였다. 시엔과 그녀 가족까지 먹여살리는 건 애초에 힘든 일이었다. 두 사람은 애써 외면했지만, 처음부터 시한부의 관계였다.
고흐의 부모도 펄쩍 뛰었다.
당장 다 때려치우고 집에 올 것을 명령했다. 고흐는 사랑을 위해 불구덩이에 몸을 던진 적도 있는 남자였다. 그런 그는 무조건 버티려는 마음 뿐이었다. "돈 없고 몸 아프면 열에 하나는 꼼짝없이 죽는다지만, 시엔과 헤어지느니 차라리 그 길을 택하겠어. (…) 시엔은 나를 사랑하고, 나도 그녀를 사랑해. 나와 그녀는 서로에게 충실하기로 약속했어." "들어가보니 그녀는 시든 나무처럼 늘어져 있었어. 차갑고 메마른 바람에 시달려 새순까지 말라버린 나뭇가지 같았어. (나는)절대로 떠나지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그녀를 안심시켰어." 이쯤 반 고흐의 글이었다. "단 한 번의 선함을 본 적 없는 그녀가 어떻게 선량해질 수 있겠어?" 그는 시엔의 남루함을 지적하는 말에 대해선 이렇게 따졌다고 한다.
그러나 바람은 바람이고, 현실은 현실이었다.
1883년, 가을. 둘은 갈라섰다. 서로를 만나고 일 년반쯤 흐른 후였다. 고흐가 시엔에게 옮은 성병으로 죽다 살았다는 설, 어머니의 닦달로 몰래 몸을 팔던 시엔이 끝내 고흐에게 걸리고 말았다는 설 등이 있다. 시엔은 결별 후 세탁부로 생을 이어갔다. 1901년, 한 남자와 결혼했지만 3년 뒤 극단적 선택으로 생을 마감했다. 그녀는 잊은 일을 떠올린 사람처럼 갑자기 강물에 몸을 던졌다고 한다. 이로써 가장 찬란했던 때 꺼낸 그 말을 실현한 셈이었다.
고흐는 다시 혼자였다.
고흐는 뇌넨에 있는 부모 집으로 왔다. 몇 개 되지도 않는 짐을 풀었다. 창밖 너머 보이는 언덕에선 풍차가 돌돌 돌고 있었다. 조용한 마을이었다. 그는 이곳에 머물며 뜨내기처럼 정처없이 걸었다. 마음에 드는 곳을 찾으면 곧장 이젤을 세웠다. 그때부터는 햇빛이 살갗을 태우든, 거머리가 피를 빨아먹든 상관치 않았다. 그는 화혼에 휩싸인 양 하루에만 한 점 이상의 그림을 완성할 때도 있었다. 고흐는 이 시기에 '누에넨의 목사관 정원'을 그렸다. 그는 침침한 하늘과 거친 땅, 우중충한 빛깔의 나무로 화폭을 가득 채웠다. 검은색 차림새의 여인을 더했지만, 이는 그림에 처연함을 더할 장치일 뿐이었다. 고흐는 몸도, 정신도 지쳐있었다. 그의 허한 마음을 그대로 담은 것이었다.
냉랭했던 가족은 그런 고흐에게 마음의 문을 다시 열었다.
그는 핏줄들의 보살핌에 천천히 기운을 되찾는 듯했다. 고흐는 이제 시골의 소박한 장면 그리기에 삶을 바치기로 했다. 그렇게 해 뼛속 깊이 존경하는 장 프랑수아 밀레의 정신을 이어갈 생각이었다. 그에게 '감자 먹는 사람들'은 이러한 선언과도 같았다. 이는 석유램프 불빛 아래 모인 농민 가족의 식사를 담은 그림이었다. 오늘을 힘껏 살아온 이들이 내일 또한 정직하게 노동하기 위해 감자를 찍어먹는 장면이었다. 그가 보고 느낀 농촌 특유의 애틋하면서도 서글픈 분위기가 꾹 담긴 작품이었다. "진전되고 있어. 지금껏 네가 본 내 그림과는 아주 다른 무언가가 있어. 그 점은 분명해." 이 무렵 고흐가 테오에게 쓴 편지였다. 그는 이제야 갈 길을 찾은 듯했다. 착각이었다. 숨죽인 시련은 또 고개를 들었다.
고흐에게 불행은 바다 같았다.
슬픔에 흠뻑 젖은 그는 재차 용기를 내 앞으로 걸었다. 이번에는 틀림없이 이상(理想)을 손에 쥘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썰물처럼 잠깐 빠져나간 슬픔은 밀물처럼 어김없이 다시 밀려왔다. 소금물처럼 짠 고통을 잔뜩 머금은 그가 할 수 있는 건, 어쩔 도리 없이 허우적대는 일뿐이었다. 일이 그렇게 커질 줄은 몰랐다. 고흐는 열 살 연상의 이웃 여인 마르호트 베게만이 스스로 독극물을 먹은 데 대해 충격을 받았다. 이유가 자기 때문이었다는 걸 들었을 때는 몸을 가눌 수 없었다.
사연은 이랬다.
베게만은 낭인처럼 떠도는 고흐를 좋아하기 시작했다. 다만, 이는 순전히 혼자만의 속앓이였다. 사랑꾼 고흐는 이미 다른 대상에 사랑을 쏟아붓고 있었다. 그건 예술 그 자체였다. "'감자 먹는 사람들'을 그리느라 여념이 없어. (…) 무엇보다 그림 안에 생명을 불어넣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어." "농민의 삶을 종일 지켜보면, 다른 어떤 일도 생각하지 못하고 그들의 삶에 빠져들게 돼." 글로 고백했듯, 당장의 그는 농촌 풍경 그리기에 푹 빠져 있었다. 그에게 또 다른 사랑을 할 여유 따위 없었다. 그런데도 베게만이 뜻을 접지 않았다. 그녀는 저 혼자 반 고흐와의 결혼을 결심했다. 이 뜻을 양가 부모에게 알리기도 했다.
돌아오는 건 시큰둥한 반응밖에 없었다.
베게만에게는 뿌리 깊은 불안증이 있었다. 이 증상은 이어지는 좌절 속에서 살을 찌웠다. 내몰린 그녀가 택한 게 극단적 선택 시도였다. 그녀는 겨우 목숨을 건졌지만, 이 작은 마을에선 유례없는 대형 스캔들이었다. 이때부터 고흐는 억울하게 손가락질 받아야 했다.
사건은 또 터졌다.
이번에는 농가의 한 소녀였다. 그녀는 언젠가부터 자꾸 헛구역질을 했다. 배도 차츰 불러왔다. 더는 감출 수가 없던 그녀는 울면서 고백했다. 혼외임신이었다. 사촌과의 부적절한 관계였다고 하지만, 마을 사람들은 무턱대고 고흐를 문제의 남자로 의심했다. 그가 그녀를 모델로 그림을 그린 적 있다는 이유였다. 고흐는 억울함을 믿는 이는 많지 않았다. 마을 유지(有志)는 만나는 모든 이에게 반 고흐의 모델로 나서지 말 것을 당부하기도 했다. 그는 더는 이곳에 있기가 힘들었다. 고흐는 이까지 오면서 모든 걸 포기했었다. 이제 그가 원하는 건 오직 농촌 풍경뿐이었으나, 세상은 그조차도 허락하지 않았다.
고흐는 1853년, 네덜란드 남부 마을 쥔더르트에서 목사의 맏아들로 출생했다.
그는 열한 살 때 기숙학교에서 영어와 독일어, 프랑스어를 익혔다. 이어 열세 살 무렵 중학교에 가는데, 여기서 제대로 된 첫 미술 수업을 들을 수 있었다. 학업을 오래 이어가지는 못했다. 그는 겨우 2년 뒤 자퇴했다. 이쯤부터 발작이 시작됐다는 설, 그저 학비가 없었다는 설 등이 있다. 1869년, 고흐는 삼촌들을 따라 구필(Goupil) 화랑에 취업했다. 동종 업계 중에서도 꽤 규모가 큰 곳이었다. 거기에서 안목과 지식을 키웠다. 일도 썩 잘하고, 손님에게도 친절했다. 그는 이렇듯 기본적으로 성실하고 다정한 사람이었다.
고흐는 1873년께 구필 화랑 런던 지점으로 몸을 옮겼다. 그리고 얼마 안 돼 로예에게 바람을 맞고 만다.
기운 빠진 그는 그때부터 일도 제대로 못했다. 이 무렵 그림을 무조건 비싸게만 팔려고 한 관리자와의 갈등이 컸다는 말도 있다. 그는 결국 잘렸다. 부모는 일거리를 잃은 고흐에게 목사의 길을 권했다. 그는 가난한 탄광촌을 찾았다. 그곳에서 광부처럼 살며 신의 뜻을 알렸다. 그러던 어느 날, 고흐는 새카만 먼지를 뒤집어 쓴 사람들이 곡괭이를 지고 퇴근하는 것을 봤다. 이들은 흐르는 땀을 훔치며 가족이 기다리는 집으로 가고 있었다. 그가 살면서 본 그 어떤 장면보다 성스럽고 눈물겨웠다. 마음 속 응어리진 무언가가 뭉근히 풀리는 기분이었다. …이런 걸 그려야겠다. 그가 구원 대신 위로를 택한 순간이었다. 돌고 돌아 화가가 되기로 마음 먹은 이유였다.
하지만 고흐의 그림을 원하는 이는 없었다.
여전히 화랑에서 일한 동생 테오가 물심양면 도왔으나, 단 한 점의 그림도 팔지 못했다. 속상한 고흐는 싸구려 술이나 홀짝이며 몸을 달랠 요량이었다. 낡은 술집 문을 연 그때, 고흐는 시엔과 눈이 마주쳤다. 둘은 찰나의 사랑을 했다. 끝내 그가 사랑한 자리는 다시 폐허가 되고 말았지만.
지친 고흐가 찾은 곳이 뇌넨의 부모 집이었다.
고흐는 옆집 여자 베게만이 독약을 먹을 줄은 추호도 몰랐다. 그는 결단코 농가의 소녀를 임신시키지도 않았다. 이는 공허한 외침일 뿐이었다. 그는 오해와 누명을 흠뻑 뒤집어써야 했다. 방에 틀어박혀 정물화만 그리는 날이 점점 늘 수밖에 없었다.
고흐는 결국 떠날 채비를 했다.
1886년, 그는 프랑스 파리행 야간열차에 몸을 실었다. 이 매력적인 도시는 고흐에게 설렘과 절망을 함께 안겼다. 고흐는 젊은 인상주의 화가들의 화사한 그림을 보고 전율을 느꼈다. 그가 살면서 본 가장 맑은 작품들이었다. 그 또한 지금보다 더 밝은, 보다 강렬한 색채를 화폭에 쏟아내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 도시에서조차 고흐가 있을 곳은 없었다. 그는 여기서도 돈을 벌지 못했다. 밤낮없이 그렸지만, 그의 작품을 사겠다는 이는 여전히 없었다. 고흐는 종종 술집 구석에 앉아 울었다. 왜 이렇게 삶이 풀리지 않는지를 곱씹으며 흐느꼈다. 그림만 그만두면 또 다른 길이 열릴 수 있다는 걸 알았지만, 죽어도 이것만큼은 포기할 수 없었다. 그러는 사이 싸구려 압생트와 브랜디가 쌓였다. 파리에 있는 동안 고흐의 건강은 급격히 악화했다. 울컥하는 마음의 병 또한 깊어졌다.
1888년 2월, 고흐는 파리에서 벗어나 남부의 아를로 향했다. 그는 조용한 이 시골에서 일종의 화가 공동체를 꾸리고 싶었다.
그의 뜻에 응한 화가는 딱 한 명이었다. 폴 고갱, 마초적 기질이 다분한 또 다른 아웃사이더였다. 둘은 나란히 앉아 그림을 그렸다. 태양을 그렸고, 해바라기를 그렸고, 마을의 여인을 그렸다. 두 사람은 이 와중에도 툭하면 싸웠다. 애초에 둘의 성향은 극과 극이었다. 잘 맞을 수 없는 사이였다. 서로가 꾹 눌러온 갈등이 폭발했다. 고흐와 고갱은 죽일 듯 크게 다퉜다. 발작한 고흐는 자기 귀를 싹둑 잘랐다. 기겁한 고갱은 파리로 돌아가버리고 말았다. 둘이 함께 살고서 고작 2개월 만에 생긴 일이었다.
나는 구제불능인가.
생레미의 요양원 안 창가에 기댄 고흐가 중얼거렸다. 그는 이 시설의 환자이자 요주의 인물이었다. 그 또한 자신의 발작이 더 크게, 더 자주 생기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는 이러다 붓도 쥘 수 없는 상태가 되지 않을지를 진심으로 걱정했다.
고흐는 종종 시엔과 함께였던 헤이그 시절을 곱씹었다.
당시 고흐는 그림을 그리기 위해 빈민 구제소를 찾았었다. 거기서 그 남자를 봤다. 그는 앙상하게 마른 노인이었다. 낡은 작업복을 입고 헤진 구두를 신은 볼품 없는 사람이었다. 그는 울고 있었다. 다가서면 끅끅대는 흐느낌을 들을 수 있었다. 그는 곧 죽을 것처럼 보였다. 고흐는 이 불쌍한 자가 고통을 넘어선 영원의 세계로 갈 수 있기를 바랐었다. …내가 지금 그 사람 꼴이군. 현실로 돌아온 고흐는 혼잣말을 했다.
그는 힘없이 붓을 들었다.
8년 전 노인의 모습을 다시 그리기 시작했다. 두 눈을 가린 채 우는 모습, 털썩 주저앉고선 고개 숙여 절망하는 모습 등 사실상 그의 자화상과 다를 바 없는 작품이었다. 고흐는 제목을 붙였다. 깊은 사색이 담긴 문장 한 줄이었다. 그것은 '영원의 문에서(At Eternity's Gate)'였다. "내가 얼마나 더 큰 슬픔과 불행을 겪어야 하는지 알 수 없어. 이제는 어디로 가야 할지도 전혀 모르겠다." 이쯤 테오에게 쓴 글이었다.
슬픔은 아름다움을 낳는다.
고흐는 격정적인 내면, 요동치는 마음, 솟구치는 불안감을 품고서 작품 활동을 이어갔다. 그런 그의 심경이 빼곡히 묻어있는 게 이때 완성한 '별이 빛나는 밤'이다. 고흐의 가장 아름다운 그림으로 꼽히는 이 작품은, 아이러니하게 그가 가장 큰 절망에 빠졌을 때 탄생했다. 고흐가 마지막으로 머문 곳은 오베르였다. 그는 어딘가 쫓기는 양 미친듯이 그림을 그렸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 머릿속에 떠오르는 모든 형상을 화폭에 표현했다. 때때로 참을 수 없이 마음이 북받칠 땐 물감을 씹어먹었다.
고흐는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몸과 정신 상태였다.
그럼에도 그의 죽음은 무척 허무했다. 권총으로 인한 극단적 선택으로 알려졌지만, 이를 놓고서는 말이 분분하다. 여기서 마지막으로 여인이 한 명 또 등장한다. 당시 고흐의 주치의였던 폴 가셰의 딸, 마르게리트다. 예술 애호가였던 가셰는 고흐를 좋아하긴 했다. 하지만 불안정한 그를 사윗감으로 생각 한 적은 없었다. 그런데, 고흐와 마르게리타 사이가 심상치 않았다. 고흐는 마르게리타의 초상화를 그린다며 그녀 방을 마음껏 오가고 있었다. 이를 본 가셰는 고흐를 불러세워 자존심을 건드렸다. 끝내 서로가 정제되지 않은 폭언을 주고 받았다. 그리고 얼마 후, 고흐가 죽은 것이었다. 고흐가 실연에 대한 충격으로 그런 길을 택한 게 아닐까. 가셰의 가족들은 이렇게 추측했다. 이 밖에 고흐의 단순 실수였다는 설, 동네 불량배의 소행이었다는 설 등도 있다.
그는 옆구리 관통상을 입은 채 여관까지 걸어왔다.
두 평짜리 다락방에서 끙끙대던 그는 이틀 뒤 죽고 말았다. 1890년 7월29일, 새벽 1시30분이었다. 지역 언론은 빈센트 반 고흐라는 서른일곱 살 화가가 스스로 죽음을 택했다고 썼다. 이마저도 단신이었다. 고흐는 방랑과 방황의 화가였다. 그의 삶은 늘 서정적이며, 언제나 잠정적이었다. 그런 그가 마지막으로 짐을 푼 장소는 아마, 영원의 문이 있는 영원의 세계였으리라.
〈참고 자료〉
반 고흐, 영혼의 편지, 빈센트 반 고흐, 위즈덤하우스
반 고흐가 그린 사람들, 랄프 스키, 도서출판 이종
빈센트 빈센트 빈센트 반 고흐, 어빙스톤, 청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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