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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희원 Feb 16. 2023

나의 감정은 수동적 감정이었다.

에티카 5부 전반부 (2)

정리 3. 수동 감정은 우리가 그것에 대해 명석판명한 관념을 가지자마자 수동이기를 멈춘다.

정리 4. 모든 신체 변용에 대해 우리는 어느정도의 명석판명한 개념을 형성할 수 있다.

정리 4. 주석. 이로부터 모든 감정에 대해 어느정도의 명석판명한 개념을 형성할 수 있다는 점이 따라나온다.... 따라서 모든 사람이 절대적으로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부분적으로는 우리 자체와 우리 감정에 대해 이해하는 역량을 가지며 결과적으로 감정들의 작용을 제어할 수 있는 역량을 가진다.... 그러므로 우리는 가능한 한 각각의 감정을 명석판명하게 알도록 특별히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그리하여 감정으로부터 벗어나 명석판명하게 지각한 사물들만을 생각하도록 하여 정신이 완전히 만족하게 한다. 나아가 감정 그 자체는 외부 원인에 대한 생각으로부터 분리되어 참된 생각과 결합할 수 있다. 그 결과, 사랑과 증오 및 이와 같은 감정들이 사라질 뿐 아니라 이러한 감정들에서 일반적으로 생기는 욕구 혹은 욕망도 과도하지 않게 된다.

인간이 능동적이라 일컬어지는 것과 수동적이라 일컬어지는 것은 동일한 욕구에 의한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로 하여금 무엇인가를 하도록 만드는 욕망은 모두 부적합한 관념에 의해 생길 수 있지만 적합한 관념에 의해서도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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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자기윤리학에서 나는 내가 원하는 이성의 욕망이 <존재를 증명하는 것>이라고 결론을 지은 적이 있다. 나의 자아를 분석해본 결과 내가 지금 보기에 내 자아는 <존재를 증명하라>라는 이성의 외침, 욕망에 많은 영향을 받고 있다. 


나는 존재를 증명하라는 이성의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 지금껏 명예, 관심, 안정성 등을 추구해왔으며, 헤어짐, 실패 등을 두려워해왔다. 그러나 내가 지금까지 추구하고 두려워했던 모든 것들은 수동적인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정리 4 주석>에 나와있듯이, 인간이 능동적이라 일컬어지는 것과 수동적이라 일컬어지는 것은 동일한 욕구에서 기인한다. 예컨대, 내가 생각하는 이성의 욕망인 <존재의 증명>은 나뿐만이 아니라 대다수의 인간들이 추구하는 욕망일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욕망에서 수동적인 것들이 나올 수도 있고, 능동적인 것들이 나올 수 있다.


내가 추구하는 명예, 관심, 안전성의 추구와 헤어짐, 실패 등에 대한 두려움은 수동적 감정이었다. 그 이유는 나의 정신이 아니라 외부 사물의 역량에 의해 규정되는 것이기 때문이다(4부 부록 2). 나는 나의 존재를 외부사물을 경유하여 증명하려고 하였다고 생각한다. 특히나 다른 인간들을 통해 나의 존재를 증명하려고 했다. 그렇기때문에 싫음과 고통에 대한 나의 두려움은 과도했으며, 좋음과 행복에 대한 나의 추구는 맹목적이었다고 생각한다(정리 4 주석). 


그렇기에 내가 수동적인 지금의 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첫 번째로, 나의 감정에 대한 명석판명한 관념을 가질 필요가 있으며(정리 3), 외부원인으로부터 나의 감정을 분리시킬 필요가 있다고 지금은 생각한다.

첫 번째로 나의 감정에 대한 명석판명한 관념을 가지기 위해서는 이성의 욕망인 <존재의 증명>으로부터 나오는 나의 좋음과 싫음을 조금 더 깊이 이해해야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예컨대 나는 실패를 두려워한다. 왜 실패를 두려워하는가? 내가 생각하는 실패란 무엇인가? 또한, 나는 왜 다른이들로부터 명예를 추구하는가? 내가 생각하는 명예란 무엇인가? 


다른 모든 이들이 실패라고 바라보아도, 다른이들이 명예롭지 못한 행동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나에게 실패이고, 명예롭지 못한 행동이 될 이유가 있는가? 예컨대, 다른 이들이 하대하는 직업 내지 일을 하지만 그것이 내 스스로의 정신 속에서 충분히 납득가능하고 행복함을 불러일으킨다면, 그것은 과연 실패인가? 명예롭지 못한 직업인가? 다른이들이 선망하고 명예롭다고 생각하는 직업을 가지면 나는 명예롭고 행복한 인간이 되는 것인가? 그 직업이 나의 자기보존에 있어서 티끌만큼의 도움이 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왜 나는 지금껏 다른 이들이 보는 관점에 나를 맞추려고 했을까? 타인은 나에게 있어서, 특히 나의 자기보존에 있어서 어찌보면 길거리를 지나갈 때 자주 보는 가로수와 별반 다를 바 없는 존재이다. 자기보존은 오직 나의 정신이 할 수 있는 작업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지금껏 나의 존재를 타인의 시선 속에서 찾으려고 하였다. 매우 어리석은 일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두 번째로, 외부원인으로부터 나의 감정을 분리하기 위해서는 나의 외부원인을 조금 더 정확히 파악해야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예컨대, 나는 지금껏 가족이라는 울타리 속에서 나의 감정을 형성해왔다. 가족은 나에게 가장 소중하고 크고, 동시에 구속적인 외부원인이다. 나는 지금껏 행복하고 비교적 자유로운 가정에서 살아왔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렇게 자유로운 가족을 구속하는 하나의 기제로 만든 것은 내 자신이었다고 생각한다. 


예컨대, 지금 다시 생각해보면 내가 공무원이 되고 싶다는 그 생각 자체를 아버지가 강요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항상 아버지는 공무원에 대해서 비판하고, 나보고는 절대로 공무원이 되라고 한 적이 없다. 오히려 공무원을 하지 말라고 그랬다. 대학교를 문과로 간 것도, 좋은 대학을 추구한 것도, 좋은 직장을 추구하는 것도, 그 어느 것도 아버지와 어머니가 강요한 적이 없다. 내가 내 마음 속에서 만들어낸 허상의 무엇이었다고 생각한다.


물론 어머니와 아버지가 나에게 아무런 조언을 안 한것은 아니지만, 그것을 필요이상으로 따르고 하나의 내적 규율로서 규정한 것은 나 자신이었다. 나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누구보다 소중하게 여기기에, 그들의 말을 절대시하였다. 물론 아버지와 어머니의 조언이 항상 틀린 것은 아니며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귀중한 조언이지만, 그럼에도불구하고 앞으로 나는 자기보존과 관련된 모든 것은 남들의 조언이 아니라 나의 이성을 통해 판단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나의 이성보다 나의 존재와 존재의 원인을 잘 파악하고 있는 것은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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