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바롭스크
눈 뜨니 다음 날.
조식 없이 예약한 호텔인데 밖에 나가자니 너무 본격적으로 무장하고 나가야 한다는 느낌에 1인 500 루블 내고 조식당 갔다.
조식당 창으로 비치는 아침 해. 신기하게 일출이 핑크빛 보랏빛으로 예뻤다.
이 색감을 보려고 늘 여행 가면 매직 아워 맞춰서 선셋 포인트 찾아가곤 했는데, 신기하게 러시아에선 일출이 이렇게 예뻤다.
여행 사진이 백 장이든 천 장이든 재밌게 봐주는 Y를 위해 조식도 착실하게 찍어 두었다.
당연히 리조트 같은 데 비할 바는 안 되지만, 추운 날의 따뜻한 한 끼 정도.
여기서도 얇고 쫄깃한 팬케이크, 블린으로 아침을 맞이했다.
이쯤 되면 창문 헌터?
어쩜 이리 햇살이 예쁜지.
블라디/하바롭은 할 거 없다-는 명성에 걸맞게 일정도 매우 여유롭게 짰던 터라 꽤 늑장을 부리다 나왔다. 시내까지 걸어서 갈 만한 거리라 얼음 강 따라 슬렁슬렁 산책하며 걷기.
근데 확실히 하바롭스크는 블라디보스토크보다 10도 이상 낮은 게 온몸으로 체감됐다. 나오자마자 미처 가리지 못한 얼굴이 너무 추워 마스크를 꼈는데, 나의 날숨이 콧대 위로 빠져나오다가 속눈썹에 붙어 얼음이 되었다.
겨울 짤 같은 데서나 보던, 물 뿌리면 언다는 러시아가 이래서구나- 약간 실감됐다.
속눈썹에 얼음이 맺히다니! 외려 속눈썹이 거슬려서 곧 마스크는 빼 버렸다.
블라디 해양 공원과는 다르게, 아무도 없는 아무르 강가에 웬 차우차우를 데리고 산책 나온 사람이 있었다.
맨발로 다니는 너에게 리스펙 날린다.
아무르 강가 따라 걷다 보니 하바롭스크의 메인 스트릿이 나왔다.
성모 승천 대성당 들렀다가 점심으로 찜해 두었던 흘레보먀시로 들어 가 버거 주문.
수제 버거는 맛있었고(서울에서도 맛볼 수 있는 맛있는 수제 버거 정도지만), 레모네이드라고 써져 있어서 시킨 음료는 진저에일과 섞은 느낌이었는데 맛있었다.
추울 만하면 아무 가게에 들어 가 구경을 했는데, 문재인 대통령 마트로슈카도 있었다.
걷다가 걷다가 레닌 광장에 다다라 얼음 조각 수상작들도 구경하고, 꼬꼬마 사이에 끼어 얼음 미끄럼틀도 타고.
좀 더 걷다가 걷다가 보니 중앙 시장에 도착.
다행히 따뜻한 실내 시장이 있었다.
한국에선 홈플이랑 이마트만 가면서 여행지에선 굳이 재래시장 찾아가는 청개구리 심보.
반찬, 햄, 치즈부터 디저트까지 다채로웠다.
메도빅 도전은 아직 끝나지 않아 시도했지만, 역시나 여전히 khleb mleko가 1등
청개구리 심보는 디저트에서도 발휘. 굳이 찾아 먹지 않는 디저트도 맛집 저장해 두고 찾아갔다.
에끌레어 공장이라는 귀여운 매장에 가서 꿀 에끌레어, 초코 에끌레어 포장해서 호텔로 돌아갔다.
음. 나쁘진 않지만, 보기에 더 좋다.
점심 먹기 전 들른 성모 승천 대성당에서 산 십자가 펜던트. J를 위해 샀다.
선물 사야지- 의무감 가지고 여행했다가 온종일 선물 고민에 여행을 망쳤던 경험이 있어서 웬만하면 선물은 아예 안 사는데, 이건 너무나도 J에게 찰떡인 선물이었다.
러시아 정교회는 십자가에 가로 두 줄이 더 있어서 교리가 다른 크리스천에게 선물하기 좀 그런가.. 싶었는데 이건 그런 것 없이 작고 심플하면서도 화려한(?) 그 말도 안 되는 모순적인 매력이 있어서 샀다. 아마 순은이고 퀄도 좋은데 200 루블인가? 저렴해서 냉큼 샀다.
역시 기념품은 성당이나 박물관 미술관에서 사야 해.
에끌레어와 커피 마시며 몸 좀 녹이고, 얼마 간 또 나가기 싫어 빈둥대다 보니 배가 꺼졌다.
이때를 기다렸으니 찾아 두었던 샤슬릭 집으로 이동! 늘 여행 가기 전 검색할 때면 그 지역에서 꽤 오랜 시간을 보낸 사람들의 이야기를 찾기 위해 OO교환학생, OO생활 등으로 키워드를 검색하곤 하는데 저녁 식당으로 찾아 놓은 이 집 역시 교환학생 블로그에서 본 식당이었다.
가는 버스 맨 뒷자리에 앉았다가, 내가 러시아에 있구나를 또 한 번 체감한 순간.
모자 안 쓰면 위험한 추위야.
버스로 50분 걸린다고 나왔지만 시간 많아 그냥 버스 탔는데 20분밖에 안 걸려 도착한 것 같다.
Irkutskaya Ulitsa, 8.
버스에서 내려 구글맵 켜고 식당 찾아가려니 살짝 으슥했다.
어둑어둑+개 짖는 소리의 조합.
그렇게 무섭진 않았지만, 겁이 조금이라도 많다면 일찍 가는 게 좋을 것 같던 식당.
찾았다.
러시아어 메뉴판 밖에 없었지만, 직원 분이 매우 열심히 설명해 주셔서 이것저것 시켰다.
아마도 양고기를 매애~매애~하면서 설명하길래 아~ lamb? 했더니 lamb! 하시고
우~하길래 아~~ 소?! 했더니 소!! 하시길래 오~~ 했지만, 구글 카메라 번역으로 확인해 보니 아니었다.
이 형 나처럼 그냥 따라 하는 걸 잘하는 형이었어. 하지만 돌이켜 보니 러시아에서 만났던 그 어떤 서버보다 열성적으로 설명해 주셨던 것 같다. 팁 좀 많이 드리고 올 걸..
날이 추우니 자꾸 보르쉬. 근데 여행 중 먹었던 것 중 제일 뜨끈뜨끈+맛있었다.
꼬치에 끼워 나오고 서버 이고르 형이 먹기 좋게 다 빼주셨다.
가격도 저렴하고 맛도 좋고 굳!
냉장고보다 밖이 더 추워서 창문 밖에 둔 물은 이렇게 꽁꽁 얼었다. 냉장고 필요 없으~
아르한겔스크 보드카+오렌지 주스를 섞은 스크루 드라이버로 평온하게 마무리.
느긋한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