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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isu Nov 19. 2020

그냥 제주도 이야기

제주 보름 살기

5년 만이다. 겨울로 넘어가는 문턱의 제주 공기는 금방 떠나온 샌프란시스코를 떠오르게 했다. 우리가 머무는 보름 동안 날씨가 워낙 좋았지만 떠나기 전 날, 세차게 불어대는 바람까지도 샌프란시스코의 바람과 쏙 빼닮았다. 어디서나 쉽게 만날 수 있는 까만 돌담과 돌담 안에서 풍성하게 익어가는 셀 수 없는 귤나무들, 파란 하늘에 몽게몽게 떠있는 하얀 구름들과 하늘에 맞닿아 끝없이 펼쳐지는 바다를 바라보는 넉넉한 시간 속에서 제주만의 뚜렷한 특성을 매일 조금씩 새겼다.


 "제주도에는 편의점보다 카페가 많대요." 누군가와 나눴던 대화처럼 '물 반 카페반'이라고 해야 더 정확히 표현되려나. 정말 카페가 많고 얼마나 화려한지 오랜만에 돌아와 한국에서 만나는 신문물에(?) 신나기도 했다. 한편으로는 저마다 힘이 세게 들어간 카페들에 부담스럽기도 했다. 꽉 잡혀 있는 각을 하나라도 흐트러트리면 안 될 것 같아서 행동 하나하나 조심스러웠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노 키즈존이라는 친절한 안내로 문전박대를 당하기도 했다.


제주 카페 이모저모


여유롭게 쉬었다가 가려던 마음과는 달리 이쪽저쪽 가보고 싶은 곳이 자꾸 늘어나 열심히 다녔다. 그럼 그렇지. 가만히 있는걸 제일 못하는 내가 볼거리 먹을거리 가득한 제주도에 왔는데 부지런히 돌아다녀야만 했다. 엄마, 아빠, 어머님, 아버님께서도 번갈아 며칠 다녀가셨다. 부모님께 좋은 곳을 보여드리고 싶은 마음에 더욱 가열차게 여행자의 모드로 즐겼다. 15일이라는 시간은 그렇게 가족과 셋이 가끔 둘이 즐기다 보니 훌쩍 흘러버렸다.
 

부모님이 요즘 애들은 이렇게 여행하는구나, 어떻게 이런 데를 알고 다들 찾아오니 하시며 시골 마을 길 굽이 굽이 들어가 도착한 목적지에서 매번 의아해하셨다. 대체 있을 것 같지 않은 곳에 있는 카페들도 그렇고, 그곳에 찾아오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에 또 한 번 놀라셨다. 우리 시대의 여행법인 인스타그램과 지인 추천, 리뷰, 검색 등을 조합해 가며 찾아낸 일정에 기꺼이 함께해 주셨고 즐거워해 주셨다. 아기자기함과 섬세함이 묻어나는 각양각색의 카페들을 찾아서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기도 했고 바다 모래사장에 앉아서 주변에서 들리는 한국말에 동질감을 느끼며 안도하기도 했다. 300개 이상 있다는 제주도 오름 중에서 몇 곳은 아인이와 함께 찾아 오르며 적당한 뿌듯함도 챙길 수 있었다.


금악오름과 새별오름을 정복한 아인이

남편의 안경을 사러 들렀던 한 안경점에서는 친구도 하나 얻었다. 워낙 첫 만남부터 친근했던 사장님과 두 살짜리 아들 운율이, 안경을 산 인연으로 만나 커피도 함께 하며 서로의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아이들도 금방 친해져 같이 시간을 보냈다. 제주에 내려온 지 2년째인 친구는 얼마 전 안경점을 열고 광학과를 다니며 꿈을 향해 달리고 있다고 했다. 아이를 키우며 자신의 꿈을 향해 차근차근 달려가고 있는 평범하지 않은 친구를 보며 신선한 자극을 받았다. 나는 앞으로 어떤 길을 걸어가면 좋을까.


우리보다 먼저 한 달 살기를 와있던 친구네는 내년 6월까지 제주 살기를 연장하기로 하고 아이의 유치원 검색까지 완료한 상태였다. 한 달 살기, 일 년 살기로 제주도에 왔다가 더 길게 머무는 사람이 많다고 하더니 친구네가 그렇다. 남편도 제주 생활이 좋은지 한 달 더 있다 갈까 한다. 말이 안 되는 것도 아니었지만 미국을 떠나오며 가장 의미 있게 생각했던 점 중 하나가 그동안 아쉬웠던 '가족과의 시간'을 더 보낼 수 있다는 데 있었다. 미국에 비하면 훨씬 가까운 거리인 제주에서도 물론 가족을 전보다는 자주 만날 수 있긴 하겠지만 서울 생활을 시작도 안 해보고 지레 겁먹어 제주도에 눌러앉고 싶지는 않았다. '원하면 언제든 다시 내려오면 되지 뭐.' 집이 없으니 불안하긴 한데 얽매인 곳이 없으니 자유롭기도 하다.


제주도에서 머물렀던 숙소는 주인아주머니가 2년 전쯤 직접 계획하시고 지으셨다고 한다. 공사 기간 동안 하나하나씩 챙겨서 지은 세 동의 단독주택 중 한 곳에는 본인이 머무시고 나머지 두 동은 사람들에게 내어 준다. 아침저녁으로 안부 묻고 챙겨주시는 주인아주머니가 근처에 있어 왠지 든든했고 낯설지 않았다. 역시 우리는 참 인복이 많은 것 같다.

창문 밖에 펼쳐진 감귤 나무를 배경으로 흔들리는 해먹에 나가 누워있는 시간을 아인이는 제일 좋아했다. 다음에 우리 집의 공간이 충분하다면 해먹은 꼭 사야지. 앞으로도 해먹에 누워 하늘을 보고 여유를 즐길 수 있는 틈 하나쯤은 남겨두어야지 다짐해본다. 일주일이 지났을 때쯤 발견한 산양들에게 틈만 나면 먹이를 주는 것도 하루 일과였다. 주인아주머니는 종종 부침개도 부쳐주시고 주인아저씨가 잡아오셨다며 싱싱한 갈치/ 한치회를 한 접시 가져다 주시곤 했다. 물론 바로 딴 싱싱한 귤도 부럽지 않게 먹을 수 있었다. 떠나기 전날 아쉬워서 어쩌냐며 오징어튀김을 잔뜩 가져다주시기도 했다. 언제 다시 만날 수 있을지 모르는 스쳐가는 인연이지만 아낌없이 베풀어 주신 마음의 제주 할머니 할아버지는 아인이에게 좋은 기억으로 남을 것 같다. 주인 할머니를 주인공이라고 줄여 부르면서 꺄르륵거리던 아인이는 그렇게 제주도 할머니에 대한 따뜻한 기억을 가졌다.

제주 친구들

짧았던 보름 살이, 여행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가는 아침에 잠깐이라도 들리자며 제주 여행 첫날 찾았던 카페를 다시 찾았다. 보름 동안 들렀던 화려한 카페들을 제치고 가장 힘 뺀듯한 첫 카페가 제일 기억에 남는다. 바람이 솔솔 들어오는 열린 창문 앞에서 바다를 바라보며 여유롭게 앉아 책 한 장 두장 넘기는 순간이 가장 제주 살이 다운 시간인 것 같다. 가장 그리워질 순간의 공기이기도 하다.


우연히 알게 된 빵집에서 빵을 사며 아주머니와 잠깐 나누는 대화 중에 "누리는 건 누리는 자의 몫이에요." 하시며 우리의 휴식을 응원해 주셨다. 그렇다. 모든 건 마음먹기에 달렸다. 다시 오지 않을 노마드 시간에 감사하며 한껏 누려야겠다고 어느 길의 빵집에서 되새겨 본다.


서울로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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