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Jisu Jun 11. 2021

조금 쉬었다 가도 괜찮아.

3개월의 휴가와 한국 생활의 시작.

작년 샌프란시스코에서 재택을 시작하고 삼시세끼 해결하며 집안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던 일도 아득히 멀게만 느껴진다. 여전히 미국의 동료들은 회사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고 덕분에(?) 나도 한국에 와서 재택근무를 하며 한국의 삶을 부지런히 즐기고 있는 중이다.


10월

미국에서 한국으로 오면서 2주 격리 와 제주도 보름 살기를 하고 나니 길어 보였던 6주 휴가가 순식간에 지나버렸다. 생각할 틈도 없이 바쁘게 달려오던 나날에 급 브레이크를 걸고 지난 시간을 돌아보려 했던 휴가였다. 나아가 앞으로의 나와 가족의 미래에 대해서도 생각하는 시간을 가지고 싶었다. 그런데 반 정도의 시간과 에너지는 아인이를 돌보는데 쓰고 나머지는 친정과 시댁을 오가며 길지도 짧지도 않을 반년의 한국 생활을 시작하는데 다 써버렸다. 사실은 나의 게으름 때문일 텐데 아이와 새로운 환경을 탓하며 생각을 미뤘다. 아인이가 한국에서 유치원을 시작하면 연말에 사람들을 만나서 자극과 영감을 얻고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기도 하며 고민과 생각을 다듬어야겠다는 비장한 계획을 세우며 회사에 양해를 구하고 휴가를 6주 더 연장하게 되었다.

한국에서 유치원을 시작한 아인.

11월

감사하게도 첫날부터 아인이는 신나게 한국 유치원에 다니기 시작했다. 그 시간을 활용해 한국에서 열심히 활동 중인 조경가 친구들의 오피스를 하나 둘 방문했다. 같이 학교를 다니고 미국에서 일하던 친구들이 어느덧 한국에서 자리를 잡고 자신의 회사를 일구어 가고 있는 모습이 자랑스럽고 부럽기도 했다. 커다란 회사의 체계 안에서 다소 수동적으로 일하는 나와는 다른 차원인 것 같았다. 본인 회사를 차려서 내가 아이를 키우듯 직원들을 꾸려가며 사무실을 확장해 나가고 한국의 일을 하는 건 왠지 더 재미있고 보람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들만의 어려움 또한 존재하겠지만 내가 가고 있지 않은 길에 대한 호기심과 부러움은 늘 존재하는 것 같다. 그 용기와 실천에 박수를 보내며 응원한다. 그리고 고민해본다. 내가 앞으로 가고 싶은 방향은 어디일까.  

줌으로 진행되는 설계 수업 마지막 발표.

오랜만에 교수님께 인사를 드리러 갔다가 학기말이기도 하고 시간이 맞아서 모교의 설계수업 최종 발표에 참석하여 후배들의 작품을 리뷰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내가 처음 설계 수업을 듣던 기억, 밤을 새우며 작업을 하고 발표를 하던 그때의 기억이 머릿속으로 빠르게 지나갔다. 후배들에게 하나라도 더 의미 있는 조언을 해 주고 싶은 마음으로 주어진 값진 4시간 동안 최대한 진심으로 크리틱 했다. 어느덧 내가 후배들에게 조언을 하는 자리에 있다는 사실이 새삼스럽고 한편으로는 조심스럽기도 했다. 마지막 설계 수업마저도 줌으로 진행되었고 실제로 후배들과 대면하지 못한 게 못내 아쉽다. 비대면의 세계에도 제법 적응했지만 직접 만나서 소통하는 것과는 정말 큰 차이가 있다. 떠오르는 다양한 마음과 생각을 모아 후배들에게 그리고 그들의 첫 설계 작품에 더해진 나의 조언들이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잘 전달되었기를 바란다.


12월.

코로나로 조심스러운 시기였지만 친구들, 선생님, 후배들을 만나 좋은 자극을 받고 새로운 기운을 얻기 시작했는데 한국도 상황이 점점 안 좋아지는 바람에 방역이 2.5단계로 격상되었고 아인이는 새로운 유치원에 3주를 채 가지 못하고 다시 온 가족 모두 모여 집안에서 북적이는 2020년의 마지막 달을 보냈다.

유난히 눈이 많이 오던 지난해 겨울, 우리는 꼼짝없이 집에 갇혀 하루 종일 놀아달라고 보채는 아인이를 데리고 삼시 세 끼를 다시 집에서 해결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온 가족들이 돌아가면서 아인이와 놀아주고 대부분의 식사는 부모님께서 준비해주시는 데다가 연말까지 휴가를 연장한 덕분에 걱정할 일도 크게 해야 할 일도 없는 감사할 시간이었지만 아무것도 안 하는 것 또한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일을 안 하고 쉬면 마냥 좋을 것 같았는데 회사의 스케줄에 맞춰 강제적으로 진행되던 삶의 리듬이 깨어지기 시작했다. 늦잠은 물론이거니와 안 보던 넷플릭스까지 밤새도록 보다가 잠들기 일쑤였다. 날씨는 왜 이렇게 추운지 야외활동도 여의치가 않았다. 그동안 읽고 싶었던 책은 잔뜩 사놓았는데 시간이 많으니 더 안 읽히고 부모님께서 아들, 딸, 손녀 매끼 정성스레 먹이겠다고 차려주시는 밥은 열심히 먹고 그에 반해 움직임이 적어지니 몸은 점점 무거워졌다. 기대하던 한국에 왔고 3개월이나 휴가도 연장했는데 아무것도 안 하고 지나가는 것 같아 조급한 마음까지 쌓여 머리까지 천근만근이다.


피곤을 자초해서 쌓았던 12월을 돌이켜보니 회복의 시간이었다. 아무것도 안 해도 괜찮은데 그렇게 쉬었다 가는거라고 마음을 더 가볍게 먹었으면 좋았을 걸, 주어진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것들에 집중하고 그 속에서 기쁨을 찾았으면 그것으로 충분했을 텐데 괜히 불안해하고 불편해했다. 실제로 원주로, 속초로 가족 여행도 다녀왔고 일과 마감에 쫓기지 않고 마음껏 게으름을 부렸다. 우리를 반기듯 유난히 많이 쏟아지던 눈도 원 없이 봤고 오랜만에 온몸으로 느끼는 겨울이 추운지도 모르게 가족들과 함께 크리스마스도 보내고 새해도 맞이하며 그 어느때보다 따뜻한 겨울을 보냈다. 새해부터 굴을 잘못 먹어서 아빠가 아프기 시작하더니 아인이까지 노로바이러스로 병원에 하루 입원을 하는 일이 있었지만 오랜만에 셋만의 공간인 작은 입원실에 옹기종기 누워있으니 이런 게 또 행복이지 싶더라.

새해부터 입원한 아인이. 액땜이라 생각하자.

휴가라는 시간을 기다리며 생각을 미뤄두었던 것과 그 시간 동안 어떤 만족할 만한 답을 나오길 기대했던 것은 애초에 욕심이었지 싶다. 평생을 두고 고민하고 찾아나가야 할 것이 나의 내일이 아닐까. 2021년 1월 4일 월요일, 다시 일에 복귀했다. 인정하기 싫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몸과 마음이 바빠지니 원래의 리듬이 돌아오는 것 같다.


그래서 올해 목표는 이것으로 정했다.


나만의 루틴을 만들고 익숙해지기. 생각을 게을리 하지 말고 나를 갈고 닦자.


그리고 혹시 나처럼 이런 행복한 시간을 보내며 괴로워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꼭 귀뜸해주고 싶다.

잠깐 쉬어가도 정말 괜찮다고.


        

매거진의 이전글 2주 격리 괜찮아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