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셋 격리 이야기
Day 1, 2020.10.2.
공항에서 대형 택시를 타고 2주 동안 머물 숙소 앞에 도착했다. 우리가 구한 에어비앤비는 건축가 두 분이 본인의 집을 함께 디자인해서 지은 듀플렉스 빌딩이다. 빌딩의 1, 2층은 음식점이고 3층부터 두 세대가 좁고 길게 같이 올라가는데 우리가 머물 집은 302호로 3층은 거실, 4층은 부엌, 화장실, 침실, 5층은 침실 2개와 욕실, 6층은 옥상 이렇게 총 네 층의 공간이 내부 계단으로 연결되어 있다. 잔뜩 이고 지고 온 짐을 3층 현관에 들여놓고 계단을 오르락내리락 거리며 2주 동안 필요한 짐들을 적절한 곳에 배치시켰다. 아직 반나절도 채 지나지 않았는데 계단을 얼마나 오르락내리락했는지 모르겠다. 하루 전날 와서 냉장고 가득가득 식재료들을 준비해주고 간 가족의 마음에 벌써 마음이 따뜻하다. 집에 왔구나.
집을 살펴보니 곳곳에 세심한 건축가의 손길과 생각이 느껴진다. 2주 머물면서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볼 수 있을 것 같아 설레기도 하다.
현관으로 들어오면 넓지 않음에도 넉넉하게 느껴지는 거실 공간과 만난다. 거실 천장의 일부가 4층까지 트여 있고 창문도 두층에 걸쳐 기다랗게 나 있어 더 넓게 느껴진다. 옆 건물 카페 옥상 공간이 창문에서 바로 보여서 조금 당황스럽긴 하지만 이렇게 사람 구경이라도 할 수 있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은 어떨지 상상이 안 되는 2주 격리 한번 시작해 보자!
아침 7시부터 떡볶이와 튀김에 커피를 시켜먹었다. 역시 배달의 강국답게 몇 분이 채 지나지 않아 따끈따끈한 음식과 친절한 메모가 함께 도착했다. 포장도 이렇게나 정성스러울 일인가. 예쁘고 맛도 좋은 첫끼를 즐겁게 먹었다.
아인이가 설사를 한다. 걱정이 되지만 일단 저녁을 먹고 다 같이 6시 반쯤 취침에 들어갔다. 아인이도 먼 비행 하느라 얼마나 피곤했을까. 내일은 컨디션이 나아지길 바라본다. 그래도 새 집에 금방 적응해 주고 잘 따라다녀주니 고마울 따름이다. 미국에서 떠나는 마지막 날까지 다녀온 학교의 친구들과 선생님이 보고 싶다고 이야기하더니 그대로 잠이 들었다.
전날 일찍 잠들기도 했고 시차로 일찍 시작한 하루다. 아인이는 새벽 3시 반에 일어나 두 시간 정도 놀다가 다시 같이 잠들었다. 그리고 평소처럼 7시 반부터 하루를 시작했다. 심심할 틈도 없이 엄마, 아빠, 시부모님께서 약속이라도 한 듯 같은 시간에 구호물자를 더해주러 오셨다. 아인이가 특별 주문한 복숭아부터 홍시, 감, 밤, 한우, 커피, 각종 반찬 등등 도착 전부터 채워져 있던 냉장고와 팬트리는 먹을수록 자꾸 채워지는 마법을 부린다. 가족이 뭐라고 이렇게 바리바리 챙겨 오셔서 끊임없이 넣어주시는지. 부모님의 정성과 사랑에 다시 한번 더 감사하게 된다. 카페가 바라보이는 창문에서 할머니 할아버지와 인사했다. 아인이는 이런 상황이 이상할 텐데 몇 번 설명해준 대로 나름 이해하는 것 같다. 아직은 집에 있어야 하고 며칠 있다가 직접 만날 수 있다고 할머니, 할아버지께 열심히 설명한다. 그러다가도 '아인이도 저기 풀밭(카페)에서 진짜 할머니 할아버지를 만나면 얼마나 좋을까' 한다.
사촌 언니의 장난감을 몇 개 빌린 덕분에 아인이는 새 장난감을 가지고 노느라 정신이 없다. 아인이가 노는 모습을 지켜보고 음식을 준비할 수 있는 오픈형 주방이 마음에 쏙 든다. 부모님이 가져다 주신 음식들과 반찬을 차려 든든한 저녁을 먹었다. 이미 냉장고는 미국의 냉장고보다 더 먹을게 많이 채워진 것 같다. 밖에서 시켜먹고 싶어도 먹을게 너무 많아 마음껏 못 시켜 먹을 것 같다. 이런 행복한 고민이라니. 아무것도 안 먹어도 배부르다.
3일 이내에 보건소에서 코로나 검사를 받아야 하기에 오늘은 격리기간 중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외출이 허락된 날이다. 보건소에 전화해서 확인한 후, 숙소를 나섰다. 연남동의 아기자기한 카페, 꽃집, 공방 등을 지나 경의선 숲길을 만난다. 한국의 선선한 가을 날씨를 느끼며 홍제천 고가 아래로 흐르는 물길을 따라 걸어가니 40분이 걸린다던 마포 보건소에 금세 도착했다. 선별 진료소에 도착하자마자 외부에서 체온을 재고 정보를 작성했다. 순서가 되어 실내로 들어가서 안내를 받고 다음 방에서 대기하니 바로 검사를 해준다. 아빠가 먼저, 그리고 나, 그리고 내 무릎에 앉은 아인이 순서다. 면봉을 들이대기만 해도 우는 아이들이 많은데 아인이는 씩씩하게 잘 기다리고 있다며 칭찬을 해주셨다. 눈물을 꾹 참으며 코와 잎으로 들어오는 면봉을 참아낸다. 나도 어떤 느낌인지 알기에 검사실에서 나와 꾹 참았던 눈물 한 방울을 흘리는 아인이가 참 대견하게 느껴졌다. 아이는 정말 매일 큰다.
오후에는 아인이가 제일 좋아하는 코리아 이모(나의 여동생 지은이)가 카페에 와서 아인이와 창문을 사이로 이야기한다. 애틋하고도 슬픈 광경이다. 이모와 같이 온 친구가 임신 중이라는 이야기를 듣더니 이모 친구를 그리고 아기를 배에 그려 넣었다. 아인이의 귀여운 사람 시리즈들이 너무 좋다. 더 정제된 그림이 되기 전에 많이 보고 간직해 두어야지. 오늘은 아인한테 화를 버럭 냈다. 밥도 스스로 잘 안 먹고 밥 먹다가 눕고 하다가 혼났다. 남편도 첫날부터 저기압이고 어느 장단에 기분을 맞춰야 할지 모르겠다. 피곤하고 기분이 안 나서 일찍 누웠다. 오늘도 시차 적응 실패. 아인이는 다리에 아토피가 많이 올라왔다. 피곤하고 물이 바뀌어서 그런가. 너무 긁어서 연고를 발라주었다. 아직 밤 11시 20분.....
오늘도 네시 기상. 어제 동생이 사다 주고 간 스콘과 커피를 먹고 브런치 글을 발행했다. 아침 8시쯤 코로나 음성 결과가 왔다. 괜히 좀 걱정했는데 모두 무사하다니 다행이다.
점심 경 남동생이 왔다. 하필 카페는 휴무날이라서(좀 알아보고 와) 엘리베이터로 아인이 비타민 젤리만 슥 올려주고 갔다. 내일 또 온단다. 비록 누나를 보러 오는 건 아니지만 하루가 멀다 하고 번갈아 조카를 만나러 와주는 착한 동생들이 있어서 고맙다.
그나마 미국은 일요일이라 미팅은 없지만 오랜만에 일을 하려니 피곤한가 보다. 층이 나누어져 있는 집이라 위층(5층)에서 일을 하면 딱히 방해할 일이 없다. 집을 찾을 때 고려했던 점 중에 하나인데 지내는 내내 실제로 큰 도움이 되었다. 저녁은 남편이 좋아하는 치킨을 시켜먹었다. 프라다를 패러디해서 고급스럽게 브랜딩 한 푸라닭이라는 치킨인데 맛있다고 감탄 감탄을 하며 치맥의 밤을 즐겼다.
아침 네시, 아인이는 다섯 시에 일어났다. 어제 일곱 시부터 잤으니 많이 잤다. 아는 동생이 배송해준 아인이 장난감을 한참이나 가지고 놀다가 점심을 먹기 전에 거품 목욕을 했다. 하늘이 보이는 욕조에 앉아 목욕을 하니 괜히 기분이 좋다. 무리해서 좋은 숙소를 잡은 건 정말 잘한 일인 것 같다. 건축에 워낙 관심이 많아 이런 집을 찾게 되었는데 남편에게 감사할 부분이다. 맘에만 담고 있지 말고 고마움을 표현해야지. (보고 있나) 고마워!
"철학하는 엄마"라는 진민 님의 책을 배송받았다. 서문만 읽었는데 벌써 너무 좋아서 빨리 후루룩 읽고 싶다. 틈틈이 읽으려는데 아인이가 탐을 낸다. 아인이는 그림 책 읽으라고 설득하다가 옛다. 100페이지까지 읽은 거 기억하고는 넘겼다. 영어로 뭐라고 뭐라고 하며 열심히 읽는다. 좋은 책은 알아가지고. 낮잠을 잘 것도 같아서 가만히 내버려두었다가 엄마가 읽어줄게 하며 소리를 내서 읽어주기 시작했는데 금방 잠이 든다. 만세. 낮잠을 잤으니 오늘은 조금 더 늦게 잠들 테고 그러면 아인이 시차 적응은 완료인 것 같다.
아인이가 자는 틈을 타 책을 좀 더 읽다가 정신을 차리고 일어나서 가장 관심이 있었던 유치원 두 곳에 상담 전화를 했다. 한 곳은 웨이팅을 넣어두고 다른 한 곳은 격리 후에 바로 방문 상담을 하기로 약속을 잡았다. 아인이는 두 시간이 넘게 푹 자고 일어났다. 마침 남동생이 커피를 배달해주고 카페 옥상에서 창문을 사이로 한참 동안 아인이와 말동무가 되어주었다. 가기 전에 빵도 사서 넣어주고 간다. 할아버지, 할머니와 전화도 하고 같은 시기에 격리 중인 지호랑 전화도 하고 오늘은 미국에서 원래 자던 시간에 맞추어 잠이 들었다. 시차 적응 완료.
오늘도 아침 햇살이 좋다. 사방으로 해가 잘 드는 집에서 따뜻한 온기 받으며 여유롭고 느리게 잘 지내고 있다. 아침에 해 뜨는 거 보고 누워서 책 보다가 낮잠도 자고 맛있는 거 먹고 다시 해 지는 걸 보는 단순하고도 평화로운 하루하루를 보낸다. 바깥공기가 그리울 때면 옥상으로 오른다. 언제 다시 이렇게 게으른 2주의 시간을 보낼 수 있을까. 강제로 격리하며 휴식하는 시간에 감사하다.
격리를 위로하고 걱정해주는 주위 분들이 많았는데 2주라는 시간은 생각보다 빨리 지나가고 나가는 날이 다가오자 오히려 아쉽기도 했다. 온전히 나와 우리에 집중하고 있던 시간, 미국에서 지난 반년 간의 삶의 연장선상이기도 해서 낯설지 않은 경험이 었지만 가까이에 가족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든든해지고 편안한 시간이었다. 코로나로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덕분에 이렇게 떠나와서 쉬어가는 시간을 가질 수 있음에 감사하며. 자가 격리 2주 괜찮아요.
그래도 기쁜 격리 해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