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루클린 파크 슬로프
도시 조경 분야에서 일하면서 '15분 도시'에 대해 이론적으로 많이 접하기도 했고 관련 이론을 실제 프로젝트에 적용해 보기도 했다. 하지만 역시 경험이 제일이라 했던가. 샌프란시스코의 외곽에서 차를 두 대 가지고 살던 일상에서 차가 없이 뚜벅이가 된 오늘, 뉴욕의 일상 속에서 15분 도시를 가장 실감하고 있다.
우리가 현재 살고 있는 곳은 브루클린에 있는 파크 슬로프라고 불리는 동네이다. 서울을 뉴욕의 맨해튼이라고 가정했을 때, 분당 정도라고 설명해야 할까. 그렇다고 분당 같은 신도시는 아니고 오래된 역사를 가득 품고 있는 동네이다. 100살은 기본으로 먹은 브라운 스톤 빌딩들과 울창하게 자란 가로수가 조화롭게 어우러져 있다. 지하철로 30분 정도면 맨해튼의 도심에 도달할 수 있는 위치이고 격자로 구성된 도시의 한 블록을 지날 때마다 유모차를 끄는 어른들을 비롯해 아이들 몇 명은 쉽게 마주 칠 수 있는 곳이니 아이들을 키우기에 좋은 곳에도 틀림은 없는 것 같다. 동네의 원두 포장지의 브랜딩도 유모차 아이콘으로 만들어져 있을 정도이니 말이다.
남편이 먼저 뉴욕에 도착해서 브루클린의 파크 슬로프에 집을 구했다. 몇 달 후 도착한 나는 어느 정도 이곳의 도시생활(?)에 적응한 남편과는 달리 너무 막막한 기분이 든 게 사실이었다. 차도 없이 장은 어떻게 봐야 하나. 걸어서 15분 정도의 거리에 있는 유치원에 매일 아이를 어떻게 데려다주고 데려오지? 다시 유모차를 사서 네 살이 훌쩍 넘은 아이를 유모차에 실어 날라야 하나? (여기서는 실제로 다들 그렇게 하고 있다). 3층에 있는 집까지 오르락내리락 거리는 것마저 힘겹게만 느껴졌다.
아인이도 처음에는 집에서 10분 정도 거리에 떨어져 있는 공원에 가는 것조차 힘들어했지만 이제는 만보 이상은 기본이다.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라더니 정말 금방 익숙해지는 중이다. 집 주변에는 음식점뿐 아니라 작은 식료품점부터 중, 대규모의 마트까지 합쳐 대여섯 개의 선택지가 있어 필요에 따라 다양하게 이용하고 있다. 정육점이나 생선을 파는 가게, 그리고 문구점이나 크고 작은 옷가게, 잡화점, 식물 가게 등 없는 거 빼고 다 있다. 여전히 아마존과 배달도 많이 이용하고 있긴 하지만 동네에서 로컬 샵을 이용하는 것을 적극 장려하고 있다고 하니 우리도 동네 상점에서 뭐라도 하나 더 사곤 한다. 우리는 정말 '15분 도시'에 살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유치원도 걸어서 15분 거리. 아인이를 데려다주고 집에 돌아오면 1마일은 거뜬하다. 처음에는 아주 멀지도 그렇다고 가깝지도 않은 거리를 매일 하루에 두 번씩 다닐 생각에 걱정이 가득했지만 몇 달 동안 쌓인 근육들로 우리도 아인이도 힘차게 잘 걸어 나간다. 킥보드가 아인이의 고마운 주요 이동수단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아침마다 아인이를 데려다주러 산책 겸 셋이 함께 걷는 거리는 우리와 비슷한 가족들로 분주하다. 아이들의 밝은 기운이 아침 햇살과 어우러져 즐거운 에너지를 선사한다. 아이들을 내려주고 빈 유모차와 킥보드를 밀고 걷는 부모들을 보며 동지애를 느낀다. 덕분에 우리는 아침, 저녁으로 반 강제적으로 걷기 운동을 한다.
집 바로 뒤에는 초등학교와 놀이터가 있다. 그리고 10분 정도 걸어가면 동네의 만남의 광장 같은 공원에 꽤 큰 규모의 놀이터가 할당되어 있다. 주말이면 놀이동산에 온 것처럼 복작복작한 놀이터에서 아인이는 학교 친구들을 만나 같이 놀기도 하고 모르는 친구와 어느새 친구가 되어 뛰어다니기도 한다. 풍선이 휘날리는 피크닉 테이블에서는 아이들의 생일파티가 한창인데 최근에 같은 반 친구의 생일 파티가 열리기도 했다.
도시 곳곳에는 작은 틈들이 많다. 커뮤니티 정원이나 텃밭들이 도시 곳곳에 숨어있는데 일정 부분을 직접 배정받아 식용 작물을 키울 수도 있지만 딱히 배정받은 나만의 텃밭이 없더라도 둘러보는 재미 또한 쏠쏠하다. 과실나무의 열매들은 때가 되면 자유롭게 수확할 수 있다고 한다. 한 텃밭에는 닭장이 있다. 수탉은 새벽에 울어대기 때문에 시에서 키우는 것을 금지하고 있다고 하여 암탉들만 모여있는 곳인데 덕분에 아인이에게는 8마리의 암탉 친구가 생겼다. 유치원에서 돌아오는 길에 종종 들러 시간을 보내는 성당에 딸린 조그마한 정원은 늘 개방되어 있는데 명상과 힐링을 위한 공간이라고 쓰여있다. 비록 아인이는 친구와 함께 잔디에서 신발을 벗어던지고 나무 하나를 뱅뱅 돌기도 하고 사과나무에서 사과를 하나 따서 맛을 보기도 하지만 주변의 이웃이 귀엽게 봐주니 다행이다. 정원이 없는 집에서 살고 있지만 모두에게 열려있는 이런 정원이 도시 곳곳에 있어서 좋다.
뭐니 뭐니 해도 이 동네의 하이라이트는 프로스펙트 파크인데 큰 공원의 대명사인 맨해튼의 센트럴 파크와 비슷한 규모의 공원이 근처에 자리 잡고 있다. 주로 공원을 산책하고 날씨가 좋을 때면 피크닉을 하기도 한다. 박물관, 동물원, 식물원, 물놀이터, 자연놀이터, 겨울이면 스케이트장까지 다양한 프로그램들이 있는 공원이 손 닿는 거리에 있어 왠지 모를 든든한 기분이 든다.
조금 먼 곳을 가야 할 때는 시티 바이크, 자전거를 이용한다. 주말이면 지하철이나 우버를 이용해 맨해튼으로 놀러 간다. 어느 주말에는 셰어 카를 이용해 근교로 놀러 갈 수도 있으니 아직까지는 우리 소유의 차 없이 잘 지내고 있는 중이다. 물론 차가 없어서 불편한 점도 있지만 걸어서 경험할 수 있는 것들이 많으니 그런 삶에 더욱 집중하고 있는 중이다.
봄의 시작에 이곳에 도착했고 어느덧 겨울에 접어들었다. 거리의 나무들은 예쁜 가을 옷을 벗고 앙상하지만 멋진 가지들을 자랑한다. 오랜만에 온몸으로 느끼는 겨울바람이 아직 적응 중인 동네처럼 낯설기도 하지만 왠지 모르게 설레기도 하다. 한겨울로 접어들면 펑펑 내릴 함박눈과 새하얗게 덮일 동네를 기대하며 오늘도 우리는 도시 곳곳을 열심히 걷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