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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uwon Sep 30. 2023

퇴사하고픈 욕망의 긍정적인 힘에 대하여

모든 성과가 굳건한 의지와 완벽한 계획에서 비롯되는건 아니니까요.

많은 분들은 제가 샌프란시스코에서 테크업계에 종사했다고 하면 ‘아 그래요' 하고 당연하다는 듯이 반응합니다. ‘아 쟤는 테크업계에서 일하려고 실리콘밸리로 이주했구나.’라고 짐작하시는거같아요. 그런데 사실은요. 저에게는 하나도 당연한 일이 아니었어요. 샌프란시스코에 이주한 것, 테크업계에 몸을 담은 것 모두요. 


샌프란시스코로 이주할 때 저의 머리속에는 테크의 ‘테'자도 없었어요. 한국에서 마케팅을 공부하고 브랜딩업에 몸을 담았던 아주 문과다운 문과생이었거든요. 지금은 드라마에서 주인공이 스타트업에서 일하는 설정도 흔하고 누구나 주변에 한 명씩 ‘앱 만드는 친구'가 있다지만 제가 이곳에 왔을 때 10년 전만 해도 테크분야는 그렇게 친밀하게 느껴지진 않았어요 (샌프란시스코 태생인 에어비엔비나 우버 같은 기업들도 전세계로 뻗나가기 전인 시절이었으니까요.) 이곳에 와서도 브랜딩을 해야지 싶었지만 부족한 영어실력으로도 브랜드 마케팅을 잘 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뿐이었어요.  


샌프란시스코에서의 처음 몇달, 몇년은 그저 막막함 뿐이었다. 막막함도 자연스러운 인생의 일부라는걸 그 땐 몰랐다.


지난 글 ‘어떻게 UX 리서처로 전향하게 되었나요?’ <1> 한국의 마케팅 전공생이 미국의 UX 리서처로 변신한 과정에 제가 UX를 택하고 테크업계에 종사하게 된 이유를 상세하게 설명하긴 했는데요. 이 글을 통해 더 솔직하고 간단하게 말씀드리자면 제가 UX를 택한건 UX에 대한 엄청난 포부 혹은 테크업계를 향한 열망 때문이었다기 보다는 당시에 몸 담고 있던 마케팅으로부터 도망칠 궁리를 하다가 얼떨결에 또다른 선택지를 받았기 때문이었어요. 


제가 이 시절을 갑자기 문득 떠올려보는 건 오늘 오후 산책 중에 들은 팟캐스트 인터뷰 때문이에요. 애플의 전설적인 마케터이자 벤처 캐피탈리스트 가이 가와사키가 이런 말을 하더군요. 


“제가 대학에서 심리학을 전공하고나서 마케터가 된 걸 보고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하더라구요. 아, 마케팅을 하고 싶으셔서 소비자들의 심리를 이해하기 위해 심리학을 전공하신거로군요? 아니에요! 저는 이과생이었고, 생명공학이나 화학 같은건 너무 머리아프니까 그나마 가장 쉬워보이는 심리학을 골랐을 뿐이에요. 애플에 들어간건 대학교때 인맥 덕분이었고, 제가 제품을 만들줄 아는 사람(엔지니어)이 아니니까 파는 사람(마케터)가 되자 해서 마케터가 된 거구요!”


데비 밀만의 팟캐스트 디자인매터스. 크리에이터들의 인터뷰로 가득합니다.


그러고보니 어제밤에 잠들기 전에 읽었던 가수 장기하의 에세이 집 <상관없는 거 아닌가?>에서 장기하도 대중음악 가수가 되기까지의 여정에 대해서도 비슷한 식으로 묘사하고 있었어요. 취직은 절대로 하고 싶지 않아서 학교 수업도 건성으로 들은채 밴드 동아리 활동에만 전념했고, 군악대에 들지 못하고 아쉬운 마음으로 군시절 만들었던 음악이 <싸구려 커피>였다고요.  


“내 삶에서 내가 온전히 통제할 수 있는 것이 과연 얼마나 될까. 지나간 일을 하나의 스토리로 끼워 맞추는 것은 어렵지 않다. 나는 음악을 하고 싶어서 했고, 열심히 했기 때문에 성과를 얻었다, 하는 식의로 엮으면 내 삶은 노력과 결실의 과정으로 기록되는 것이다. 하지만 <싸구려 커피>라는 노래를 만든 것 하나에 대해서만 생각해도, ‘내가 그 노래를 만들고 싶어서 만들었다'는 식으로 단순하게 정리할 수 있는 사건이 아니다.


장기하의 진중하면서도 유연한 삶의 태도가 잘 드러나는 에세이집. 자기전 생각을 비울 때 읽기 좋다.


저는 어릴 적부터 위인전 읽는걸 참 좋아했어요. 평범한 한 아이가 자라나 능력을 발휘하고, 고난을 만나지만 기지를 발휘해서 성공하고 인류 사회 발전에 기여하여 후대에게까지 존경을 받다는 이야기. 완벽한 영웅서사 구조 속에서 미래에 대한 어렴풋한 불안을 이겨내곤 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사실 영웅서사 구조는 위인전이나 히어로영화 뿐 아니라 신문 속 유명인사의 성공비결을 묻는 인터뷰에서도 되풀이 되고 있지 않던가요? 


장기하가 꼬집었듯 ‘무언가를 사랑했고, 열심히 해서 성과를 얻었다’라는 성공서사의 흐름을 따르고 있자면 ‘내가 지금 이걸 덜 사랑하기 때문에 성공을 못했나? 내가 덜 열심히 해서 성과가 없었나?’라고 자문할 수 밖에 없죠. 그들의 반짝이는 눈과 불끈 쥔 주먹이 모든 결정을 다음의 도약으로 만들어내는 매끄러운 결과물을 만들어낸 거라고 믿게 만드니까요. 


물론 개인의 발전과 자신감을 위해서라도 저마다 멋진 인생서사를 하나씩 갖고 있는건 중요해요. 그런데 그런 서사는 순간순간의 대단한 결정과 지치지 않는 의지와 상승곡선만 타는 인생에서 만들어지지는 않는 것 같아요. 직접 경험하거나 타인으로부터 목격한 좋은 결과들, 좋은 변화들, 좋은 기회들은 많은 경우 오래된 속담처럼 소 뒷걸음질 치다 쥐 잡듯 아주 우연하게 만들어지더라고요. 말 그대로 ‘뒷걸음질'치는 기분이 들 만큼 삶에서 후퇴하는 것만 같은 순간마저도요. 멋진 인생서사를 품은 사람들은 그 사람들이 어떤 특별한 결정을 하거나 어떤 특별한 특성을 지녀서가 아니라 주어진 상황에서 기회를 잘 잡아내서 그걸 서사로 만들 수 있는 재료를 얻었기 때문일 뿐이에요. 


그러니 우리, 잠깐 눈치도 봐보고, 뻘짓도 해보고, 여기갈까 저기갈까 망설여보고, 퇴직서도 가슴에 품어보고, 도망도 가보고, 도망갔다가 돌아도 와보고 다 해보자구요. 혹시 알아요? 도망갈 궁리를 하다가 우연히 맞딱들인 그 길이 진짜 내 길인지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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