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선 시리즈 2 ] 곁에서 본 마음의 풍경
그는 퇴근 후,
피아노 앞에 있는 시간을 가장 좋아했다.
소리로 말을 걸고,
마음으로 대답하는 순간들.
발달장애인 청년, k 씨와의 만남은,
내 일상에 새로운 리듬을 더해주었다.
K 씨는 복지관 강당에 와서
자주 피아노를 친다.
사무실로 전화벨이 울린다.
“도담님, 저 강당이요. 피아노 쳐요. 같이요.”
짧게는 5분,
길게는 15분 동안 함께 피아노를 친다.
우리가 연주하는 곡은 단 하나,
‘젓가락 행진곡‘이다.
“다시 시작이요.”
연주가 끝나면 K 씨는 늘 같은 말을 한다.
그 말과 함께 같은 곡이 다시 반복된다.
아주 가끔, 내 반주에 본인이
노래를 부르겠다는 제안도 한다.
청소년 시절,
자물쇠가 달린 교환 일기를
서로 공유하듯, 피아노를 통해
K 씨와 나만 알고 있는
비밀스러운 추억이 생겼다.
그렇게 우리 둘만의 시간이
조금씩 쌓여갔다.
주중에 적으면 한 번,
많으면 다섯 번까지.
K 씨와 피아노를 친 지
2년쯤 되어갈 무렵,
여전히 비슷한 시간대에,
피아노 친구를 애타게 찾는
사무실 전화벨이 내 자리에서 울렸다.
“도담님, 커피 사줄게요. 고마워서요.
저랑 피아노 쳐주는 거요.”
마음만 받겠다고 여러 번 사양했지만,
나에게 커피 사주는 일은
그날 그 청년에게는
꼭 수행하고 돌아가야 하는
단호한 미션처럼 들렸다.
우리는 카페로 향했다.
K 씨가 자주 가는
아이스 카페모카 맛집이라고 했다.
“도담님, 어떤 거 먹을래요. 제가 다 사드립니다.
월급 받았거든요.”
안 그래도 평소 K 씨의 큰 목소리가
그 카페에서 유독 더 크게 들리는 것만 같았다.
점원과 조용히 미소를 나누며 대답했다.
“K 씨, 저는 아이스 바닐라 라떼 먹을게요.”
그는 당당한 어투로 음료를 주문했다.
그리고 맛있게 먹으라며,
내 음료에 빨대를 꽂아주었다.
우리는 커피를 마시며 1시간쯤 이야기를 나눴다.
피아노, 여행, 음식, 취미, 가족 이야기까지.
주변 지인들과 다를 바 없는 대화였지만
그 순간이 오히려 더 새로웠다.
그러고 보면,
k 씨는 나에게 궁금한 게 참 많았다.
“도담님은 동생 있어요?”
“제일 좋아하는 음식은요?”
“남동생은 어디 살아요?”
“집은 자주 내려가세요?”
“피아노는 언제까지 쳤어요? “
짧은 시간 안에 쏟아지는 많은 질문들.
잠깐은 나의 답변만이 존재하는 면접인가 싶었지만,
그만큼 k 씨가 나를 잘 알고 싶어 한다는 신호였다.
그 마음이 참 귀엽고 따뜻했다.
누가 나라는 사람을 이렇게 궁금해 할 수 있을까.
K 씨와 헤어지고 혼자 사무실로 복귀하는 길.
속으로 생각했다.
‘참, 특별한 아이스 바닐라 라떼야.’
커피 맛보다는 그 마음이 더 오래 남았다.
왜 그랬을까.
K 씨가 나에게 아이스 바닐라 라떼를
사주기 위해서는 상상 이상으로
많은 조건이 필요했기 때문했기 때문이다.
스스로 선택한 삶을 향해 나아가는 용기
타인을 이해하고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사회성
돈을 벌 수 있는 직업
함께하는 지역 사람들
사실, 그 밖에도 너무나 많다.
그래서 그날 마신 아이스 바닐라 라떼는
내게는 단순한 커피 한 잔이 아니라,
훈련과 삶의 결과물로 다가왔다.
평소 보이지 않는다고 없는 게 아니고,
겉으로 멀쩡하다 해서 괜찮은 것이 아님을,
어느 순간 깨달았다.
우리 주변엔 이렇게 들여다보기 전까진
결코 보이지 않는 것들이 있다.
그것은 무언가에 가려져 있거나 혹은 숨어 있어
가까이 다가가 애써 들여다봐야만 비로소 모습을 드러낸다.
내가 처음 들여다보기 시작한 마음이 그러하고, 타인과의 관계가 그러하다.
- 2023년 제주청년작가 : 박진형 작가노트 중
마음의 결은,
때로는 빛보다도 더 천천히 드러나는 것 같다.
이 문장을 보며, K 씨와 내가 만났던
발달장애인 당사자들이 떠올랐다.
어느 누구보다
이들에게 가장 필요한 문장일지 모른다.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들여다보는 마음이
중요하다고 느꼈다.
내가 만나는 발달장애인들은,
짧게는 한 달, 길게는 몇 년에 한 번,
본인만의 아이스 바닐라 라떼를 내게 선물한다.
그 선물은 시간도, 속도도 다르지만,
누군가에겐 작은 변화의 시작이 된다.
주변의 많은 발달장애인들이
본인만의 아이스 바닐라 라떼를
더 많은 세상과 따뜻하게
주고받았으면 좋겠다.
[ 작은 메모 ]
이 글을 올리는 지금,
나는 예전만큼
피아노 친구 역할을 영 못해내고 있다.
그런데도 k 씨는 말한다,
“괜찮아요. 도담님, 이런 제가 최고죠?“
그 말이, 너무 고맙다.
나는 k 씨가 피아노를 칠 때,
늘 본인 건반만 보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는,
건반 위 내 표정을 슬쩍 살핀다는 걸
최근에야 알게 되었다.
이럴 땐, 나도 참 서툰 사람이구나 싶다.
앞으로는 건반만 두드리는 게 아니라,
표정까지 잘 읽는 피아노 친구가 되어야겠다.
이 글을 통해,
피아노 친구 k 씨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