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평은 특권이 아니다. 비평은 누군가 자신이 삼킨 텍스트를 다소간 자신만의 각도에서 비춰낸 결과물일 따름이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 다만 그 텍스트를 누가 더 면밀히 들여다봤느냐 하는 끈기와 성실의 차이만이 있을 뿐. 그럼에도 비평을 특권처럼 느끼고 불만스러워 하는 누군가가 있다면 나는 그에게 직접 당신만의 해석을 가져보는 게 어떻겠냐 말해주고 싶어진다. 그는 노력으로 뭔가를 빚어내본 경험이 없는 사람일 것이 분명하다.
모르긴 몰라도 신형철은 대단히 노력하는 문학평론가 일테다. 다 읽진 못했지만 그의 평론집 <몰락의 에티카>에서 내가 발견한 그의 모습은 흡사 수많은 텍스트를 몸으로 소화해낸 대식가였다. 또한 그 누적들을 한 번에 한 문장씩 정확히 쏘아내는 저격수 같아 보였다. 특히 김승옥의 <무진기행>을 정신분석학 이론을 토대로 기존과는 다르게 해석해내는 대목과 미래파 시인들의 난해한 시를 읽어내는 대목에서 나는 내용에 대한 평가보다도 끊임없이 텍스트의 심장을 향해 나아가려는 그의 구도자적인 태도에 감탄했던 것 같다.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은 2018년 9월에 나온 그의 에세이집이다. 문학평론가로서 그가 지면에 써온 짧은 글들을 한 권의 책으로 묶어냈다. 내가 이전에 읽었던 평론집의 글과는 애초에 다른 호흡의 책인 셈이다. 그리고 이 책을 읽으며 새삼스레 확신했다. 그의 진정한 매력이 드러나려면 충분한 지면이 필요하다고. 이 책은 주제에 따라 슬픔, 소설, 사회, 시, 문화 총 5부로 나뉘어 있고 대부분의 글이 너댓 쪽 내외의 분량이다. 하나의 텍스트를 면밀하고도 날카롭게 읽어내는 그의 눈을 기대했으나 적지 않은 글들이 지면의 한계로 단상으로 마무리 되는 게 퍽 아쉬웠다. 또한 5부의 구성 중 사회 파트의 글들에는 사회적 사건들에 대한 그의 견해가 담겨 있는데 아무래도 문학 텍스트에 기반한 분석이 아닌 만큼 다른 글들에 비해 조급하거나 정념이 도드라져 보였다.
거꾸로 말하면 텍스트를 끝까지 붙들고 있는 느낌을 주는 글들은 좋았다는 뜻이다. 이준익 감독의 <동주>에 관해 쓴 '액자 속의 진정성'(98p)은 영화의 요소와 장치들을 차근차근 끄집어 내며 출발한다. 곧 어렵지 않게 이 영화의 아름다움과 윤동주의 부끄러움에 대한 해석에 도달한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이 글의 마지막 대목은 이렇게 끝나 있다. "그러고 보면 윤동주 시집을 1948년 초판본 그대로 복원한, 그래서 읽기에도 어려운 그 책이 베스트셀러가 된 기이한 현상도 실은 이해할 만한 것인지도 모른다. 유적지를 관광하고 돌아올 때 우리 손에는 언제나 기념품이 들려 있기 마련이니까." 뼈가 시리도록 아프게 다가오는 문장이다.
나는 이 책에서 문학 평론가로서의 신형철이 작품에 어떻게 접근하는지 엿보는 데서 주된 즐거움을 찾고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에세이집에서 그런걸 기대하다니. 조금 부당한 혐의를 씌운 것 같아 마음이 심란해 왜 이런 기분을 느끼는지 굳이 이유를 찾아본다. 말이 저절로 말을 낳는 상황에 요즘 들어 부쩍 불편함을 느끼고 있다. 손바닥 위의 알람이 보채는 만큼 말의 리듬도 빠르게 쪼개지면 생각의 설계도 또한 초라해진다. 어딜 가도 아파트, 또 아파트. 질식할 것 같은 복제의 쓰나미 속에서 취향과 주관이 살아 있는 글을 보고 싶은 욕심은 어쩌면 당연한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