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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생못미 Jan 14. 2019

김훈 - 흑산

<흑산>은 역사 소설이다. 역사 소설이라 함은 역사를 기술하는데 있어 채택된 그 방식이 소설이라는 뜻이다. 대체역사를 다루지 않는다면 이야기는 대개 정해진 길을 따라간다. 길 밖으로 나갈 수는 없다. 길에서 벗어나지 않기 위해 작가에게는 엄밀한 사료 해석과 재현하고자 하는 시대에 대한 충분한 이해가 요구된다. 어차피 존재했던 과거에 대한 재현이 중요한 것이라면 역사 소설에 대해 이야기 할 때는 소설가가 역사의 어느 지점을 선별해 어떻게 따라 걸었는지에 초점이 맞춰져야 한다. 역사를 비추는 작가는 어떤 시각을 가지고 어떤 구도를 연출했는가. 독자를 역사 순례에 참여시켜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었는가를 물어야 한다. 


섣불리 평가하지 않기로 한다. 아직 역사소설이라는 장르나 김훈이라는 작가에 대해 이런 저런 말을 늘어놓기에는 준거 삼을 만한 지식이 부족하다. 일단 느낀 점에 대해 늘어놓는 것으로 시작해보자.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김훈의 건조한 문체다. 인물과 사건에 대해 서술하는 어조에서 버석버석한 질감이 느껴질 정도다. 조선 후기 천주교인들을 대상으로 자행되었던 신유박해를 배경 삼고 있다. 생의 고통을 통과하는 생명들에 대해 다양한 각도로 이야기 한다. 등장인물들은 다양한 각도에서 작품 속으로 걸어 들어와 죽음이라는 하나의 공간으로 모여든다. 김훈의 세계에서 죽음은 스펙타클이 아니다. 시체는 시체일 뿐이고, 몸이 찢겨 죽으면 이리저리 널부러진다. 그 죽음들에 눈을 찌푸리지 않는다. 특별할 일 없다는 듯이 흘러가는 세상을 서술하는 절제된 문장에서 오히려 굵직한 감정선을 느낄 수 있다. 남성적이다. 


남성적 문체의 한편으로는 남성 중심적 시각이 엿보인다. 한반도에 세워졌던 어느 국가보다도 가부장주의를 중시했던 국가가 조선이라는 점을 생각해보았을 때 어느 정도는 불가피한 일이다. 캐릭터들의 수동성은 단순히 남성/여성의 구획뿐만 아니라 양반/상놈의 구획에서 또한 작동하고 있는 측면도 고려해야 한다. 이러한 배경을 고려하더라도 작품 속 여성은 남성에게 위안을 주는 존재이며, 폭력의 대상이 되더라도 참고 견디거나 도망가는 것 외에는 선택지가 없는 존재다.혼인 같은 사회제도에 의해 자동으로 획득 되는 노예이자, 목숨을 걸고 청나라와의 조공무역 길을 뚫고 돌아온 남자들이 구매 가능한 재화 정도로 등장한다. 그렇다보니 여자의 몸에는 생명의 가능성이 잠재하고 있고, 남자의 선택에 의해서만 생명이 잉태한다. 김훈의 '생명론'을 약화시키는 대목이다. 어느 정도 당대의 사실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어느 정도는 특유의 문체 때문에 <칼의 노래>에서 이순신이 매일 같이 “삭풍이 불었다. 오늘은 활 열 순을 쏘았다.” 쯤의 느낌으로 너무나 무던하게 소모되어야 했다는 불편함이 있었다. 그러나 문제씩이나 삼기는 힘들다고 생각하기는 한다. 


이제 구조에 대해 이야기 하자. 가장 큰 특징은 <흑산>은 어느 정도 <칼의 노래>와 유사한 구도를 사용하고 있다. ‘이 곳’과 ‘저 곳’의 대립이다. 흑산으로 유배를 오게 된 사학죄인 정약전에게 궁궐은 ‘이 곳’이었다가 ‘저 곳’이 된 공간이다. 반대로 흑산은 ‘저 곳’이었다가 ‘이 곳’이 된 공간이다. 두 공간은 물리적으로 차단되어 있다. 시야에 뭍의 그림자조차 닿지 않는다. 육지에서 흑산에 닿기 위해 지나왔던 거칠고 사나운 물길은 심리적 단절감을 심화시키는 역할을 한다. <칼의 노래>에서는 선조와 이순신이 이러한 공간적 분리를 통해 갈등을 빚는다. 군주와 신하라는 상하관계는 대비와 정약전(혹은 황사영)이라는 형태로 반복된다. 상관이 정의하는 법도와 부하가 목도하는 본질의 입장에서 서신을 통해 서로의 사정을 짐작한다는 구도 역시도 동일하다. 


모든 등장인물들은 표면적으로는 천주교라는 믿음 때문에 삼강오륜의 세계로부터 탄압받고 있다. 그 믿음을 지키고자 하는 자들은 세계에 발붙이지 못하므로 죽음의 공간으로 모여들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러한 표면적 사건 기저에는 경험과 선험의 충돌이 존재한다. 전통은 “과거로부터 내려온 선현의 지혜”이므로 정당화 된다. <소학>에서는 그러한 전통이 “물 뿌려서 마당 쓸고 부르면 응답하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가르친다. 하지만 천주교에 연루되는 등장인물들은 <소학>의 선험의 형태로 지어진 세계 속에서 부정할 수 없을 정도로 간결하고 분명한 경험의 증거들을 천주교리를 계기로 발견한다. 가르침에 우선하는 본질에 대한 깨달음은 언어의 형태가 아닌 것으로 이미 몸 안에 와있었다. 그러나 이는 현존하는 세계와 양립할 수 없다. 본질에 대한 ‘천주교’라는 형태의 깨달음은 육지에서 발을 붙일 수 없었다. 반면 ‘저 곳’인 흑산에서 정약전과 황사영의 분신의 역할로서 등장한 창대에 의해 <자산어보>라는 형태로 보존되고 실현된다. 정약전은 창대에게 바다에 대해 아이처럼 묻는다. 아이 같은 호기심으로 새로운 세계를 점차 깨닫는다. 


김훈은 국가적 종교탄압의 역사를 기술하면서 저항할 수 없는 폭력의 공고함을 묘사했다. 끌려가면 매를 맞는다. 매를 맞은 그를 기다리는 건 죽음뿐이다. 그러나 그렇게 무력하게 바스라진 인간들에 대한 상세한 묘사를 통해 거꾸로 역사의 강력함을 드러냈다. 조선은 멸망했다. 사학죄인을 벌하고 처형하여 본(本)을 바로 세우기 위해 저잣거리에 효시하여 백성을 가르치려 했으나 결국 조선은 멸망했다. 살아남은 것은 삼강오륜이 아니라 사농공상을 가리지 않고 조선 사회의 각계각층에 스며들었던 본질에 대한 열망이다. 등장인물들은 각자의 방향으로 나아갔고, 모든 일들은 그래야 해서 그렇게 되었다. 독자는 밀어낼 수 없는 역사의 힘을 체감하며 “말이나 글로써 설명할 수 없는 그 멀고도 확실한 세계를 향해 피 흘리며 나아간 사람들”이 오늘에 남긴 흔적을 더듬어 볼 수 있다. 여전히 흑산의 바다를 유영하고 있을 물고기들의 비늘에 새겨진 물결무늬가 증거하고 있는 역사다.



형틀에 묶이는 순간까지도 매를 알 수는 없었다. 매는 곤장이 몸을 때려야만 무엇인지를 겨우 알 수 있는데, 그 앎은 말로 옮겨질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책은 읽은 자로부터 전해들을 수나 있고, 책과 책 사이를 사념으로 메워나갈 수가 있지만, 매는 말로 전할 수 없었고, 전해 받을 수가 없으며 매와 매 사이를 글이나 생각으로 이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매는 책이 아니라 밥에 가까웠다.


매를 맞을 때, 노파의 권유대로 똥물을 쏟아냈던 것인지 정약전은 기억할 수 없었다. 살점이 튀었는지 피 냄새가 났는지 똥 냄새가 났는지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함께 매를 맞았던 동생 정약종, 막냇동생 정약용, 젊은 조카사위 황사영이 무어라고 진술을 하는지도 들리지 않았다. 매와 매 사이에서 세상이 뒤집히고 또 뒤집혔다.

- 12~13p


뻘에 처박힌 거지 아이의 시체를 보면서 정약전은 구례 강마을 백성들의 글을 떠올렸지만, 죽은 거지 아이가 바로 그 마을 백성의 딸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는 없었다. 시체는 머리를 뻘에 처박아 세상을 외면했다. 그 주검은 조용하고 단호해서 신조차 범접할 수 없을 것 같았는데 그 주검을 바라보는 약전의 가슴이 무너져 내리는 고통 속에 신은 강림해 있는 듯도 했다. 정약전이 의금부 감옥에 갇혀 있을 때, 구례 강마을 백성들의 소장은 과거에 낙방한 답안지들에 섞여서 서북면 병졸들의 겨울나기 보온재로 보내졌다.

- 29p


창대야, 숭어가 왜 물 위로 뛰는 것이냐?

아마도, 물 밑에 뭐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온 바다에서 저렇게 한꺼번에 뛸 수가 있을까?

알 수 없지요. 놀이가 옮겨가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아이들의 웃음처럼 말입니다.

창대야, 숭어 피부의 무늬는 왜 저러하냐?

숭어가 헤엄쳐가면서 부딪친 물살의 무늬일 것입니다. 그 피부 밑의 살의 무늬와 결도 그와 같습니다.

그렇겠구나. 어찌 그걸 알았느냐.

칼로 숭어의 살을 헤쳐보고 알았습니다. 부딪친 무늬였습니다.

- 340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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