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 - 채식주의자
심리치료극에서는 각자가 자신에게 배당된(평소라면 하지 않았을 말과 행동들) 역할과 대사를 수행하며 자신도 몰랐던 내면의 목소리를 깨달아 간다. 그런 측면에서 <채식주의자>가 이를테면 일종의 심리치료극, '사이코드라마'가 아닐까 하는 가설을 세워보면 어떨까 제안해본다. 영혜의 '꿈'을 트리거로 출발해 내담자 인혜로 마무리 되는 이 심리극의 핵심은 '일상의 의도적인 파괴'에 있다. 영혜의 완고한 태도는 그녀를 둘러싼 모든 이들의 일상을 파괴하면서 그 균열 이면에 숨겨진 부조리들을 폭로한다. 영혜와 인혜의 결혼이 모두 상호신뢰에 기반하지 못하고 어느 정도의 일방적인 내적 희생을 감당하면서만 유지 가능했다는 것, 그녀들이 주위로 켜켜이 둘러싼 폭력의 위계 속에 놓여 있었다는 것, 비현실적인 망상과 현실 사이의 경계가 융해되는 현상 등이 모두 사이코드라마의 역할극 속에 녹아들며 그 파괴력을 증폭시켰다.
그러나 이 역할극은 임시적인 일탈이라는 데서 의미를 갖는다. 꿈과 현실이 뒤섞이지만 결코 꿈으로 인해 현실이 뒤집히지는 않는다. 인혜는 극의 마지막에 다다라 영혜에게 속삭인다. "꿈속에선, 꿈이 전부인 것 같잖아. 하지만 깨고 나면 그게 전부가 아니란 걸 알지... 그러니까, 언젠가 우리가 깨어나면, 그때는..." 인혜는 영혜로 인해, 왜 자신이 고통 받고 있는지를 이해하지 못한 채 그저 성실함으로의 도피 해왔던 날들을 인식한다. 부조리극을 통해 지금까지 자신이 속해있던 일상을 환기하고 나서의 그녀를 서술하는 대목이 어떤 미래를 암시하고 있는지는 여전히 불확실하다. 하지만 인혜의 캐릭터성과 그 표현들의 의미심장함을 염두에 두었을 때 그녀는 영혜는 다른 결말을 맞을 것으로 보인다. 내 안의 육식, 폭력성의 냄새를 감지하고 자기파괴 끝에 식물화해버린 영혜와 달리 인혜는 식물의 생명력, 끈질김을 표상하고 있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다만 단순히 인혜만이 <채식주의자>에서 선과 도덕을 획득한 인물이며 다른 등장인물들이 모두 일방적인 파멸을 맞았다는 해석에 대해서는 동의할 수 없다. 기준을 어디에 놓는가에 따라 다를 것이다. 영혜가 스스로에게 던진 질문이라면 '내 안의 육식, 그 폭력성의 흔적을 지울 수는 없을까'였다. 그녀의 질문은 마치 데카르트의 코기토(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처럼 외부의 모든 전제를 원점으로 돌려 놓은 상태에서 출발한다. 답을 얻어나가는 과정에서 세계와 충돌하더라도 그것은 의도한 것이 아니며 불가피한 선택일 뿐이다. 사회 규범이라는 틀로 온전히 환원되지 않는 그녀의 행동들은 일상을 살아가는 이들을 전율시킨다. 그녀는 채식을 한다. 그러면 당신은 '채식주의자'군요. 채식을 하더라도 몸은 챙겨가면서 드셔야죠. 영혜의 대답은 의도적인 일탈이 아니면서도 포획되지 않는다. "왜 죽으면 안돼?" 그녀의 행위에는 '몸을 챙길 목적'이 없다. 다시 한 번 반복하지만 기준은 사회적 규범이고 영혜는 마치 규범이 존재한 적 없었던 것처럼 행동한다. 생각해 보라. 토플리스, 가족 동반 회식 자리에서의 채식, 화장 하지 않음. 이에 대립하는, 그 회식 자리에 참석했던 이들. 둘 중에 누가 가장 진실했는지. 영혜의 탈선은 그렇게 일상 속의 부조리를 폭로하는 거울이 된다.
'몽고반점'에서의 형부 또한 '양심'이라고 부르는 내면의 진실과 사회적 규범의 충돌을 경험한다. 그는 '이 아름다움의 끝에는 무엇이 있을까'라는 질문을 붙들고 있는 존재다. 양심이라는 것의 기저에 욕망이 상당히 기여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면 그 둘을 면밀하게 나누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울 것이다. 그의 욕망은 아름다움에 전율한다. 그 에너지를 일상이 아닌 예술에 쏟아왔노라고, 인혜는 술회한다. 이미지의 아름다움이 불러 일으키는 정동에 휩쓸려 살아왔던 그의 커리어는 아직까지는 사회와 불화하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몽고반점'이라는 암초를 만나고 만다. 그 또한 "만약 ~하지 않았더라면"을 반복하며 몽고반점의 이미지를 처음 떠올리게 되었던 순간을 후회했다. 하지만 이제 되돌릴 수는 없다. 포기하는 순간 내적 존재가 무너지고 더 나아가는 순간 사회적 존재가 무너진다. 그의 실존의 나신은 혼인 제도라는 사회적 규칙을 정면으로 마주한다. 인혜의 희생으로 유지되어 왔던 가족이라는 사회적 결합은 이제 더 이상 그에게 의미를 갖지 못한다. 일상과 분리되어 일관되게 바깥을 향하던 거대한 에너지가 이제 그의 일상을 삼켜버렸기 때문이다. 성적 욕망과 직업적 윤리는 이제 구분되지 않는다.
<채식주의자>는 인혜의 관점에서 중요한 두 축, 생물학적 가족인 영혜와 사회적 가족인 남편이 각자의 사정으로 무너져 내리는 장면을 보여준다. 거의 부조리극에 가까운 이 사이코드라마는 결국 인혜의 시점에서 합쳐져 사회를 살아가는 인간의 태도가 어떤 불가피함을 마주해야 하는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가는 인간의 강인함이 식물의 그것과 또 얼마나 닮아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동시에 우리는 어떤 윤리를 따라 살아가고 있으며 자신의 존재가 불가피하게 사회와 불화하게 되었을 때 어떤 선택을 내려야 할지를 고민하게 한다. 그 질문을 통과하게 되면, 왜 죽으면 안되냐는 질문을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가야 하는 이유를 말할 수 있게 되지 않을까. 그 대답을 인혜가 끝끝내 찾아내기를 한강 작가는 바랐던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이 소설의 마지막 문장, "대답을 기다리듯, 아니, 무엇인가에 항의하듯 그녀의 얼굴은 어둡고 끈질기다"에 힘주어 읽어야 하는 이유가 될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