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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ayworker Oct 09. 2024

아무리 비싸도 꼭 사고 싶은 것

K와의 술자리는 여전히 피곤했다. 먹고사는 문제만 아니라면 ‘했던 말 또 하기 대마왕’을 만나고 싶은 생각은 딱히 없었지만 할 수 없다. 오늘도 그의 가지색 입술에서 쏟아지는 허세 가득한 무용담은 끝나지 않았다. '이 인간, 입 아프지도 않나?' 차라리 걱정될 즈음, 간신히 자리를 빠져나왔다.


자정이 다 되어 퇴근길 지하철에 올랐다. 술에 취한 내 머리는 자동차 대시보드 위 오뚝이 인형처럼 이리저리 흔들렸다. 피곤에 절은 눈으로 맞은편 광고판을 바라보는데, 웬 리클라이너 의자가 나를 조롱하며 묻는 것 같다. "당신의 편안함은 얼마입니까?" ‘흥, 편안함에 얼마를 쓸 수 있냐고? 지금 내 주머니 사정으로는 전철역 앞 옛날통닭에서 파는 치킨 한 마리에 생맥주 두 잔 값이 전부일 걸?’


나, 물욕 많았다. 아니, 많은 줄 알았다. 심장을 두들기는 사운드로 도로를 움켜쥐듯 달리는 포르셰 911 카레라, 강변북로 교통 상황이 한눈에 보이는 펜트하우스, 고막을 녹여 버리는 마크레빈슨 오디오까지, 별의별 것들이 다 갖고 싶었지. 하지만 지금은? 그저 웃음만 나온다. 


슬프지만 이제는 내가 할 수 있는 것과 살 수 있는 것, 그리고 꿈도 꾸지 말아야 할 것들의 경계가 명확해졌다. 나는 나이가 들면서 판단이 점점 빨라졌고, 물욕도 사라졌다고 믿었다. 밤마다 그리던 911은 이제 꿈조차 쓸모가 없었다.


아무튼 광고 속 저 의자, 스트레스리스란다. 이름부터 묘하지. 스트레스가 더 쌓이게 비싸면서 스트레스를 줄여준다고? 하지만 솔직히 말하면, 갖고 싶다. 아니, 미치도록 갖고 싶다. 아이들 한 달 학원비가 넘는 가격. 3년쯤 담배를 끊으면 살 수 있을까? 생각해 보니 금연하면 건강에도 좋고, 일석이조 아닌가? 저절로 흐뭇하고, 힘 안 들이고 쓸쓸하다.


매일 밤, 그 의자에 앉아 하루를 정리하는 상상을 한다. 왠지 모를 북유럽 감성에 젖어  ‘오늘도 수고했어.’  

그럼 그날의 피로도, 눈밑의 다크서클도 입안의 투뿔안심처럼 사라질 것 같다.

오늘도 스트레스리스를 꿈꾸지만 사실 진짜 편안함은 내 마음속에 있다는 것도 안다. 그래도 가끔 자문한다. ‘스트레스리스, 너 정말 편한 거 맞아? 혹시 30만 원짜리 중국산 의자랑 별차이 없는 거 아니지?... 농담이야, 네가 우화 속의 신포도 같아서 그래. 그러니 비싸게 굴지 말고 얼른 내 곁으로 와줘!’

새침한척해도 나의 마음은 혹시 세일은 안 할까? 누가 당근에 내놓지 않을까? 오뚝이처럼 이리저리 기웃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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