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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긍정 May 26. 2016

괴물이 된 우리의 '탈괴물화'를 희망하며(하)

'하지 않을 줄 아는 용기'와 '타인을 사랑할 줄 아는 용기'

지난 <괴물이 된 우리의 '탈괴물화'를 희망하며(상)>글을 통해 우리 사회가 만든 우리의 '괴물 같은 자화상'을 마주 볼 수 있었습니다. '노오력의 괴물'이자 '차별을 자연스럽게 일삼는 괴물'이 되어버린 사람들. 자신이 괴물인 줄 알면서도 생존을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이렇게 살아갈 수밖에 없는 현실. 이젠 대학교 이름뿐만 아니라 고등학교 이름으로도 서로를 당당하게 구분 지으며, 초등학생 때부터 특목고와 자사고를 알아야 하는 현실. 어떻게 하면 이 괴물의 탈을 벗을 수 있게 될까요. 

이 '탈괴물화'의 희망을 저는 자기 착취의 시대를 날카롭게 진단한 책인 <피로사회, 한병철 저> X 3대 심리학자 중 하나인 '아들러의 심리학'을 통해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사회를 변화시키고자, 교육을 변화시키고자 너무 거창한 해결책만을 찾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어쩌면 지금의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해법은 생각보다 단순하거나 모두가 함께 쉽게 할 수 있는 그 무언가 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물론, 다 함께 무언가를 한다는 것이 가장 어려운 일이기도 하지만요. 

과잉 경쟁의 시대, 자기 착취의 시대에서 그나마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아이러니하게도 이 미친 짓을 멈추고자 '덜' 노력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그리고 덜어 낸 노력 대신 주위 사람들에 대한 온전한 관심과 사랑을 실천해야 하지 않을까요. 다 같이 '하지 않을 줄 아는 용기', 그리고 '타인을 사랑할 줄 아는 용기'
가 필요한 것 같습니다. 과연 어떠한 힘이 있을까요?





| '하지 않을 줄 아는' 용기


  재독 철학자 한병철 씨가 저자인 <피로사회>라는 책은 독일에서 출간되어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을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에서도 여러 매체에서 올해의 책으로 선정되는 등 현시대에 대한 날카로운 철학적 진단을 한 책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물론 책의 내용이 모두 옳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지금의 사회 모습을 들여다볼 수 있는 하나의 창으로 충분히 볼 만한 가치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지금의 사회는 과연 어떤 사회일까요? 

"사람들이 주목한 것은 성과사회의 주체가 스스로를 착취하고 있으며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라는 이 책의 테제였다. 자기 착취는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기본 원리로써 타자 착취보다 훨씬 더 효과적이고 더 많은 성과를 올린다. 그러한 착취는 자유롭다는 느낌 속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사람들은 완전히 망가질 때까지 자기 자신을 자발적으로 착취하는 것이다." (피로사회 중)

'자기를 착취하는 사회'. 우리 사회를 가장 압축적으로 잘 설명하고 있는 문장이 아닌가 합니다. 이제 지금의 사회는 '규율사회'가 아닌 '성과사회'이며, 이 사회의 주민도 복종적 주체가 아닌 '성과주체'라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책에서 나오는 것이 바로 '긍정성의 과잉'과 '긍정성의 폭력'입니다. 긍정성의 폭력은 박탈하기보다 '포화'시키며,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고갈'시키는 것이라 얘기하고 있습니다.  

성과사회에선 이제 '~해서는 안 된다', '~해야 한다'란 부정성에서 점점 더 벗어나고 있는 대신, 무한정한 '할 수 있음'이 성과사회의 긍정적 조동사로서 작용합니다. 규율사회의 부정성은 광인과 범죄자를 낳지만 성과사회는 우울증 환자와 낙오자를 만들어낸다고 합니다. 지금 우리의 현실과 잘 일치하는 특성이 아닌가요?

우울증은 성과주체가 더 이상 '할 수 있을 수 없을 때' 발발합니다. 그런데 아무것도 가능하지 않다는 우울한 개인의 한탄은 '아무것도 불가능하지 않다'고 믿는 사회에서만 가능한 것이죠. 더 이상 할 수 있을 수 없다는 의식은 파괴적 자책과 자학으로 이어집니다. 성과주체는 자기 자신과 전쟁 상태로 있는 것입니다. 

이렇듯 긍정성의 과잉은 자극, 정보, 충동의 과잉으로 표출되며 지각은 파편화되고 분산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오늘날의 '멀티태스킹'은 문명의 진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퇴화라 말할 수 있다고도 얘기하고 있습니다. 마치 동물들처럼 야생에서의 생존을 위해 멀티태스킹을 행하는 것이죠. 이런 멀티태스킹 속에서 깊은 사색에 잠긴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최근의 사회적 발전과 주의 구조의 변화는 인간 사회를 점점 더 수렵자유구역과 유사한 곳으로 만들어간다." (피로사회 중)

저자는 깊은 사색적 주의가 과잉 주의에 자리를 내주며 사라져가고 있다고 진단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심심한 것에 대해서도 거의 참을성이 없는 까닭에 창조적 과정에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는 저 '깊은 심심함'도 허용하지 못한다 얘기하고 있습니다. 지나치게 활동적인 자아에게 깊은 사색적 주의를 기울 수 있는 능력은 주어지지 않겠죠. 


우리 모두에게 '멍 때리기'가 필요해 보입니다. 얼마 전 대회에서는 가수 크러시가 우승했다고 하죠.ㅎㅎ <출처 : MBN, SBS 뉴스>


이렇게 인간에게서 모든 관조적 요소가 제거된다면 인간의 삶은 치명적인 과잉활동으로 끝나고 말 것입니다. 
"활동하는 자, 그러니까 부산한 자가 이렇게 높이 평가받은 시대는 일찍이 없었다. 따라서 관조적인 면을 대대적으로 강화하는 것은 시급히 이루어져야 할 인간 성격 교정 작업 가운데 하나이다." (피로사회 중)

이러한 사색적 삶은
 '보는 법'에 대한 특별한 교육을 전제합니다. 눈으로 하여금 깊고 사색적인 주의의 능력, 오래 천천히 바라볼 수 있는 능력을 갖출 수 있게 한다는 것입니다. 보는 법을 배우는 것은 정신성을 갖추기 위한 최초의 예비 교육이라고 하면서, 인간은 어떤 자극에 즉시 반응하지 않고 '속도를 늦추고 중단하는' 본능을 발휘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더 활동적일수록 더 자유로워질 거라는 믿음은 환상에 지나지 않으며, 활동성이 첨예화되어 활동 과잉으로 치달으면 이는 도리어 아무 저항 없이 모든 자극과 충동에 순종하는 과잉 수동성으로 전도되고 만다는 것입니다. 

니체가 말한 '중단하는 본능'이 없다면 행동은 안절부절못하는 과잉활동적 반응과 해소 작용으로 흩어져버릴 것이라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진정 다른 것으로의 전환이 일어나려면 '
중단의 부정성'이 필요한 것이며 머뭇거림은 긍정적 태도는 아니지만, 행동이 노동의 수준으로 내려가는 것을 막는 데 필요불가결한 요소라고 말합니다. ('머뭇거리는 능력'이 필요한 것이죠) 

결국 
다른 것에 시선을 던질 줄 아는 부정적 태도가 필요한 것입니다. '분노'도 마찬가지입니다. 분노는 어떤 상황을 중단시키고 새로운 상황이 시작되도록 만들 수 있는 능력인데, 오늘날은 분노 대신 어떤 심대한 변화도 일으키지 못하는 짜증과 신경질만이 점점 더 확산되어가고 있다고 진단하고 있습니다. 

세계가 전반적으로 긍정화되는 추세 속에서 개인도, 사회도 '
자폐적 성과기계'로 변신하고 있습니다. 헤겔에 따르면 부정성이야말로 인간 존재를 생동하는 상태로 지탱해주는 것일지도 모르는데 말이죠. 

책에선 부정적 힘, 즉, '하지 않을 수 있는 힘'의 중요성에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
지각하지 않을 수 있는 부정적 힘 없이 오직 무언가를 지각할 수 있는 긍정적 힘만 있다면 우리의 지각은 밀려드는 모든 자극과 충동에 무기력하게 내맡겨진 처지가 될 것이고, 거기서 어떤 정신성도 생겨날 수 없을 것이다. 무언가를 할 수 있는 힘만 있고 하지 않을 힘은 없다면 우리는 치명적인 활동과잉 상태에 빠지고 말 것이다." (피로사회 중)

이렇듯 
긍정적 힘, 긍정성의 과잉은 오직 '계속 생각해나가기'만을 허용하기에 '돌이켜 생각하기'는 불가능해질 것입니다. 

"긍정적 힘만을 지닌 사람은 대상에 완전히 내맡겨진 신세가 되고,
 역설적이게도 활동과잉은 극단적으로 수동적인 형태의 행위로서 어떤 자유로운 행동의 여지도 남겨놓지 않는다. 그것은 긍정적 힘의 일방적 절대화가 낳은 결과이다." (피로사회 중)

그리고 이제 이 성과사회는 서서히 
'도핑사회'로 발전해간다고 합니다. 그 와중에 '브레인 도핑'처럼 부정적인 표현은 '신경 향상'이란 단어로 대체되고요. 이제 인간 전체가 하나의 성과기계가 되어 원활한 작동으로 최대의 성과를 산출할 것을 요구하는 사회적 발전 경향 속에서 성과사회, 활동사회는 그 이면에 극단적 피로와 탈진 상태를 야기한다고 합니다. 

특히, 이 성과사회의 피로는 사람들을 개별화하고 고립시키는 '고독한 피로'입니다. 각자 자기에게 가장 고유한 피로 속으로 빠져들었으며 우리의 피로가 아닌 나의 피로, 너의 피로가 있는 
분열적인 피로입니다. 이러한 피로는 인간을 서로 '볼 수 없고 말할 수 없는 상태'로 몰아넣습니다. 

한트케는 분열시키는 피로에 대한 대립자로서 말 잘하는, 보는, 화해시키는 피로를 내세웁니다. 이러한 
근본적 피로는 아무것도 할 능력이 없는 탈진 상태와는 전혀 관계가 없으며 오히려 특별한 능력으로 묘사됩니다. 

"
피로의 영감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보다는 무엇을 내버려 두어도 괜찮은지에 대해 더 많은 것을 말해준다." (피로사회 중) 

오히려 피로 속에서 특별한 시각이 깨어나는 '눈 밝은 피로'인 것이죠. 

탈진의 피로는 긍정적 힘의 피로입니다. 그것은 무언가를 행할 수 있는 능력을 빼앗아갑니다. 
반면 영감을 주는 피로는 부정적 힘의 피로, 즉 '무위의 피로'입니다. 놀이의 시간이자 평화의 시간, 무차별성의 시간이자 우애의 시간인 것입니다. 이제 우리에겐 이러한 형태의 '치유적 피로'가 필요한 것이 아닌가 합니다.  

긍정성의 과잉, 즉 '아니라고 말할 수 없는' 무능함, '해서는 안 됨'이 아니라 '전부 할 수 있음'에서 오늘날의 정신 질환이 발현하고 있음을 있지 않아야 할 것이며, 이제는 부정적 힘, '하지 않을 수 있는 용기
'를 통해 책에서 얘기하고 있는 '스스로의 부족함에 대한 우울한 자책으로 전도되는 데서 생겨나는 인간학적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 '타인을 사랑할 줄 아는' 용기


우리나라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아들러 심리학'을 다룬 책 중 <미움받을 용기2, 기시미 이치로·고가 후미타케 저>가 최근 출판되었습니다. 왜 우리나라를 비롯한 아시아 국가에서 아들러 심리학이 인기를 끌고 있는 것일까요? 그만큼 아들러 심리학이 우리 사회의 고민에 대해 가장 잘 답하고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닐까요? 저 역시 이 책에 나온 아들러 심리학의 내용을 기반으로 어떻게 하면 탈괴물화가 가능한지, 우리는 당장 무엇을 실천해야 하는지를 살펴보았습니다. 


| 모두에 대한 '존경'


책에선 학생들의 교육의 입구로 '존경'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모든 학생들을 존경하는 것, 모든 타인을 존경하는 것이야말로 교육의 시작이라는 것이죠. 어? 그럼 모든 학생들, 심지어 문제아들까지 다 받들어 공경하라는 의미인 걸까요?

아들러가 말하는 존경은 이러한 의미와는 조금 다릅니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존경이라 함은 '남의 인격, 사상, 행위 따위를 받들어 공경함'이라는 의미인 반면, 여기서의 존경은 '에리히 프롬'이 말한 것처럼 '인간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고, 그 사람이 유일무이한 존재임을 아는 능력'이라고 얘기할 수 있습니다. 존경이란 그 사람이 그 사람답게 성장하고 발전할 수 있게 배려하는 것이죠.   

우리가 알고 있는 존경의 의미는 사실 동경과 흡사한 감정을 말하는데, 사실 그건 존경이 아니라 공포, 종속, 맹신이라는 것이 아들러의 생각입니다. 상대를 보지도 않고 권력이나 권위에 겁먹고 허상을 떠받드는 것뿐이죠. 

존경(respect)의 어원인 라틴어 '레스피치오(respicio)'에는 '본다'라는 의미가 있다고 합니다. 즉, 먼저 있는 그대로의 그 사람을 보는 것이죠. 자신의 가치관을 밀어붙이지 않고 그 사람이 '그 사람인 것'에 가치를 두는 것. 나아가서는 그 성장과 발전을 지원하는 것. 그것이 바로 존경이라고 합니다. 타인을 조종하려는 태도, 교정하려는 태도에는 당연히 존경이 없겠죠. 

물론 있는 그대로 인정한다고 해서 문제가 있는 친구들이 모두 달라질 수도, 달라지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학생들 개개인이 내가 나인 것을 받아들이고 '
자립하기 위한 용기'를 되찾을 수는 있을 것이라 합니다. 되찾은 용기를 내느냐 마느냐는 결국 교사의 문제가 아닌 학생의 문제이고요. (아들러가 말하는 '과제의 분리')

지금의 많은 교육자, 상급자들의 모습은 어떠한 가요? 이러한 존경이 느껴지나요?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이라는 말에 진짜 국민에 대한 존경이 담겨 있을까요? 상급자가 권위와 힘으로 짓누르는 강권적인 행위는 결국 상급자가 아닌 '권력'에 복종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당연히 그 상급자의 마음을 이해할 생각은 추호도 없고요.

결국, 우리 교육에서 가장 먼저 시작해야 할 것은 모든 학생들에 대한 '존경'이 아닌가 합니다. 그리고 그 존경에 대한 구체적인 첫걸음은 바로 '타인의 관심사'에 관심을 기울이는 행위입니다. 

그저 아이들의 관심사에 관심을 기울이고, 그게 어떤 건지 이해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놀아주는 것'이 아니라 함께 즐겨 보라는 것이기도 하죠. 아이들 자신이 인정받고 있다는 것을, 어린애 취급을 받고 있지 않다는 것을, 한 인간으로서 '존경'받고 있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도록 말이죠. 이렇게 아이들의 흥미와 관심에 '공감'하며 아이를 대등한 존재로 대할 필요가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결국 '타인의 눈으로 보고, 타인의 귀로 듣고, 타인의 마음으로 느끼는 것', 바로 '공동체 감각(social interest)'입니다. 그리고 일방통행식으로 본인만 학생을 존경하라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학생들에게 존경을 가르쳐줘야 한다고 합니다. 다만, 몸소 실천함으로써 존경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줘야 하는 거죠


| '문제행동의 5단계'를 통한 아이들의 숨은 목적 파악


왜 아이들은 문제행동을 할까요? 분명 좋지 않은 줄 알면서도, 누군가에게 야단맞을 것이라는 걸 뻔히 알면서도 아이들은 문제행동을 합니다. 그리고 야단치는 방법이 교육상 효과가 있었다면 처음 몇 번 야단쳤을 때 문제행동을 하는 일이 없어져야 하지만 왜 늘 야단치게 되는 걸까요?

생각해보면 비합리적인 일이죠. 뭔가 '숨은 목적'이 있는 것은 아닐까요. 이를 알고자 지금부터 아들러 심리학에서 말하는 '문제행동의 5단계'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현대 아들러 심리학에서는 인간의 문제행동에 대해 그 배후에 작용하는 심리를 5단계로 나눠 생각하는데, 이는 다음과 같습니다. 

*1단계. '칭찬 요구'
착한 아이임을 연기하며 칭찬을 받으려고 함. 그들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칭찬받는 것'.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공동체 안에서 특권적 지위를 얻는 것'. '착한 행동'을 하는 게 아니라 그저 '칭찬받는 일'을 하는 것뿐. 칭찬과 벌에 따라 행동하는 생활양식이 몸에 배어 버림. 착한 아이처럼 보이려 커닝을 하거나 거짓된 일을 꾸미는 등의 부정행위에 나서는 것도 이 단계의 특징.

특별하지 않아도 가치가 있다고 가르쳐줘야 함. '존경'을 보여줌으로써. 착한 행동을 했을 때에만 주목하는 것이 아니라 평소의 말과 행동, 그런 사소한 것에 더 주목할 필요가 있음. 그리고 그 사람의 '관심사'에 주목하고 공감하는 것이 필요함. 

*2단계. '주목 끌기'
기껏 착한 행동을 했는데 칭찬받지 못했거나 애초에 칭찬받는 일을 해내기 위한 용기와 끈기가 부족할 경우, 칭찬받지 않아도 되니까 어쨌든 주목을 끌자라고 생각하게 됨. 어떻게 주목받을 수 있을까만 생각하는 단계. 주의해야 할 것은 이 단계에서 아이들의 행동 원리는 '못된 행동'이 아니라 '주목받는 행동'이라는 점

반에서 특권적 지위를 얻기 위해 자신이 속한 공동체 안에서 확고히 '있을 곳'을 원함. '착한 아이'로서가 아니라 '못된 아이'로서 특별해지려고 함. 존재를 무시당할 바에야 야단을 맞는 편이 훨씬 낫다고 생각. 존재를 인정받고 특별한 지위에 오르고 싶다, 그것이 바로 아이들이 바라는 것

*3단계. '권력투쟁'
끊임없이 도발하고 싸움을 걸기 시작. 그 싸움에서 이김으로써 '자신의 힘'을 과시하려고 함. '반항'을 통해 특권적 지위를 얻으려 함. 반대로 소극적인 아이들은 '불복종'을 통해 권력투쟁에 나섬. 어른들의 말을 철저히 무시함. 특별히 공부하기가 싫거나 공부가 필요 없다고 생각해서 그러는 것이 아니라 그저 불복종을 통해 자신의 '힘'을 증명하고 싶은 것.
 
법에 저촉되는 문제라면 법에 의한 대처가 필요하겠지만 그런 게 아니라 일반적인 권력투쟁이라면 당장 그 투쟁에서 물러나야 함. 질책하는 것은 물론이고 화가 난 표정을 짓는 것만으로도 권력투쟁에 서는 것임. 

*4단계. '복수'
권력투쟁에 나섰으나 당해낼 수 없다, 상대가 도발에 응하지 않아 패배를 당한다. 싸움에 진 사람은 일단 물러난 후 '복수'를 시도함. 소중한 나를 인정해주지 않는 사람, 사랑해주지 않는 사람에게 사랑의 복수를 함. 칭찬 요구, 주목 끌기, 권력투쟁 모두가 결국 '나를 더 존중해달라'고 사랑을 갈구하는 마음의 표현임

그런데 이러한 사랑의 희구가 이뤄질 수 없다는 걸 깨닫는 순간 인간은 돌변하여 '증오'를 원하게 됨. 증오란 감정을 통해서라도 주목받기를 원함. 복수의 단계에 들어간 아이들은 정면에서 싸우려고 하지 않음. '못된 짓'이 아니라 오로지 '상대가 싫어하는 짓'을 하는 것이 목적. '증오'와 '혐오'라는 감정을 통해서 어떻게든 관계를 이어가려고 함. 나의 가치를 훼손함으로써 '내가 이렇게 된 것은 다 당신 탓이다'라고 시위하는 것. 

이 단계까지 왔다면 교사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음. 손을 내밀면 내밀수록 복수할 기회가 왔다고 여기고 말과 행동이 점점 더 심해질 뿐. 이쯤 되면 이해관계가 전혀 없는 제3자(다른 교사나 전문가 등)에게 도움을 요청할 수밖에 없음. 

*5단계. '무능의 증명'
여전히 부모님이나 선생님은 학생들을 도와준다는 명목 아래 더 열심히 공부하라고 설교하거나 학교에서의 태도, 교우관계 등에 사사건건 참견하기 마련. 자신들의 요구에 의해 학생이 달라질 것이라 기대함. 학생 입장에서는 이제 '더 이상 나에게 기대하지 마'라는 생각이 '무능의 증명'으로 이어짐. 인생에 절망하고 자신을 마음 깊이 싫어하게 됨.

그리고 더 이상 절망을 경험하지 않기 위해, 더 이상 상처받지 않기 위해 모든 과제를 회피하게 됨. 누가 봐도 모자란 사람처럼 행동하고, 모든 일에 무기력해져 간단한 과제도 하려고 들지 않음. 머지않아 '모자란 나'가 진정한 나라고 믿게 됨. 말로만 그러면 자조하는 것에 불과하지만, 정말 5단계로 들어간 아이들이 모자란 사람처럼 행동하는 모습을 보면 마치 정신질환이 있는 것처럼 보임. 

이 단계 역시 교사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음. 손을 내밀면 내밀수록 더 극단적인 방식으로 '무능을 증명'하려고 함. 전문가에게 맡겨야 하나 전문가조차 대단히 어려운 일. 

위와 같이 아이들의 행동 이면에 있는 '목적'을 '문제행동의 5단계'를 통해 살펴보았습니다. (사실 '아이들'이란 주어를 '어른'으로 바꿔서 생각해도 전혀 어색함이 없습니다.먼저 칭찬을 바라고, 이어서 주목받기 위해 애를 쓰며 그렇게 되지 않으면 권력투쟁을 일으키고 복수에 나선다. 그리고 마침내는 자신의 무능함을 과시한다. 그리고 이 모든 행위는 '소속감', 즉 '공동체 안에서 특별한 위치를 확보하는 것'이라는 목적에서 비롯된다고 합니다. 

이제 아이들의 행동이 어느 정도 이해가 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결국 우리가 할 일은 왜 학생들이 그런 행동을 해야만 했는지, 혹시 자기 자신에 대한 누군가의 존경이 결핍되어 있던 것은 아닌지를 세심히 살펴봐야 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교육자가 할 일은 문제행동이 3단계에 그칠 수 있도록 하는 것, 거기서 더 심해지지 않도록 아이들을 이끈다는 점에서 교육자에게 맡겨진 역할은 매우 큰 것이라고 합니다. 

혹시 이에 대한 대응으로 '폭력'을 사용하시지는 않으시겠죠? 언어를 기반으로 하는 커뮤니케이션은 합의에 이르기까지 상당한 시간과 노력을 필요로 합니다. 이런 노력에 싫증이 난 사람이 최후에 선택하는 커뮤니케이션 방법이 바로 폭력인 것이죠. 시간도 노력도 들이지 않고 자신의 요구를 밀어붙일 수 있는 가장 '저렴한' 커뮤니케이션 수단이니까요. 도덕적 관점에서 인정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인간으로서 너무 미숙한 행위라고밖에 말할 수 없다고 합니다. 이렇게 미숙한 수단에 기대서는 안 되겠죠. 

그리고 아이들의 입장에서도 질책을 받았을 때, 폭력적인 행위와는 별개로 '이 사람은 미숙한 사람이다'라는 통찰이 무의식에 발동한다고 합니다. 미숙한 인간을 '존경'할 수 있을까요? 분노와 폭력이 수반된 커뮤니케이션에는 존경이란 없습니다. 오히려 경멸을 초래할 뿐이죠. 본질적인 개선책이 될 수 없는 건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결국 진정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 아이들의 '목적'에 주목하고 아이들과 함께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를 생각하는 것에 있습니다. '원인'이 아니라 '목적'말이죠. 그저 바꿀 수 없는 것에만 집착하며 '그러니까 무리다'라고 탄식하는 것이 아니라, 눈앞에 있는 '바꿀 수 있는 것'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고 합니다. 


| '자립'


칸트가 한 말이 있습니다. "인간이 미성년 상태에 있는 이유는 이성이 결여되어서가 아니다. 다른 사람의 지시 없이는 자신의 이성을 사용할 결단도 용기도 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즉 인간은 자기 책임하에 미성년 상태에 머물고 있는 것이다." 능력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사실 능력을 발휘할 용기가 충분하지 않은 것이죠. 그래서 칸트는 "자신의 이성을 발휘할 용기를 가져라."라고 말했습니다.

왜 자립을 거부하는 것일까요? '타인의 지시'를 따르며 사는 것이 더 편하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주변의 어른들 역시 아이들을 미성년 상태에 잡아두려고 자립이 얼마나 위험한지, 그 리스크며 두려움에 대해 이런저런 수를 동원해 주입하고 있다고 합니다. 자신의 지배 아래 두기 위해서죠. 

부모 그리고 교육자는 어쩌면 학생들이 자립하는 것이 두려울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지나치게 간섭하고 과보호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학생들이 자립하는 순간 부모와 교육자의 권위가 무너질 것이라는 두려움 때문이죠. 그리고 아이들을 무난하고 다치지 않을 길만 걷게 하는 식으로 지배함으로써 아이들이 실패할 경우 그에 대한 책임을 추궁당하고 싶지 않은 걸지도 모릅니다. 즉, 아이들을 걱정해서 과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위해 그렇게 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교육자라면 늘 학생의 자립을 목표로 세워야 하겠죠. 그래서 상담을 할 때도 상담자를 의존적이고 무책임한 위치에 놓이지 않도록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고 합니다. 만약 상담자가 "선생님 덕분에 나았습니다."라고 한다면 그 상담은 실패한 것이나 다름없다고 합니다. 이 말을 뒤집으면 "나 혼자서는 아무것도 못해요"라는 뜻이기 때문이죠. 

교육도 마찬가지입니다. 학생들이 스스로의 힘으로 이루어냈다고 느끼게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죠. 
그렇다면 교육자는 어디에서 보람을 찾을 수 있을까요? 학생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자립'이라는 큰 목표에 공헌했다는 '공헌감'에서 행복을 찾는 수밖에 없다고 합니다. 

본인의 인생은, 매일의 행동은 전부 스스로 결정하는 것이라고 가르쳐주는 것, 그리고 결정하는 데 필요한 자료가 있으면 제공해주는 것, 이것이 바람직한 교육자의 자세라고 합니다. 언제든 도와줄 준비가 되어 있다고 알려주고, 도움을 줄 수 있는 거리에서 지켜보면 되는 것이죠. 

| '칭찬'의 역효과


'칭찬'은 어떠할까요? 아들러는 벌을 주는 것뿐 아니라 칭찬하는 것마저 부정합니다. 칭찬한다는 행위에는 '능력 있는 사람이 능력 없는 사람에게 내리는 평가'라는 측면이 있고, 그 목적은 상대를 '조종'하기 위함이라는 생각 때문입니다. 

또한 앞서 얘기한 문제행동의 5단계 중 하나인 '칭찬 요구'와 같이 그저 '칭찬받는 것'을 목적으로 행위를 한다면 그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에는 언제나 '경쟁'이 일어나게 됩니다. 남이 칭찬받으면 분해하고 자신이 칭찬받으면 우쭐해지죠. 이런 경험은 아마 학생 시절에 누구나 한 번쯤은 겪어보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결국 공동체는 칭찬받으려는 경쟁원리에 지배를 받게 됩니다

마치 애초에 마라톤 완주가 목표였던 사람이 함께 뛰는 사람을 '이기자'라고 생각하는 순간부터 
'완주한다' 혹은 '빨리 달리자'였을 목적이 '이 사람을 이기자'하는 것으로 바뀌게 되는 것이죠. 친구가 어느새 적으로 돌변하게 됩니다. 경주가 끝난 후에도 친구의 승리를 축복하지 못하고 질투와 열등감에 사로잡혀 괴로워합니다. 사실 누군가에게 이길 필요 없이 그저 완주만 할 수 있으면 되는 건데 말이죠

물론, 칭찬 자체가 무조건 나쁜 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그 방법과 과정이 너무나 잘못되어 있다는 것이 문제죠. 아이를 망치는 칭찬이 아니라 
세심한 관찰을 통한 노력 중심의 칭찬
이 필요해 보입니다. 칭찬이 아이들에게 얼마나 큰 악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 어떻게 칭찬해야 할지 직접 눈으로 확인해보고 싶으시다면 <EBS 다큐프라임 교육대기획 10부작 - 6부, 칭찬의 역효과>를 꼭 한 번 보시길 추천드립니다.


칭찬은 아이들에게, 그리고 우리 모두에게 독이 될 수 있습니다. 출처 : <EBS 다큐프라임 - 칭찬의 역효과>


| '경쟁'이 아닌 '협력'


결국, 우리 교육이 나아가야 하는 방향은 '경쟁원리'가 아닌 '협력원리'입니다.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면서도 누구도 쉽사리 실천하지 못하고 있는 사실이죠. 이미 어렸을 때부터 너무나 많은 시간 동안 경쟁원리가 세뇌되고 내면화되었습니다.

어떤 한 학생이 문제행동을 일으켰다고 가정해보겠습니다. 그런데 문제행동을 한 건 사실 그 학생이 나빠서가 아닙니다. 반 전체에 만연한 경쟁원리 때문입니다. 그 학생 혼자서 마음의 폐렴을 앓고 있던 것이 아니라 이미 반 전체에 심각한 폐렴이 퍼져 있었고, 그중 한 증상으로 그의 문제행동이 드러났을 뿐이죠. 이것이 아들러 심리학의 발상입니다. 

'경쟁원리'라는 이름의 병에 빠져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육자에게 필요한 건 문제행동을 일으킨 '개인'이 아니라 문제행동이 일어난 '공동체'로 눈길을 돌려 이 공동체 자체를 치료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 우리는 처음부터 '열등감'을 안고 산다


그리고 재밌는 것은 우리 인간은 어린 시절에 누구도 예외 없이 '열등감'을 안고 산다는 것이 아들러 심리학의 대전제입니다.


인간은 마음의 성장보다 신체의 발달이 늦은 거의 유일한 생물입니다. 결국 아이들은 
심리 면에서 '하고 싶은 일'과 신체 면에서의 '할 수 있는 일'의 차이가 생겨 괴로워하게 되고, 무력감 혹은 자신의 불완전함을 경험하게 되어 원리적으로 열등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불완전한 존재'로서 인생을 시작하는 것이죠. 

그런데 어른들은 신체적 조건만을 보고 어린애 취급을 하고 아이들의 마음을 보려 하지 않습니다. 마음은 어른과 크게 다르지 않은데 인간적인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죠. 결국 우리에게 필요한 건 다름 아닌 '공동체 감각'일 것입니다. 


| '평범해질 용기'


이제 우리는 타인으로부터 인정받기를 원하지 않고, 자신의 의사로 스스로를 인정해야 합니다. '나'의 가치를 남들이 정하는 '의존'이 아니라 '나'의 가치를 내가 결정하는 '자립'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바로 '평범해질 용기'입니다. 특별한 존재가 아니라도 특별히 뛰어나지 않아도, 평범한 자신을, '그 외 다수'로서의 자신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합니다. 

평범한 것은 전혀 부끄러울 것이 없는 하나의 개성인데, 만약 이 말을 모욕으로 느낀다면 여전히 '특별한 나'로 있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결국 남들로부터 인정받기를 바라고, 그러니 칭찬받기 위해 '주목 끌기'를 하며 여전히 문제행동의 테두리 안에 갇혀 산다는 것이죠. 

나를 타인과 비교하고 그 '차이'에만 주목하려는 것은 자신에게 거짓말을 하는 삶의 방식이나 다름없다고 합니다. 
'남과 다른 것'에 가치를 두지 말고 '나는 나'라는 것에 가치를 둘 줄 아는 용기가 필요해 보입니다. 나의 개성은 상대적인 것이 아니라 절대적인 것이니까요. 

| '타인을 사랑할 줄 아는 용기'


앞서 언급한 존경의 의미는 '그 사람을 있는 그대로 존중한다'라는 의미였습니다. 그 근저에 흐르는 건 바로 상대가 가진 조건을 믿는 '신용'이 아니라 아무런 조건 없이 다른 사람을 믿는 '신뢰'겠죠. 타인을 신뢰할 수 있느냐 없느냐는, 타인을 존경할 수 있느냐 없느냐와 상관이 있다고 합니다. 신용을 바탕으로 한 관계를 통해 존경이 가능할까요? 결국 우리는 '믿을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한 것입니다. 

타인을 믿는다는 것만큼 능동적인 행위는 없을 것입니다. 그것도 '먼저' 말이죠. 어쩌면 타인을 먼저 믿을 수 없다고 호소하는 건 결국 자기 스스로를 완전히 믿지 못하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결국 누군가를 먼저 존경하고 신뢰하는 것. 바로 타인에 대한 '사랑'으로 이 모든 문제는 귀결됩니다. 여기서의 사랑이란 이기적으로 '나의 행복'을 바라는 것도, 이타적으로 '너의 행복'을 바라는 것도 아닌, 나눌 수 없는 '우리의 행복'을 쌓아 올리는 것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즉, '나'와 '너'보다 상위에 있는 것이 바로 '우리'이며, '나'였던 인생의 주어가 '우리'로 변하는 것이 진정한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사랑을 통해 '나'로부터의 해방이 가능합니다. 많은 어른들이 자신의 나약함과 불행, 불우한 환경, 트라우마를 무기 삼아 마치 어린아이들처럼 다른 사람을 조종하려고 합니다. 이제 이 '자기중심성'으로부터 벗어나야 하지 않을까요? 세계의 중심으로 살아온 것을 그만두고 '나'로부터 탈피해야 하지 않을까요? 어린 시절의 생활양식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야 하지 않을까요? 이것은 결국 '자립'을 통해 가능하며 이는 곧 '사랑'을 통해 가능합니다.  

아이들의 문제행동도 결국 '사랑받기 위한 생활양식'에서 비롯되는 것이고요. 그뿐만 아니라 아마 지금의 우리가 선택한 생활양식도 어린 시절의 생존전략에 뿌리를 둔 '어떻게 하면 사랑받을 수 있을까'가 기준이 되었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아직 진정한 의미에서 자립을 이루지 못하고 '누군가의 아이'라고 하는 생활양식에 머물고 있을 것입니다. 

이제 
어린 시절의 생활양식과 결별하고 진정한 자립을 이뤄야 하지 않을까요? 이러한 자립이 가능한 건 결국 타인에 대한 사랑입니다. 결국 사랑이야말로 진정한 자립이며, 그래서 사랑이 더더욱 힘든 것이라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사랑에 뛰어들 용기'가 필요한 것입니다. 

에리히 프롬은 이렇게 얘기했다고 합니다. "우리는 의식적으로 사랑받지 못하는 것을 두려워하지만, 사실은 무의식중에 사랑하는 것을 두려워한다"라고. 

보장 없는 사랑은 시작하고 싶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이는 자신의 열등감을 핑계로 대는 전형적인 열등 콤플렉스에서 기인한 발상이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결국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과제를 분리하고, 자신이 먼저 사랑하는 것
이라고 얘기합니다. 우리는 사랑할 용기가 없어 어린 시절에 형성한 사랑받는 생활양식에 머물러 있었던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 모두가 함께할 수만 있다면


"세계 평화를 위해 우린 무엇을 해야 합니까?"라는 누군가의 질문에 테레사 수녀는 아래와 같이 대답했습니다.


집에 돌아가서 가족을 사랑해주세요.
- 마더 테레사 수녀


과잉경쟁과 성과사회 속에서 우리는 너무나 많은 문제들에 직면해 있습니다. 모두가 이 문제들을 알고 있지만 쉽사리 그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진 못하고 있죠.


이러한 상황 속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지금의 현실이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에선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차라리 순응하는 게 더 편하고 좋다, 나만 살면 어떻게든 괜찮지, 시도해봤는데 결국 변하는 건 없다 등의 여러 생각과 경험으로 결국 사회를 바꾸려 하기보다는 '개인'의 자기계발과 노오력을 통해, 결국 '괴물'이 됨으로써 이를 극복하려고 하는 것 같습니다. 사회도 그렇게 하길 바라는 것 같고요
 
그런데 어쩌면 여태껏 너무 거창한 해결책만 찾으려 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생각보다 답은 단순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결국, 우리가 당장 해야 하는 건 지금의 '~할 수 있다'라는 무한 긍정과 이 미친 과잉경쟁에의 참여를 멈추는 것. 즉, '하지 않을 줄 아는 용기(멈춤)'. 그리고 아이들, 학생, 더 나아가 주변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한 '관심', '존경', '사랑'. 즉, '타인을 사랑할 줄 아는 용기(사랑)'가 아닌가 합니다. 

물론 더 이상 어느 한 개인만의 변화와 희생만으로는 이뤄낼 수 없으며 지금의 사회구조와 개인의 변화가 서로 상호작용해야만이, 그리고 결국 모두가 함께, 다 같이 행동하지 않으면 '탈괴물화'는 불가능할 것입니다. 그래서 더더욱 '용기'가 필요한 것 같습니다. 

문제가 있다고 무조건 질책으로 대응하고, 상벌로 모두를 통제할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진짜 '숨은 목적'을 인지하며 아이, 학생, 주변 사람들의 있는 그대로를 인정해주고 그 사람의 관심사를 응원하고 함께하며 이를 발전시킬 수 있도록 도와주는, 물론 스스로의 힘으로 이루어낼 수 있도록 진심으로 함께하는 것
만으로도 조금이나마 더 나은 세상이 되지 않을까 합니다. 


모두가 함께 할 수만 있다면


비록 단순하지만 '모두가 함께 할 수만 있다면' 지금과 같은 괴물의 탈을 벗을 수 있지 않을까 희망합니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사실 가장 쉬운 일이자 가장 어려운 일이 아닌가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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