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픽션 아카이브 - 장편소설 │ 연연
예전부터 존재에 대한 죄책감을 드러내는 이야기를 참 좋아했다. 이를 테면 아다치 미츠루의 <터치> 같은 스포츠 만화들. 아다치 미츠루의 만화에서는 형제나 자매, 부모가 일찍 죽는다. 주인공은 그 사건을 삶의 동력/무기력이자 마음의 짐으로 이고 지고 산다. 죽은 형제를 대신해 야구를 열심히 해서 고시엔에 진출하는 식으로.
이상하게 그런 이야기들에 끌렸다. 그건 뭐랄까, 내가 태어났고 살아있단 사실에 막연하게 느끼는 죄책감을 건드려줬다. 남들 앞에서는 아무렇지 않은 척하면서 정작 혼자 야구공을 허공에 던질 때에는 공허하고 허무한 표정을 짓는 주인공을 보고 혼자 훌쩍이곤 했다. 나를 비극의 주인공으로 만들고 싶었던 소위 중2병의 감정이었을까? 그게 어떤 감정인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2020년 창비청소년문학상을 수상한 <유원>의 주인공 유원도 비슷한 아픔을 갖고 있다. 살아남았다는 죄책감, 가족을 향한 부채감, 자기혐오, 증오와 연민 등…. <유원>은 유원이가 그 복잡한 감정들을 받아들이고 계속 나아가는 이야기를 그린다.
고등학생 유원은 동네 유명인사다. 십여년 전 화재 사고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아이. 그것이 유원이 다른 이름이다. 하나뿐인 언니는 화재 현장에서 어린 유원을 11층 창밖으로 던져 살리고 자신을 탈출하지 못하고 사망한다. 떨어진 유원을 받은 아저씨는 그 충격으로 한쪽 다리를 저는 장애를 갖게 된다. 유원의 언니를 알던 사람들은 유원에게서 언니를 발견하려 들고, 아저씨는 돈이 필요할 때마다 유원의 집에 찾아와 다리 때문에 취업하기 힘들다는 말을 하곤 돈을 빌려 간다. 때문에 유원은 그들이 고마우면서도 밉다. 그리고 그런 자신에게 죄책감을 느낀다. 답답할 때에는 학교 옥상에 올라간다. 나 혼자 있을 수 있는 공간. 그런데 어느 날 옥상에서 처음 보는 아이(수현)를 만난다. 수현은 유원에게 새로운 장소를 보여주고, 둘은 점점 친해진다. 그러나 알고 보니 수현에게는 유원에게 알리지 않은 사실이 하나 있었는데….
<유원>은 백온유 작가의 첫 책이다. 1993년 경북 영덕에서 태어나 고양예고 문예창작과와 서울예술대학교 문예창작과를 졸업한 백온유 작가는 <정교>라는 작품으로 2017년 제24회 MBC 창작동화대상 장편부문을 수상하면서 등단한다. (<정교>는 현재 절판된 것으로 보인다.) 백온유 작가는 구병모 작가의 <위저드 베이커리>를 계기로 청소년문학에 관심을 갖게 된다. 그리고 <유원>을 통해 2020년 제13회 창비청소년문학상을 수상하며 첫 책을 출간한다. (이후 같은 작품으로 제33회 오늘의 작가상을 수상한다.)
스스로 섬세하지 못해 타인의 감정을 헤아리는 것을 어려워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유원'을 표현할 때에 한계를 많이 느꼈고, 그럴 때마다 새벽에 나가 걸으면서 유원의 이름을 소리 내어 불러 보았다. 인생의 문제는 쉽게 해결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다만 '그럼에도' 희망을 가지는 태도를 믿는다. "기꺼이 내 생을 근거 삼아 추천하고 싶다"던 독자의 리뷰를 읽고, 그분의 안목이 틀리지 않았다는 걸 증명해주고자 좋은 작품을 써야겠다 생각했다. 어린이, 청소년, 어른을 아우를 수 있는 이야기, 진입 장벽이 높지 않은 소설을 쓰고 싶다. 자신의 이름보다는 소설의 제목이 기억에 남길 바란다.
죽음의 문턱에서 돌아온 생존자는 목숨을 얻은 대가로 ‘자기’를 잃는다.
생존자의 정체성은 죽은 자와의 관계에 의해서만 규정되고 작동해서다.
정혜신 작가의 추천평처럼, 생존자인 유원은 매일 죽은 언니와의 관계 속에서 규정된다. 매해 언니의 생일과 언니의 기일은 찾아오고, 그때마다 언니를 그리워하는 가족과 주변 사람들, 그리고 아저씨를 마주한다. 언니가 재주가 많았다는 말들이 어쩐지 자신을 탓하는 것만 같아 괴롭다. 언니의 죽음은 곧 유원의 생존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유원에게 수십년 전 화재 사건은 기억도 나지 않는 과거의 일이지만 사실은 현재진행형인 사건인 셈이다.
유원은 자신을 살린 언니에게 따져 묻고 싶다. 자기를 살린 이유가 뭐냐고. 하지만 죽은 언니는 답이 없다. 애먼 사람들만 언니의 죽음을 두고 왈가왈부할 뿐이다.
말을 가려 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애써 언론이 만들어 놓은 언니의 숭고한 죽음을 개죽음이라고 말했다. 그렇지 않은 죽음은 또 어디 있을까. 윗집 노인이 붙인 담뱃불이 아니라 어떤 의미 있는 불씨였다면 죽음도 달라졌을까? 누군가의 생일을 축하하려 붙였던 생일 초거나, 아기 젖병을 삶다가 붙은 불이거나 정권에 대항하는 횃불이었으면 언니의 죽음이 개죽음이 아닌 것이 되나?나를 사랑하면서 어떻게 나를 11층 아래로 떨어뜨렸을까. 살리기 위해서? 살 수 없을지도 모르는데? 불에 타서 죽는 것보다는 추락사를 감수하고서라도 어떻게든 해 보려고 한 거였을까. 언니를 이해하는 것은 역부족이다.'떨어뜨리다'는 왠지 실수로 한 것 같은 느낌이고, '던지다'는 뭔가 공격적이고 폭력적인 느낌이다. 언니는 나를 어떻게 한 거야?사실은 잘 모르겠다. 언니에 대한 기억이 내 어딘가에서 발굴되는 것인지, 혹은 발명되는 것인지를. (166쪽)
해결될 수 없는 굴레 속에 빠진 유원은 이런 삶이 지긋지긋다. 하지만 언니는 자신을 살려준 사람이기에 지겨워해서는 안 된다(고 유원은 생각한다). 그런 무의식 때문일까. "언니가 지겹다(119쪽)"고 말하니 딸꾹질이 난다.
매년 찾아오는 아저씨에 대한 마음도 비슷하다. 꼬박꼬박 돈을 빌려가는 아저씨를 보면, 고마운 마음보다는 사나운 마음이 든다. 나는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아저씨는 당연히 고마워해야 할 대상이 아니다. 오히려 지금의 유원을 갉아먹고 있는 주범이다. 하지만 유원은 자기 안의 사나운 마음을 어찌 이해하고 받아들일지 몰라서, 아저씨가 자신에게 어떤 존재가 되었는지 제대로 마주할 수 없다. 대신 자기가 다쳤다면 달랐을까, 상상해 본다. 유원은 다리는 멀쩡해도 마음이 다친 상태다. 아저씨를 탓하는 나 자신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모르겠는 상태. 그래서 차라리 자신을 해하고 있는 상태.
유원은 자신이 손쓸 수 없었던 과거로 인해 지금 고통받는다.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그 고통을 어찌할 수 없는 문제로 생각한다. 나 또한 그런 적 있었다. 나의 괴로움은 부모다. 의존적이며 의심이 많은 엄마와 알콜중독의 아빠. 두 사람은 매일 같이 싸웠지만 자식에게는 다정했다. 나는 그걸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한창 헤맸다. 각자의 방법으로 열과 성을 다해 나를 키워준 존재들인데, 이상하게 늘 미웠다. (이제는 안다. 미워할 만하다. 싸우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직접적이진 않아도 늘 간적접으로 폭력을 휘두르는 것과 같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 동시에 부모를 미워하는 나를 용서할 수 없어 괴로웠다. 나태하게 사는 나도 용서할 수 없었다. 나는 엄마의 희생을, 아빠의 희생을 먹고 자랐으니까. 그들의 희생을 도루묵으로 만들 수 없으니까. 그래서 열심히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유원이 공감되면서도 마음 아팠다. 유원아, 그건 아픈 거야. 넌 지금 아파. 말해주고 싶었다.
누군가의 희생을 발판으로 살아남았으므로, 유원은 열심히 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학원에도 열심히 가고 수업도 열심히 듣는다. 하지만 그건 정말 내가 원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유원은 자주 사고 없는 유원의 삶을 가정하고 상상한다. 진짜 '유원'의 삶인 삶.
다행히, 유원에게 그런 말을 해줄 수 있는 존재가 온다.
어느 날, 유원은 옥상에 갔다가 수현을 만난다. 수현은 공부는 열심히 하지 않지만 봉사활동은 열심히 하는, 조금 이상한 아이다. 남들이 쉬쉬하며 유원의 뒤에서 사고 이야기를 할 때, 수현은 유원에게 직접 물어본다. 다른 사람들이 유원 앞에서 '네 언니가 글을 참 잘 썼단다'라고 말했다면, 수현은 언니가 쓴 글을 유원에게 보여주는 식이다. 그건 확실히 다르다. 전자는 유원이 기억할 수 없는/제외된 관계를 이야기하지만, 후자는 유원을 그 관계/세계 안에 불러 들인다. 그런 태도가 낯설지만 싫지 않은 유원은, 난생 처음으로 서로의 집에 놀러 가고, 학원 땡땡이 치고 간식 사 먹는 등 친한 친구끼리 할 만한 것들을 해본다.
하지만 곧 수현이 아저씨의 딸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유원은 혼란스럽다. 수현은 일부러 나에게 접근한 걸까? 왜 숨긴 걸까? 나에게 복수를 하고 싶었나? 하지만 결국 수현도 의도하지 않았던 만남이었으며, 아저씨는 이미 이혼하여 수현과 연락하지 않은 지 오래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래도 여전히 아저씨의 딸이란 사실을 먼저 말해주지 않았다는 사실이 화가 난다. 자기도 아저씨와의 관계가 좋지 않다면서, 왜 먼저 말해주지 않았지?
그런 때에도 수현은 봉사활동을 빼먹지 않는다. 유원에게 지금 수현이 봉사활동 가는 것은 유난스러운 일처럼 느껴진다. 당장 내 앞의 문제들, 유원과의 관계나 앞으로 진로는 어떻게 할 것인가 같은 문제가 쌓여 있는데 어떻게 유기견 봉사 활동 같은 것에 마음을 쏟을 수 있지? 싶은 의문이 든다.
하지만 수현에게 봉사활동은 그냥 착한 일이 아니다. 수현의 존재 기반, 지금 내가 살아있는 방법, 잘 살려는 노력의 물리적 형태이다.
아무리 이미 받아들인 후라고 하더라도, 자신의 부모가 해로운 사람이라고 말하는 일은 괴롭다. 어쩔 수 없이 나는 그의 자식이라 나의 출처가, 나의 바탕이, 내 일부가 나쁘다고 말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 문장은 맞으면서도 틀리다. 그 일부는 해로움 그 자체로 존재하지 않고 결국 자식(나)이 어떻게 소화하고 이해하느냐에 따라 다른 형태를 띤다.
수현에게 그것은 봉사활동이었다. '우리 아빠가 그럴 리가 없어' 하면서 각종 명분을 만들어주다가 결국 '우리 아빠는 해로운 사람이구나' 인정할 수밖에 없을 때, 수현은 아빠를 어떤 왜곡 없이 받아들이기 위해 봉사활동을 했을 것이다. (강화길 소설에서의 '나는 엄마처럼 살지 않겠어'가 구질구질하게 살지 않겠다는 계급 탈출의 의지 표명이라면)수현이 아빠처럼 살지 않겠다고 말하는 것은 다른 존재에게 해 끼치지 않고 기대하지도 않고 내가 할 수 있는 좋은 일(유기동물의 존재를 지지하는 일 같은)을 하며 살겠다는 의지 표명이다.
"아빠의 문제점은 그거야. 우리한테도 똑같이 사기를 친다니까? 희망적인 척, 곧 있으면 나아질 것처럼 연기를 해. 그럴 때는 차라리 나를 때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도 있어. 적어도 그러면 아빠를 혐오할 확실한 명분이 생기잖아." (…) 수현은 허공을 움켜쥐고 떨어지지 않으려 애썼다. "아빠가…… 해로운 사람이라는 걸 인정하는 건 진짜 어려운 일이야. 그러고 싶지 않은데 나도 모르게 아빠의 행동에 이유를 찾아 주게 되거든. 아빠도 아빠다운 아빠의 사랑을 제대로 못 받고 자라서 그런 거라고, 혹은 한 번도 여유를 갖고 살아 보지 않아서 그런 거라고, 살면서 누군가를 도와 본 게 처음이라, 은인이 되어 본 것도 처음이고 그런 식의 대접을 받아 본 것도 처음이라 거기서 아직까지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거라고. 내 머릿속에서 자꾸만 아빠를 가련한 사람으로 만들거든." 수현의 노력이 가상했다. "이제 알아. 아빠는 해로운 사람이야. 아빠는 이 세상에 해로워. 너한테도, 나한테도. 아빠는 변하지 않을 거야. 포기해야 돼. 나는 아빠랑 다르게 살 거야. 너도 내 노력을 우습게 보지 마." 수현은 아빠의 비겁함, 구질구질함, 위선, 아빠에게 기대는 것이 아니라 아빠를 아이 달래듯 달래 가며 격려하고, 다독이는 것, 아빠에게 또다시 실망하는 일련의 일들에 지쳐 있었다.나는 수현에게 미안했다. 이런 것까지 말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내게는 더욱더. 문득 수현이 꾸준히 해 온 봉사 활동들이 떠올랐다. 그게 어떤 의미인지. (229-230쪽)
수현이 아빠(아저씨)라는 문제를 어떻게 생각하고 대하고 있는지 고백한 후에, 유원도 비로소 아저씨를 오늘날의 시선에서 마주한다. 수현은 아저씨를 만나 말한다. 그 날, 떨어지는 자신을 받아줘서 감사하다고. 얼마나 무겁고 감당하기 힘들었겠느냐고. 그리고 덧붙인다. 하지만 지금 아저씨가 나에게 너무 무겁고 버겁다고. 어쩌면 남이라서 더 하기 어려웠던 말을, 자식인 수현이 먼저 유원 앞에서 말해주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나는 아저씨 덕분에 살아있기 때문에 아저씨를 미워해선 안 돼. 그런 못난 아이여서는 안 돼. 나는 그런 나쁜 아이가 아니잖아.' 스스로를 가둬두었던 유원의 방어기제와 무의식이 '부모를 미워해도 돼. 나를 있게 한 사람을 미워해도 돼. 그럴 수도 있는 거야.'라는 수현의 말을 통해 거두어진 셈이다. 유원은 그것은 '수현이 자신을 부축해 주었'다고 표현한다.
죄책감의 문제는 미안함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합병증처럼 번진다는 데에 있다. 자괴감, 자책감. 우울감. 나를 방어하기 위한 무의식은 나 자신에 대한 분노를 금세 타인에 대한 분노로 옮겨 가게 했다. 그런 내가 너무 무거워 휘청거릴 때마다 수현은 나를 부축해 주었다. (247쪽)
유원이 그동안 마땅히 받아들여야 할 것이라고 여겼던, 하지만 유원을 야금야금 갉아먹었던 관계들을 유원의 입-말을 통해 직접 변화시킨 것이다. 그것은 수현을 만나면서 비로소 가능해진 일이었다.
처음에는 책 띠지에 적힌 홍보용 인용구("높은 곳에 서려면 언제나 용기가 필요했다.")가 잘 이해되지 않았다. 하지만 책을 다 읽고 나니 이 문장을 뽑게 된 경위를 알 것 같다. 11층에서 떨어져 살아난 유원에게 높은 곳은 단순히 고소공포증 따위를 유발하는 아찔한 공간이 아니다. 자신이 살아있다는 사실에 대한 복잡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장소다. 그 감정을 마주하는 일은 두려운 일이므로, 높은 곳에 서려면 용기가 필요하다. 하지만 옥상에서 수현을 만난 다음부터 무언가 변하기 시작한다. 유원에게 수현은 용기가 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유원과 수현, 그리고 정현(수현의 동생)이 자신과 자신을 둘러싼 세계 그리고 관계를 받아들이는 방식은 불안하다. 특히 정현이 아빠 같은 존재를 주차장의 돌처럼 어찌할 수 없는 것, 그저 그 자체로 그런 것으로 받아들이기로 했다고 말하는 장면에서는, 정현이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를 이해하면서도 걱정이 되었다. 그런 마음으로는 오래 버틸 수 없으니까.
그래도 불안하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정현에게는 유원이 있고, 수현이 있기 때문이다. 미래에 어떤 모습일지는 지금의 지위나 상태보다는 지금 곁에 누가 있느냐가 더 큰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유원>은 세계와 관계의 불완전함에 기인한 불안을 드러내면서도 희망을 볼 수 있도록 만드는 좋은 이야기이다. 나의 청소년기에 <유원>이 있었더라면 덜 외로웠을 것 같다. 지금 누구보다 외로울 청소년A가 부디 <유원>을 만나 덜 외로워지기를, 자신을 좀더 어루만져줄 수 있다면 좋겠다.
마지막으로, 영화 <우리들>을 만든 윤가은 감독의 추천평이 너무 좋아서 덧붙인다. 이런 창작자들이 있어서, 계속 이야기를 쓰고 만들어줘서, 고맙고 행복하다.
여기, 세상에서 가장 용감한 아이들이 있다. 갑작스레 찾아온 삶의 비극 위에 다시금 뿌리를 내리고 자라나는 아이들. 도무지 어쩔 수 없는 한계 안에서 스스로 만들지 않은 짐을 기꺼이 끌어안고 일어나는 아이들. 그렇게 멈추지 않고 계속 앞으로 더 앞으로 나아가는 아이들. 『유원』은 비극적 사건에서 살아남은 ‘유원’이 새 친구 ‘수현’과 만나며 겪는 마음의 소용돌이를 집요하게 쫓아가며, 누구도 쉽게 들여다보지 못했던 ‘생존, 그 이후의 삶’을 섬세하고도 생생하게 담아내는 이야기다. 끝난 줄 알았던 사건이 모든 불행의 씨앗이 될 때, 가까스로 부여잡은 삶이 도리어 자신을 공격해 올 때, 과연 그 아이는 또다시 살아남을 수 있을까. 아니, 언젠가는 진짜 자기 삶의 주인이 되어 원하는 삶을 스스로 만들어 가는 ‘생존, 그 이상의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 두 소녀의 이 험난한 마음의 모험이 막바지에 도달할 때, 우리는 비로소 깨닫게 된다. 이 이야기는 사실, 어느 순간 생에 가장 큰 용기를 내 진짜 나만의 삶을 살기로 결심한 우리 모두의 이야기, 바로 우리 자신의 빛나는 생존기라는 것을.
창비청소년문학상에 응모하고 수상할 적의 제목은 <날개가 피어나는 날>이었지만, 출간 과정에서 <유원>으로 바뀌었다. 소설집 <두번째 엔딩>에 <서브>라는 제목으로 <유원>의 뒷이야기가 실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