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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선 Jun 02. 2020

어떤 음악은 나의 성장을 기록한다.

하지만 기록 속 감정은 더이상 같은 감정이 아니다

ⓒ소선



취직을 위해 처음 이력서를 쓰던 날, 학력과 전공을 기입하다가 문득 머쓱해진 기억이 있다. 나는 경제학을 전공했지만 수요공급곡선 외에는 기억나는 것이 없는, ‘모든 인간은 합리적이다'라는 경제학의 기본 원칙과 굉장히 거리가 먼 사람이기 때문이다. 비싼 등록금을 내고 전공 관련 지식을 하나도 얻지 못한 사람이라는 불명예가 걱정될 때면 나는 급한 마음으로 외친다. ‘제가 학보사 활동을 워낙 열심히 해서요!’


입학식이 있던 3월의 봄날, 나는 우연히 학보사 기자 모집 포스터를 보았다. 지긋지긋한 수험생활을 뒤로 하고, 이제는 좀 더 지적이고 열정적인 무언가를 하고 싶던 찰나였기에 자연스러운 수순처럼 학보사 기자가 되었다. 이후 6개월의 수습기간과 1년 6개월의 정기자를 거치고 3학년이 되던 겨울, 나는 그토록 염원했던 편집장이 되었다.


수습 딱지를 떼던 순간부터 기다려온 일이었다. 편집 회의가 이루어지는 데스크 중앙에 앉아 1면과 2면에 다루어질 기사를 가름하고, 각 부서가 수집해 온 아이템들의 시의성과 적절성을 따져보며 학보의 방향과 기조를 결정짓는 사람. 그 자리에 오르고 싶어 어느 여름엔 똑바로 걸어도 탈진 할 것 같은 국토대장정에 따라가 뒷걸음질로 사진을 찍으며 취재 기사를 썼고, 반값등록금 시위가 한창일 때에는 생애 처음으로 물대포를 맞은 뒤 행여 사진이 날아갈까 봉지로 감싼 메모리카드를 가방 속 깊숙한 곳에 챙겨넣으며 펑펑 울기도 했다. 그런 마음으로 기다려온 편집장 자리에 오르다니! 내 이름 석자가 찍힌 신문이 처음 나왔을 때에는 벅찬 마음을 숨길 길이 없어 몰래 몇 십부를 챙겨 여기저기에 뿌리기도 했다.


하지만 학보사 편집장은 결코 녹록한 자리가 아니었다. 무릇 사회가 그렇듯 대학이라는 작은 사회 안에서도 수많은 의견과 주장, 가치들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었고, 지난 2년 간의 기자 생활을 통해 어느정도 알고 있었다고 생각했지만 그동안 내가 봐온 것은 새발의 피였다. 학보의 편집인이 총장인 상황에서 주간교수는 마냥 학생기자의 편이 되어주지 않았고, 정기자일 때는 가족보다 가까웠던 동기 혹은 후배들과의 마찰이 잦아졌다. 물론 모든 인생이 정치적 선택의 연속이라지만, 이것은 내가 살면서 처음으로 맞이한 '찐' 정치적 사달이었다.


역대급 사건이 터지고 우여곡절 끝에 학보가 발행되던 어느 월요일, 모든 학생기자들이 평가회의를 마치고 돌아간 학보사 사무실에 나혼자 덩그러니 앉아있었던 적이 있다. 너무 진이 빠져 집에 갈 힘도 없었던 날이었다. 교정 중앙의 넓은 잔디밭이 훤히 내다보이는 창가에 의자를 끌고가 앉아 있다가, 적막함이 싫어 사무실 어딘가에 있던 이름 모를 씨디를 재생시켰다. 곡명은 Ryuichi Sakamoto의 ‘The Last Emperor’였다. 아, 그 노래를 들으며 느꼈던 그 때의 참혹함과 괴로움을 어찌 잊을 수 있을까. 이제는 꼴도 보기 싫은 갱지 더미 사이로 이름 모를 연주자의 연주를 들으며 한참을 괴로운 마음으로 앉아 있었다. 누군가에게 미움받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는 나인데, 편집장이 된 후 모든 사람이 나를 미워하는 듯한 마음마저 들어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기도 했다.


바로 그 음악. 그때 사무실에서 괴로운 마음으로 들었던 음악을 시간이 지나 우연히 다시 듣게 된 날이 있었다. 무심코 음원 사이트의 추천 리스트를 재생해놓았다가 음악이 흘러나왔는데, 웅장한 전주가 흘러나오는 바로 그 순간 시공간을 초월해 정말 딱 그 사무실에 다시 놓여진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취직 후 유난히 지치고 힘들었던 퇴근길에 조금 더 어렸을 때의 괴로운 나를 마주치는 심정이란. 오묘했다.


그러다가 문득 그 시절 내가 썼던 글이 궁금해졌다. 학보사 사이트에 들어가 내 이름 석자를 검색하자 수십 페이지에 달하는 글들이 와르르 쏟아졌다. 수습기자일 때 썼던 피처기사나 정기자가 된 뒤의 첫 르포기사뿐만 아니라 편집장일 때 썼던 칼럼까지 다양한 글들이 빼곡히 있었다. 수 년전에 내가 쓴 글을 다시 읽다는 게 조금 민망하기도 했지만 그보다 앞선 감정은 ‘아, 나 진짜 열심히 했었구나’하는 자부심이었다. 괴로움에 몸부림칠 지언정 도망치지 않았고, 동기들이 너무 야속해 그냥 확 나가버렸으면 싶었으면서도 마지막 조판을 마치고서는 글썽이는 눈으로 벅찬 마음을 나누기도 했다.(지금은 제일 친한 친구들이 되어 모임계도 열심히 하고 있다.)


우연히 다시 마주한 뒤로 Ryuichi Sakamoto는 나의 최애 아티스트가 되었다. 차분하게 생각을 정리하고 싶을 때나 유독 에너지가 달리는 날 그의 연주를 듣곤 한다. 그렇게 연주를 듣다 보면 많이 부족하고 어설펐던 그 시절의 나를 가만히 위로해주고 싶어지지만, 그럴 수 없기에. 오늘의 미숙함과 후회를 부러 멀리멀리 흘려보내고 가벼운 마음으로 이어폰을 꽂으려 노력한다. 또 어떤 음악이 의식하지 못 한 사이 나의 성장을 함께 기억해줄 것을 기대하는 마음으로.

매거진의 이전글 분명한 기억인데 없었던 일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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