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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선 Jul 01. 2020

모두 비워낸 자리엔 취향이 남았다.

다 버리고 나서 비로소 알게 된 사실

ⓒ소선


본가로 돌아오면서 다시금 길어진 통근 시간을 견디려면 좀 더 머물고 싶은 방이 필요했다. 돌아오고 싶고, 하루 종일 시간을 보내더라도 무료하지 않은 그런 공간. 그래서 방을 싹 갈아엎었다.


버려야지 싶다가도 매년 끈질긴 스토리텔링 끝에 살아남았던 옷가지들이 의류수거함 하나를 가득 채울 만큼 쏟아졌다. 적독가처럼 사기만 하고 읽지 않았던 책들도 성심껏 골라 팔아버릴 것과 이번엔 꼭 읽어야지 하는 것들을 구분했다. 땀을 뻘뻘 흘리며 쓰레기 더미를 넘어 다니는 와중에 초등학교 6학년 때 친구로부터 받았던 편지나 군대 가있던 대학 동기가 써준 편지에 잠시 한 눈을 팔기도 했으나, 이내 잘 챙겨서 예쁜 상자에 넣어두었다. 입주 당시 기본 옵션으로 제공되었던 서랍장도 과감히 버렸다. 새로운 서랍장을 사기에는 너무 멀쩡해서 방 한편을 내주었지만 내 취향이 전혀 아닌 가구였다.


줄잡아 여섯 시간을 버릴 것과 남길 것을 구분하는데 매진했다. 마침내 청소가 끝나고 미련이 덕지덕지 묻어 있던 온갖 잡동사니들이 물러난 자리에는 냉정한 심사를 거쳐 살아남은 물건들만이 남아있었다. 누구보다 빠르게 읽고 싶어 서점으로 달려가 집어 온 신간부터 아트마켓에서 설레는 마음으로 집어 들었던 포스터, 술 취한 어느 밤 동생과 걸어가며 찍힌 뒷모습의 사진 같은 것들이었다. 그중 몇몇은 숱한 물건에 밀려 먼지 속에서 발견되기도 했다.


물건에 마음을 뺏기는 역치가 워낙 낮아 온갖 물건을 사모았는데, 그러는 사이 진짜 온 마음을 주고 싶은 물건들은 빛이 바래고 있었다는 생각에 이르자 괜히 아쉽다가 아까운 마음마저 들었다.


땀에 전 몸을 씻어내고 흡족한 마음으로 정리된 방을 둘러보다가, 이 일련의 과정들이 요즘의 내 삶과 참 비슷하다는 생각을 했다. 사람과 사랑, 인정과 기대를 꾹꾹 눌러 담기만 하다가 자의 반 타의 반으로 하나 둘 비워내는 과정을 거치는 요즘, 내가 진짜 마음을 뺏기는 것들에 대해 생각했다. 내가 정말 좋아했던 것, 내가 정말 사랑하고 싶은 것들은 모두 비워내고 나서야 선명하게 드러났다.


아직 자리가 비어있는 선반은 아주 신중한 마음으로 채워나갈 것이다. 사랑해마지 않은 것들을 잔뜩 음미하고 의미를 곱씹어보다가 기꺼이 자리를 내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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