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Ellis Feb 23. 2024

푸바오, 정, 이별

이 또한 펫로스

에버랜드 판다 푸바오가 올봄 중국으로 떠난다.

바오 가족이 지금처럼 인기를 끌기 전부터 이들 가족에 애착을 느꼈던지라, 비록 실물영접 한 번 못해본 라이트한 랜선 애착에 불과할지라도, 떠날 때가 가까워올수록 슬픔과 상실감을 느낀다.


이별은 처음부터 기본 전제였다.   

중국은 자기네 나라의 보호종인 판다를 타국에 '대여'했고, 성 성숙기가 도래한 푸바오는 짝짓기를 해야 할 때가 왔고, '계약'되었던 기간에 따라 '반환'이 되는 것이 모두가 처음부터 알고 있던 순서다.  

이게 다 푸바오를 위한 일이라고들 한다. 원래 그들이 살았어야 할 땅으로 돌아가, 수컷을 만나 새끼를 낳고 판다의 삶을 살아가는 것.

얼핏 보기엔 맞는 말이다. 동물이 본능대로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것.  


그러나 이 그럴싸하게 포장한 취지는 애초 그 시작과 전제가 대단히 잘못되었다.

판다다운 자연스러운 삶을 살려면, 판다가 자신의 힘으로는 가지 못했을 먼 땅이나 다른 대륙들에 애초에 갈 일도 없었어야 한다. 비행기를 탈 일이 처음부터 없었어야 했다.  

동물원의 모든 동물들이 그러하듯.


그러므로 이 모든 게 푸바오를 일한 일이야, 라고 하는 것은 지금의 상황에서야 맞는 말일지라도, 궁극적으로는 훗날 악법으로 재평가될 '대여 시스템'을 만든 중국의 가스라이팅이나 다름없다.

 



근본적인 질문을 해본다.

왜 어떤 동물들은 인간을 위한 무언가의 수단이 되어 선물로써 거래되거나 교환되는지,

살아있는 동물을 일정 기간 '대여' 후 '반환'한다는 형식은 누구의 뇌에서 나온 가학적인 발상인 건지,     

멸종되어도 되는 동물과 그러면 안 되는 동물의 기준은 무엇인지(그 기준 중 하나는 아마도, '귀여움'?),

특정 종의 멸종을 막는답시고 하는 모든 행위들과 인간의 개입과 시스템은 취지가 옳으니 과정도 옳다고 할 수 있는 것인지,

태어난 순간부터 타 종족인 인간들의 극진한 돌봄을 받는 동시에 인간들의 구경거리로 '전시'되어 살다가, 어느 날 갑자기 또 다른 웬 낯선 땅에 덩그러니 내던져져 새로운 낯선 인간들의 돌봄과 구경을 당하는 과정에서의 '적응'을 왜 동물이 감당해야 하는지,

어느 나라의 국경 내의 어느 지역에 서식한다는 이유로 이 동물이 그 나라의 '소유'라는 발상은 대체 어디서 나온 것인지.


하나부터 열까지 도무지 납득되지 않는 것들뿐이라, 이 이별은 개운치 않은 감정의 찌꺼기를 남긴다.

야생에서 살다 어미로부터 독립할 시기가 되었다 할지라도, 독립하는 동물이 비행기를 타고 낯선 땅으로 날아가 뚝 떨어지는 일은 자연스러움과는 거리가 멀다. 정 붙인 입양아를 또 다른 위탁기관에 보내는 것 같은, 이리저리 보내지는 당사자의 의지나 바람은 애초에 고려될 여지조차 없는, 다분히 인위적인 이별이기에 이 이별로 인해 겪는 감정은 단순히 상실감이 아닌 것이다.


판다는 인간 아동 정도의 지능이라고 한다. 지능이 매우 높고 감정이 풍부하며 인간 아기와 행동과 표정이 놀랍도록 유사해 인간으로부터 높은 수준의 애착의 감정을 유발하는 판다라는 동물은 어떤 점에서는 보호라는 이름의 침해를 가장 많이 받는 동물 중 하나일지도 모른다.   

개와 고양이 같은 반려동물이, 가축들이, 유인원이, 코끼리가, 돌고래와 고래류가 그러하듯, 어떤 동물이 인간 종족의 관심이나 관여를 받는 순간 그들은 끔찍한 위험에 처한다. 인간은 높은 지능을 이용해 타 종족을 이용하고 버리는 행위를 역사상 멈춘 적이 없기 때문이다. 심지어 이 모든 일에 보호와 사랑이라는 이름을 붙여 자기합리화할 만큼 교활한 것이 인간이다.       

인간이 판다에게 한 일이 결국 이런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님을 부정할 수 있을까.


중국의 보호 노력으로 판다의 개체수는 많이 늘었다고 한다. 하지만 인간으로 인해 서식지를 잃은 판다를 붙잡아다 수십 년간 인위적인 교배와 인공수정과 강제임신을 불사했으니 숫자가 나타내는 결과 자체에 지지를 보내고픈 마음은 들지 않는다.     

'종 복원' 행위의 정당성을 외치는 이들은 이상하게도 하나에만 집착한다. 어떤 종족을 '복원'하고 싶다면 그들 종족이 살던 '땅'부터 복원해 내놓아야 하거늘.  

판다의 행복을 바란다면 그들이 살던 땅부터 되살려 그대로 돌려주고, 아무리 귀엽더라도 그들로부터 멀찍이 물러나주어야 한다. 지리산 반달곰의 개체수 증가를 원한다면 등산로부터 폐쇄하고 전국 산속의 모든 덫과 올무를 완벽하게 제거하고 산과 산을 가로지르는 도로들도 폐쇄하고 인간이 지리산에서 최대한 물러나야 한다. 문제의 핵심은 '숫자'가 아니다. 어떤 종의 숫자가 늘어나거나 줄어들어 생태계가 망가지는 근본 원인은 다른 그 무엇도 아닌 인간이기 때문에.  


때로 어떤 것들은, 엎질러진 물이다. 물을 쓸어 담는다고 하는 일들이 꼭 옳은 것은 아니다.    




엎질러진 물인 상황에서 그나마 바랄 수 있는 것을 바랄 뿐이다.

푸바오가 행복하기를. 

굳이 인간적인 감정을 과하게 투영할 일도 아니다. 한동안은 놀라고 불안해하겠지만, 똑똑한 동물인 만큼 이내 낯선 곳에서 적응하여 맛있게 대나무를 먹으며 지낼 날이 올 것이다. 


다만, 탄생부터 성장까지 유사육아의 감정으로 이 동물을 내내 바라보며 정을 붙였던 사람들이라면 이 이별이 남기는 슬픔과 아쉬움을 감당해야 할 것이다. 애착의 감정을 느꼈던 생명체와 이별하는 상황이라는 점에서 이 또한 펫로스의 종류가 아닐 수 없다. (이 모든 것을 감당하고 책임져온 사육사님들이 오로지 감사와 응원만을 많이 받을 수 있기를.)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건, 보호라는 명목 하에 푸바오가 평생 감당해야 할 그 모든 것들에 대해, 그것이 무엇이든, 인간은 미안해해야 한다는 점이다.   




조금 더 바랄 수 있다면, 언젠가 훗날에는 이런 인위적이고 부자연스러운 이별 같은 일은 애초에 일어나지 않는 세상이 오기를 기원한다.

한국땅에서는 판다와 사자와 미어캣을 볼 수 없게 되기를.

보호와 치료의 목적 외에 전시 목적의 동물원이 지구상에서 사라지는 세상이 미래에는 오기를.

판다라는 동물은 아시아대륙 중원의 깊은 대나무숲 속에서 운 좋아야 접할 수 있을 뿐인, 신비로운 전설 속의 동물로 대를 이어 평화롭게 살아가기를.      

그 어떤 생명체도 대여나, 반환이나, 교환의 용도로 쓰이지 않기를,

그처럼 모든 동물들이 동물원에서 해방되는 날이 오기를.   


작가의 이전글 나를, 그런 식으로, 보내지 마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