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기와 이별한 후 꾸역꾸역 살았다. 한국상담심리학회 2급 자격증을 땄고, 반려동물 상실에 대한 논문으로 심리학 석사학위를 취득했고, 학술지 논문 게재가 통과되었고, 사설 상담센터 몇 군데에서 심리상담을 하는 고학력 저소득 감정노동자로 살게 됐다.
한동안 건강이 안 좋아지기만 했었고, 그나마 요즘엔 일상생활이 가능할 정도는 되었고, 그해 말에 태어난 조카가 건강히 자라 만 5세가 지났고, 양친은 칠십 대 중반에서 후반이 되어가고, 늘 토실 듬직 발랄했던 둘째 고양이 보리가 열네 살 반, 애기가 떠났을 때의 나이에 가까워져 간다.
이별 후 1500일 무렵까지 간간히 혼자만의 애도일지를 넋두리처럼 썼었고, 그즈음 펫로스 집단상담에 참여했었고, 브런치에 애기와 펫로스에 대한 생각을 글로 썼고, 우연히 뜻 맞는 전문가들과 펫로스 애도연구회를 결성해 일반인 대상으로 매달 펫로스 자조모임을 운영한다.
그래서 나는,
6년 전의 아픔을 극복하고 남겨진 삶 속에서 타인들을 도우며 동물과 인간과 모든 생명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치유의 여정을 걷게 되었,
...
,다고 할 수 있을까.
그렇다고 말해야 할지도 모른다. 얼추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나는 안다.
내 마음 가장 깊은 곳에 깊이를 가늠할 수 없이 뻥 뚫려버린, 하도 거대해 메울 수조차 없는 씽크홀 같은 슬픔의 나락이 존재해,
그 깊은 어둠 속에서 나는 2018년 4월 17일을 죽을 때까지 수천수만 번 되풀이해 살며
울고 또 울고 있다는 것을.
이것이 내 삶의 본질이자 진짜 내 얼굴임을.
한 고양이와 5392일을 함께 했었다.
굵은 붓에 먹물을 듬뿍 묻혀 그림을 그리려다 그만 실수로 한 방울 똑 떨어뜨린 것 같은 검정 무늬가 코 옆에 있던, 길 위의 흔해빠진 길고양이로 살다 갔을 수도 있었던, 어릴 땐 입질이 심해 벽지며 장판이며 내 손목이며 정강이며 죄다 할퀴고 뜯어 남아나질 않게 만들었던, 예민하고 겁 많았던, 이름도 지어주지 않았다가 얼결에 '애기'라고 부르게 되었던 한 마리의 고양이가,
처음부터 어쩐 일인지 이상하리만치 애틋하고 또 애틋했었다.
한때는 요 작은 짐승이 꼭 내 분신만 같아 나 자신을 거울처럼 보는 것 같기도 했었고, 그러다 언제부턴간 짐승의 육신으로 내게 온 내 아이임이 지극히 당연해졌었다.
내 전체 삶 중에서 5392일간 곁에 있었던 이 고양이는, 그러나 5393일째부터 내 삶 전체를 점령하게 된다.
이것을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나.
전생에 나는 네게 큰 죄를 지었던 걸까.
대체 어떤 카르마란 말인가.
그 어떤 해석으로도 설명으로도 나는 이 깊고 깊은 애착을, 이 묘한 '묘연'을 납득하지 못한다.
다만 느낄 뿐이다. 알 뿐이다.
이 사랑이 너무나 깊어, 그리하여 이 이별이 너무나 고통스러워,
이 감정을 세상 그 누구도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을 것임을.
2018. 4. 17.
6년이 지나며 나는 무엇을 겪었나. 내 감정은 어떻게 달라졌나.
나의 죄책감은,
그 온도는 끓는점 아래로 내려갔으되 차고 냉정하고 명료해졌다.
네가 밥을 잘 먹지 않았을 때 바로 병원에 데려갔어야 했어. 네가 생의 끈을 놓으려 했을 때 더 이상 붙잡고 늘어지지 말았어야 했어.
첫 고양이라, 첫 이별이라, 모든 게 처음이라 어쩔 줄 몰랐다는 변명은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나에겐 책임이 있었다. 그런데 내 고양이는 너무나 아팠다. 겪어서는 안 될 일을 겪었다.
그 책임을 죽을 때까지 져야 한다, 나는.
나의 사랑과 그리움은,
따뜻한 지역의 바다다.
마르지 않고, 끝 간 데 없이 펼쳐져 있다.
지금도 생생한 내 품 안의 보드라운 털과 체온과 말랑말랑함은, 천천히 깜빡거리던 말간 연겨자색 눈동자는, 할 말 많던 가냘픈 목소리는, 이젠 기억이 아니라 내 몸이다.
그러므로 달라진 것은 어쩌면 별로 없을 것이다.
창자를 긁어내는 것 같던 고통이 한풀 꺾이고 지나간 자리에서, 나는 내 어여쁜 고양이를 꼭 끌어안고 2018년 4월 17일을 또 하루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