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려동물 추모여행 in 제주 (2) 미안해하다

두 번째 펫로스, 긴 애도의 시작

by 묘언

어느 날엔 새파란 맑은 바다를, 어느 날엔 비 오는 바다를 종일 쳐다봤다.

수영복과 비치타월과 쪼리, 패들보트, 아시아인들과 백인들, 가족, 재잘거리는 외국어 소리들, 뛰어다니는 아이들, 여름 같은 바닷바람, 파도, 푸른색, 수평선.

날씨를 완전히 잘못짚은 칙칙한 긴팔옷차림의 내가 여기에 슬쩍 끼어들어도 되나 싶은 풍경이었지만, 아무도 다른 이를 신경 쓰지 않는 휴양지 바닷가에서 모처럼 마음이 편했다. 그 속에서 보리를 생각했다.


보리와의 마지막 3일에 대한 기억을 꺼내는 것을 그전까지 사실은 의식적으로 미루고 있었다. 미루고 있었던 것을 끄집어내는 것은 힘든 일이었으나, 필요한 일이기도 했다.




노령묘의 급성간염은 대개 가망이 없다고 했다. 생의 마지막 시간을 병원에서 수액줄 주렁주렁 찬 채 그저 대증요법으로 며칠 더 연명이나 하다 떠나게 할 순 없었다. 7년 전 애기를 그렇게 보낸 게 한이 되었는데 보리마저 그렇게 보낼 수 없다 생각했다.

나는 마음의 준비를 해야 했고 결정을 해야 했다. 아이의 마지막에 보호자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 수의사의 설명까지 들으면서 기이한 비현실감이 들었으나, 정신 차려야 했다. 오래전부터 마음의 준비를 하던 이별이 닥쳐왔다. 나는 보리를 잘 보내주고 싶었다. 그렇게 보리를 집으로 데려왔다.


제주 바다를 멍하니 바라보며 그 시간들을 생각했다. 죽기 전 3박 4일 동안 온종일 함께 있어서 행복했고, 고통스러워하는 아이를 보고만 있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게 없어 끔찍했던 그날들을.


20251003_104446.jpg




그러나 시간이 지나도 절대 알 수 없는 게 있다. 자신의 동물을 사랑한 사람들이 평생 반복 리플레이하고 또 해봐도 정답을 절대 알 수 없는 단 하나의 질문.

그때 나는 어떻게 했어야 했나.


폐에 물이 차기 시작했을 것이기 때문에 보리는 점점 고통스러워했다. 잠들지도 못하고 내내 반쯤 뜨고 있었던 눈, 한나절씩 지날수록 가빠지는 헐떡임, 그 와중에 내가 쓰다듬어주고 다리 사이에 꼭 끼고 온몸을 기대게 하면 그 고통스러운 헐떡임 속에 골골송 소리가 섞이던 것을, 작은 몸뚱이에서 내 몸으로 전해져 오던 울림을 기억한다.


나는 어떻게 했어야 했나.

‘차가운 병원에서 눈 감게 하지 않겠다.’라는, 어쩌면 어디까지나 나 자신만을 위한 목표를 달성하려고 아이를 그대로 둔 것은 아닐까. 익숙한 살던 곳에서, 보호자 품에서 눈 감게 하는 게 더 나을 것이라는 것 또한 엄연히 인간의 해석 아니었을까. 내 고양이가 매 순간 아파하고, 몸을 못 가누고, 주저앉은 채 오줌을 펑 싸고, 물을 마시고 싶어 하면서도 마시질 못해 물그릇 앞에 고개를 괸 채 주저앉아있고, 축 늘어진 채 헐떡이며 고통과 싸우고 있을 때, 해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는 말은 이제 와서는 참 이기적인 핑계 아니었을까.


나는 정말 어떻게 했었어야 했나.

마지막 사흘. 이 시간이 영영 끝나지 않기를 바라는 것과 정확히 같은 강도로, 이 시간이 얼른 끝나기를 바라던 시간. 밤에 잠도 못 들 정도로 매 순간 조마조마 마음 졸이면서도 보리를 바라보고 만질 수 있는 사흘간의 호사를 나는 누렸으면서. 차라리 병원에서 그냥 보내줄걸. 품에 안고 목소리 들려주면서 그냥 편하게 해 줄걸. 결국 내 바람대로 보리는 집에서 내내 내 모습을 보고 내 손길을 느끼고 내 목소리를 들으며 죽어갔지만, 그러는 동안 매 순간 너무 힘들었을 텐데.


20251003_165938.jpg


내 곁에서 좀 더 오래 건강하게 살길 바랐던 것 또한 어쩌면 이기적인 욕심 아니었을까.

보리의 노년은 어땠나. 통유리창이 없어 바깥 풍경도 잘 보이지 않고 햇볕도 기껏해야 오전에만 들뿐인 누추한 집에서 생의 마지막 시간을 보내는 동안, 식욕촉진제로 태엽 감듯 목숨을 이어가면서, 종일 자는 것 외에 할 것도 볼 것도 없이 긴 하루하루를 보내는 너의 노년이 행복하지 않았을까 봐 두렵고 미안하다. 의학의 힘으로 동물의 수명을 몇 년 더 연장시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었나.


7년 전 애기에 대한 죄책감이 칼에 찔린 외상 같다면, 보리에 대한 죄책감은 뭉툭한 몽둥이에 세게 맞은 것처럼 뭉근하고 은근한 통증이 길게 남는다.


20250814_145327.jpg 2025.8.14. 무지개다리 건너기 하루 전의 보리
20250814_193701.jpg 2025.8.14. 무지개다리 건너 기 하루 전, 마지막 저녁


멀리 수평선과 맞닿은 바다 끝이 눈물에 일렁이곤 했다.

덮어두었던 마음을 꺼내놓고 보니 참담했다. 지질하고 이기적이고 부끄러웠다. 어리석게 집착하고, 보고 싶은 것만 보고, 인간 위주로 해석하고 판단했으면서, 그런 걸 사랑이라고 스스로를 속였던 거였나. 나의 사랑과 애착은 결국 ‘나 좋자는 짓’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던 건 아닌가.




나는 2003년부터 2025년까지 고양이와 살았다. 보리의 죽음으로 이 시절이 완전히 끝났다. 모든 게 갑자기 사라졌다. 그러자 애착 대상이 사라질 때 인간의 뇌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겪었고, 겪고 있다. 그게 다다.


몇 년 후엔 나도 사라질 것이다. 모든 기억도, 몸뚱이도, 내가 소유하던 유형의 물건들과 무형의 디지털 흔적들도 전부 다.

그냥 그게 다인 것이다. 모든 건 사라지고 폐기된다. 소멸의 공포와 거대한 공허감에 집어삼켜지지 않으려고 괜찮은 척하는 것일 뿐, 있었던 것은 사라지고 애쓴 것은 결실도 성취도 보람도 인정받음도 없이 무화되기를 반복 또 반복하는 내 삶의 민낯을 직시하면 사실은 무서운 것이다.


보리가 떠나고 나서 생긴 이 거대한 구멍은, 사실은 새로 생긴 게 아니라 원래 계속 거기 있었던 것이다. 애기와 보리는 그 구멍을 임시로 메워준 존재들이었다. 그래서 내가 살 수 있었다. 우주가 곱게 빚어 내게 던져준 선물이자, 나와 같은 성분으로 구성된 분신, 혹은 나와 똑같은 먼지. 그 덕분에 내가 지금껏 숨 쉬었다.

그리고 예정된 순서가 왔다. 혼자 남겨지는 것.



20251004_094402.jpg


나는 어떻게 했었어야 했나.

정답은 영원히 알 수 없다.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진심을 다해 바라는 것이다.

인연이든 업보든, 뭐라 이름 붙이든, 이 끈에서 자유로워져 영영 떠나라고. 부디 나를 돌아보지 말라고. 편안해지라고.

나는 어리석고 이기적일지언정 끝까지 너희를 그리워하고 떠올리며 남은 생을 마치겠다고. 이 깊은 허무를 슬픔을 잘근잘근 씹으며 그래도 마저 살다 가겠다고.




20250930_181109.jpg


집착을 내려놓으라는 말이 사랑하지 말라는 뜻은 아닐 것이다.

다만 집착과 욕심으로 원하는 것을 다 얻을 수 있으리라는 환상에서 스스로를 풀려나게 하라는 뜻인지도 모르겠다.

그게 제일 어려운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