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최초로 브런치에 글을 바로 적어 보기로 한다. 그 전에는 어디엔가 적어 둔 글을 다시 한번 다듬어서 브런치에 올렸다.
그러나 이리 하나 저리 하나, 내 글의 독자는 많지 않으니, 내 딴에는 정성을 들인다고 하는 행동에 사실 큰 의미는 없다.
살짝 데친 다음에 삶든지, 그냥 삶든지, 그 식재료 처리에 미묘한 식감 차이를 아는 사람은 일부분이다. 게다가 미묘하던, 아니던 일단 식탁에 초대받은 사람, 또는 식탁에 찾아오는 사람이 많아야 그 미묘함을 알 것이다.
오늘은 여느 토요일처럼 자전거를 끌고 집을 나섰다. 자전거를 탈 때는 멀리 있는 앞을 보는 것 같지만, 대부분의 시간은 내 몇 미터 바로 앞에 땅을 본다. 노면에 있는 울퉁불퉁한 융기를 살짝씩 피하기도 하고, 단차가 심한 길을 건널 때는 엉덩이를 살짝씩 들어야 할 때도 있다. 작은 물웅덩이는 우아하게 작은 회전을 하면서 지나갈 때도 있다.
그런 와중에 눈에 띄면 신경 쓰이는 것들이 있다. 강변을 따라 달리다 보면 의외로 동물과 곤충들이 땅 위로 많이 다닌다. 가장 보고 놀란 것은 뱀이다. 주행 중에 멀리서 굵고 누런 끈 같은 것이 땅 위에 놓여 있는 것을 보았는데 점점 가까이 다가가니 뱀이었다. 그때 찰나 같은 순간에 두 맘이 들었다. 평소에 뱀을 미워하고, 또 뱀 정도는 미워해도 되지 않겠느냐는 생각을 가진 나는 내 자전거 앞 뒤 바퀴로 후투툭 뱀을 타고 넘어가 버릴 생각을 했었다. 나는 아담과 하와를 꼬신 뱀을 매우 우발적인 듯 응징할 기회가 온 것이다. 그러면 기어가던 인류의 적, 뱀은 후다닥 몸을 웅크리고, 땅에서 튀어 오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순간 후다닥 튀어 오른 뱀이 자전거 체인에 감기거나, 뒷바퀴에 달라붙어서 내 발목을 무는 것이 상상이 되었다. 아니 뱀이 의도적으로 물진 않는다 할지라도, 우발적으로 그가 벌린 아가리의 앞니가 내 연약한 발목에 생채기를 낼지도 모른다. 그러면 나는 자전거를 달리며 발목부터 서서히 퍼져가는 뱀의 맹독의 의해 의식을 읽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뱀을 재빠르게 피해 가기로 하고, 핸들을 날렵하게 돌려서 뱀을 피해 계속 페달을 굴려 전진했다. 이게 아주 오랫동안 일어난 사고 과정 같지만 그렇지는 않다. 아마 뱀을 발견하고 아마 2초 정도 내 맘속에서 든 생각들이다.
뱀과 달리 맘이 쓰이는 동물은 지렁이이다. 아침에 나가다 보면, 길을 건너다가 길 위에서 죽은 지렁이들을 마주친다. 지렁이는 뇌가 없다. 그러나 방향을 구분하고, 습도 등을 구분하는 센서는 있는 것 같다. 지렁이가 자신이 목표한 특정 방향으로 꾸준히 전진하다가 길 위에서 죽은 것을 목격한다. 강변에 놓인 자전거길 또는 산책로의 좌측에도 식물이 자라는 축축한 땅이 있고, 우측에도 식물이 자라는 땅이 있다. 지렁이는 이쪽 편 땅에서 잘 살다가 갑자기 무슨 생각이 들어, 길을 가로질러 반대편 땅으로 향한 것일까? 그 자전거길과 산책로는 인간이 만든 아스팔트, 또는 녹색 우레탄으로 지어져 있다. 연약한 지렁이는 그 여행을 떠났다가 땅 속으로 기어들어가 숨을 수도 없다. 흙과 달리 아스팔트와 녹색 우레탄 위에는 습기가 없어서, 길을 건너다가 몸이 금방 건조해지고, 앞으로 더 전진하지 못하고 길 위에서 죽고 만다. 죽은 지 좀 지나면 개미들이나 다른 곤충들이 몰려온다. 굳이 자기가 머물러 있던 땅에 계속 살아도 되는데, 지렁이는 왜 이런 위험한 전진을 했을까? 그는 반대편 초지로 굳이 나아가야 했을까? 그는 더 많은 먹이를 원했을까? 아니면 반대편 땅마저도 비옥하게 할 사명이나 삶의 목적 같은 것이 있었던 것일까? 나는 지렁이를 조롱하지 않는다. 사실은 경외심을 가지고 존경하기도 한다. 나는 한 번도 아스팔트 길, 또는 우레텐 길 건너에 있는 새로운 땅으로 나아갈 용기나 계획 같은 걸 품어보지도 못했다. 나보다 지렁이는 더 훌륭한 존재이다. 자기에게 부여된 본성을 충실히 살았고, 용기 있게 죽었다. 자전거를 타다가, 보행로 횡단의 대장정을 막 나선 듯한 지렁이를 마주치기도 한다. 그럴 때 나는 자전거에서 내려서 근처에 부러진 나무 꼬챙이를 들고 와, 지렁이를 원래의 땅으로 밀어서 돌려보낸다. 나는 소리친다. ‘위험해, 그냥 원래 살던 곳에 있어… 길 건너려다가 그냥 말라죽어.’ 꼬챙이로 여러 번 지렁이를 밀고 결국 그의 출발점으로 돌려보내고 나는 다시 내 갈 길을 갔었다.
그렇게 돌아간 지렁이 중에 일부는 자신의 땅 속에서 행복하게 더 잘 살았을 것이고, 일부는 다시 대장정을 나서서 길 위에서 말라죽었을 것이다. 그리고 아주 일부는 결국 그 아스팔트 길을 넘어서 반대편에 이르러 거기서 땅을 먹으며, 새로운 곳에서 살아갈 것이다. 이 도시에 강변을 따라 자전거길과 산책로가 들어선 것은 약 30년 정도가 되는 것 같다. 그러나 아스팔트 길 이쪽이든 저쪽이든 똑같이 생긴 지렁이들이 계속 나타나는 것을 보면, 이들은 수십 년 동안 그 길을 넘나드는 걸 멈추지 않았던 것 같다. 범선이 등장하기 이전에 남태평양에 여러 섬들에 이미 원주민들이 뗏목만을 의지해서 상륙해서 작은 문명을 이루고 살고 있었던 것처럼, 지렁이들은 자신의 항해를 멈추지 않았다.
나는 죽음을 무릅쓰고 길을 떠난 지렁이를 안쓰럽게 여기기도 하고, 경외하기도 한다. 횡단에 성공한 지렁이는 지금 내 눈에만 안 보일 뿐이지, 새로운 세계에서 잘 살고 있을 것이다.
그 밖에 아주 작은 개미나, 쥐며느리 같은 곤충들이 걸어가는 것도 본다. 이들도 어떤 방향을 향해서 나아간다. 취득한 먹이를 본거지로 옮기기도 하고, 아니면 두고 온 자신의 다른 개체들에게 돌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나는 애써 나아가고 있는 이들을 죽이지 않기 위해 자전거로 전진할 때 앞을 비교적 유심히 살핀다. 나도 그들처럼 어디론가 나아가고, 다시 거기서 나의 본거지로 돌아오는 행동을 한다.
인간은 생각을 하고, 동물은 생각을 안 하는 것처럼 여기는데 과연 그럴까 싶다. 난 길 위에 놓인 작은 곤충, 뱀, 지렁이를 보면 저들도 나름 생각을 하고 살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 생각은 우리가 하는 생각과 차원과 방식은 다를 것이다. 우리는 뇌에 입출력되는 전기 신호, 머릿속에서 재현되는 가상의 비주얼 정보, 그리고 언어 등을 도구로 사용해서 생각하지만, 그들은 그들의 피부, 깃털, 그들의 감각기 등으로 생각을 할 것이다.
배를 타고 섬으로 항할 때, 새우깡을 들고 있으면 갈매기들이 와서 낚아채고 간다. 그런데 그 갈매기들이 하는 행동과 움직이는 패턴이 매우 조직적이고 비슷하다. 이들은 생각을 하고 행동을 맞춰서 움직이고 있다. 도시 비둘기들은 몰려 있지만 따로 있다. 그러나 순식간에 무리가 함께 비행하기도 하고, 함께 원을 그리며 땅에 착륙하기도 한다. 우리가 각자의 스마트폰을 보면서, 서로가 비슷한 행동을 하고 비슷하게 반응을 하는 것은 고등적인 사고 과정의 결과이고, 비둘기나 다른 동물들이 하는 것은 그냥 본능의 발현일까?
오늘은 자전거를 타고 가다가 오리를 보았다. 오리는 인도 쪽에서 내려왔다. 그리곤 자전거 길을 뒤뚱뒤뚱 걸어서 물 가까이 다가가려 했다. 오리는 통상 물 가까운 곳에 머물러야 했었다. 그런데 오늘은 왜 사람들이 걸어 내려오는 산책길 진입로 쪽에서 강변 쪽으로 내려오는 건지 알 수가 없다. 아마 이른 새벽에 인도나 민가 쪽에 뭔가 볼 일이 있어서였을 것이다. 나는 오리가 자전거 길을 건너 그의 목표지인 강 쪽으로 향하도록 내 자전거 속도를 약간 낮추었다. 나는 그 오리에게 물어보진 않았지만, 그 오리가 분명 무슨 생각이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리가 물 가까이에 있는 것은 본능이요, 민가 가까이 있는 것은 본능을 벗어난 착오인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오리가 물 가까이 있는 것도, 멀리 떨어진 곳으로 잠깐 가 있는 것도 그도 다 생각이 있어서 그리 한 것이다.
나는 때로 이편에 서야 한다 또는 저편에 서야 한다 생각을 한 적이 많았다. 이렇게 사는 게 정의롭다, 옳다, 바르다, 효율적이다라고 판단을 하고 행동을 한 적이 많았다. 그러고는 나중에 ‘너는 대체 생각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힐난을 들은 적도 있다. 나중에 반추를 해 보면, 내가 생각을 해서 한 행동이 실제로는 아무 생각 없이 한 행동인 적이 많았고, 다만 사고의 결과라고 스스로 주장을 하는 정도에 불과한 적도 많았다.
그러니 내가 이쪽에서 저쪽으로 건너가든 혹은 그 반대로 하든, 그것은 오리가 오늘 내 눈앞에서 한 것과 본질적으론 다르지 않다. 그 오리는 혹시 새로운 먹이가 있을까 하여 평소에 자주 가지 않던 곳으로 용기를 내어, 호기심을 가지고 가 본 것이다. 그건 인간이 돈을 더 벌거나,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거나, 새로운 사랑을 찾기 위해 평소 자기가 어슬렁거리지 않던 곳에 잠깐 용기를 내어 가 본 것과 뭐가 다를까?
굳이 다른 것이 있다면 인간은 스스로 사고를 통한 합리적 의사결정, 합리적 행동을 한다고 여기는 반면, 본질적으론 매우 유사한 행태를 한 오리는 나를 대충 쳐다보고는 그냥 제 갈길로 갔다는 것이다. 그 오리는 나에 대해서 생각이 있느니 없느니 그딴 생각 없이 물 쪽으로 그냥 간 것이다. 혹 생각 같은 것을 했다면, 나에 대해서가 아니라, 물가에서 자기가 곧 잡아먹을지도 모를 싱싱한 민물고기 한 마리 정도였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