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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은길벗 소로우 Apr 02. 2023

가장 행복했던 순간과 가장 힘들었던 순간


1.


과거 내가 근무하던 회사가 ‘시간선택제 채용’을 할 때의 이야기이다.

경력이 단절된 중, 장년 여성분들을 주 대상으로 해서, 하루에 4시간씩 근로할 분을 모집하는 것이었다.


어느 날 채용 면접에 면접위원으로 참여한 나는 면접위원석에 앉아서 첫 번째 지원자가 들어오기를 기다리며,

지원자가 제출한 자기소개서를 읽고 있었다.


자기소개서에, '가장 행복했던 순간과 가장 힘들었던 순간은?'이라는 질문이 있었는데,

나이 58세이신 1번 여성 지원자 분은 이렇게 쓰셨다.


‘이렇다 할 특별히 기억에 남는 일이 없습니다. 

한때의 희비도 시간이 지나서 생각해 보면 특별할 것이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멋졌다.

나이가 60이 되면 이렇게 초연할 수 있구나.

자신을 객관적으로, 관조적으로 볼 수 있구나.

거리를 두고 보는 그런 여유도 생기는구나.

한번 웃을 일도, 한번 울 일도, 사실은 특별한 일도 아니라는…



2.


문이 열리고 나이 지긋하시고 원숙한 가치관을 가지신 그 지원자 여성분이 들어왔다.

면접장에 입고 오기에는 다소 초라한 옷차림에,

그 얼굴에는 고생스럽게 살아온 수십 년의 흔적이 묻어 있었다.


그분은 30년 전에는 서울시 중구 무교동 인근에 좋은 대기업에서 전산실 직원으로 근무하셨다고 했다.

상업고등학교를 나왔지만, 전산이 좋아서 지원을 했고 전산 업무의 재미에 빠졌었다고 했다.


우리 면접위원 중에 한 명이 물었다.

“가장 행복했던 순간과 가장 힘들었던 순간이 정말 없으셨나요?’


내가 물어보고 싶은 질문이었다.

다소 드라이하긴 하지만, 어떻게 그런 원숙한 시각을 가지게 되셨을까…?


그분은 쭈뼛쭈뼛 잠시 머뭇거리다 말씀을 하셨다.

‘사실… 그게…. 지난 10년간은 정말…

전 결혼도 하지 않았고, 그래서 아이도 없고…

그러니깐 만나는 친구도 제한적이고… 그렇게 살았어요…

그런데 식구들한테마저 큰 문제가 생겨서…

그걸 정리한다고 10년 가까운 세월을 보냈고…


이제는 세월이 흘러서, 현재는 백화점에서 포장 일을 하고 있습니다…’


면접위원이 물었다.

‘그럼 왜 힘들었던 순간이 없다고 적으셨나요?”


“아 그게… 사실은 제가 그 순간들을 생각조차 하기 싫은 거예요.

거기에 그 기억들을 차마 적을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그냥 그렇게 적은 거예요…

죄송합니다…”


그분은 고개를 숙였다.


그리곤 이제 백화점 포장일을 그만두고 대기업에 다시 입사해 전산일을 배워서 새로이 인생을 살아보고 싶다고 하셨다…



3.


난 그분의 면접 평가란에 A를 입력했다가 B로 고쳤다.

그러나 그날의 면접 일과가 끝나고 모든 지원자의 면접이 다 끝난 후 다시 A로 고쳤다.

왜 그랬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난 A를 입력하고 입력버튼을 마우스로 클릭하면서 나 자신에게 속삭였다.

‘넌 온정주의자가 아니며, 그리고 이것은 온정주의 때문에 그러는 것이 아니다.”


과거의 상처를 다 잊어서 이제는 상처가 없다고 하는 사람들을 보면 조심해야 한다.

저들의 깊은 속에는 아무렇지 않은 척 애써 선언을 해서라도 견뎌내야 할 아픔이 아직 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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