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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미아 May 02. 2022

용의주도 택시 기사님

조심하세요.


저녁 8시. 너무 피곤해서 택시를 탔다.

기사님은 뒷모습으로 보아 대략 60대 아저씨였다.


“내비대로 갈까요?”


“아뇨, 여기서 그냥 좌회전해주세요.”


“아가씨 똑똑하시네요. 보통 손님들은 다 ‘내비대로 가주세요’ 하는데.”


“아, 전에 직진했다가 너무 돌아간 기억이 있어서요.”


“아가씨 평소에 똑똑하단 말 많이 듣죠?"


"..."


"택시 기사 일 오래 하면, 말 몇 마디, 목소리만 들어도 어떤 사람인지 다 알 수가 있어. 손님들이 나보고 점집 도사냬. 하도 잘 맞춰서.”


"아..."


“어두워서 얼굴 안 보여도, 아니 뭐 얼굴 볼 필요도 없어~ 아가씨는 목소리가. 아주 똘똘하잖아. 일 잘하고 아주 프로페셔널한 사람이야.”


“아이고 아닌데...”


“아나운서 같애. 착하고, 선하고.”


“아이고…”


갑작스레 휘몰아치는 과찬에 몸둘 바를 몰랐다. 그의 목소리엔 생기, 희망, 모종의 열의같은 것이 담겨 있었고, 나의 침묵으로 그에 찬물을 끼얹어 버리는 것이 가만히 듣고 있는 것보다 더 부담스럽게 느껴졌다.


“아가씨 같은 점잖은 손님만 있는 게 아냐. 이미 탈 때부터, 기사 꼬투리 잡으려고 작정한 손님들이 있어.”


“아, 그런가요.”


“내가 촉이 좋아서. 그런 사람들도 처음 말 한 두 마디면 느낌 딱 와. 말에 독이 서 있어.”


“좀 퉁명스러운 건가요?”

몹시 피로했다.


“아냐, 아냐. 퉁명스럽다기보담도 뭐랄까… 아주 신경질적이라고.”


“아휴. 그런 분들 만나면 너무 피곤하시죠.”


“그치. 어제도 그런 손님이 한 명 있었어.”


“아…”


“아가씨 같은 좀 배운 손님들하고는 이렇게 즐겁게 대화하잖아요? 근데 그런 손님들은 내가 더 말을 안 섞고 바로 이 블루투스를 귀에 꽂아 버려.”


과연 귓바퀴에 이어폰이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그럴 만할 것 같아요.”


“그치. 근데 어쩔 수 없어~ 그들도 인생이 너무 팍팍하니까 그런 거지. 집구석에서 신경질 난 거 택시 타면 기사한테 화풀이하는 거야 그냥. 너무 쌓일 대로 쌓여서 그게 자기도 모르게 새어 나오는 거야 그냥. 그럼 내가 어떻게 하는 줄 알아? 얘기를 다 들어주지.”


귀에 블루투스를 꽂기도 하시고, 또 다 들어주기도 하시나 보다. 그 와중에 차량은 경로대로 미끄러져 나아가고 있었다.


“기사님이 마음이 따뜻하시네요. 그렇게 남 얘기 계속 들어주는 거 쉬운 일 아닌데요.”

성대가 천근만근이었다.


“에휴~ 그 사람들이 택시 기사한테라도 풀어야지. 그거라고 할 수 있게 도와줘야지. 그게 사람 사는 세상이지. 그래서 손님들이 날 엄청 좋아해~ 짜증내면서 타도, 내릴 땐 너무 고맙다고 하면서 내려.”


“그러니까요. 기사님 너무 좋은 분 같으세요. 기사님. 저 앞에서 세워 주시면 돼요.”


“응, 아 저기? 그래요. 그래요. 저기는 위험하니까, 코너 돌아서 안전하게.”


요금을 계산하고 문을 나서는데 밤공기가 탁 트였다.


머리가 쪼개질 것 같았지만, 아무쪼록 나는 자기 일을 명랑하게 하는 사람을 높이 사기도 하고, 한편 내가 저 분의 이야기를 할 수 있는 한 성실히 들어드린 것으로 하나의 작은 공덕을 쌓은 것 같은 성취감도 느꼈다. 훈훈한 에피소드가 될 것이었다.


“기사님 감사합니다~ 안녕히 가세요!”


“응 아가씨. 근데 저, 그, 카카오택시에 좋아요 별 다섯 개, 그거 지금 바로 좀 눌러 줘요?”


개츠비의 초록 불빛처럼 그의 생기와 의지가 향한 곳. 용의주도했던 그는 그렇게 별 다섯개의 가능성을 공중에 쑤셔넣고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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