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드니, 너마저...!
1.
"이제 질병코드를 바꿔야겠어요. 만성콩팥병으로."
2.
피검사와 소변 검사 결과가 지난 번과 별 다르지 않다고 했다.
그말인즉슨, 지난 번과 똑같이 안 좋았다는 거고,
결국 의사 선생님도 나도 원치 않았던 만성콩팥병(=만성신부전) 진단을 내릴 수 밖에 없었다.
3.
네. 그렇습니다.
양극성 장애가 조져버린 건 내 인생만이 아니었어요.
인간관계도 조지고,
커리어도 조지고,
끝내는 몸 이곳 저곳을 조지고 있다.
4.
키드니.
콩팥이라고도 하고 신장이라고도 하는 기관.
역할로는 일종의 거름망?
체내에 있는 노폐물 같은 걸 배출하기도 하고
항상성 유지나 여러 대사에 필요한 호르몬을 생산하기도 하고...
암튼 매우 중요한 기관이다.
여기가 조져지면 인생의 절반 이상이 조져진다고 보면 된다.
더 이상 신장이 기능을 못하는 말기가 되면 투석 혹은 이식하는 방법 밖에 없다.
게다가 한번 조져지면 더이상 회복이 불가능하다.
정기적으로 투석을 받는다는 건 시간도 시간이지만 고통도 상당하다고 한다.
5.
나나 의사 선생님이나 둘 다 골때리는 상황에 처해있다.
초음파 검사도 해보고 이것 저것 검사해봤는데도
초음파 검사에서는 별다른 이상이 없었고
단지 피검사에서 신장에 이상이 있다는 것만 나왔기 때문.
의사 선생님 피셜 + 내 피셜을 종합하면
일단 가족력이 있고, 장기간(10년) 정신과 약을 복용한 게 원인일 거라고 추측한다.
정신과 약 뿐만 아니라 정형외과 약 등 이런 저런 약들을 꽤나 먹었던 것도 영향이 있을 것이다.
6.
조금 걱정은 했는데
솔직히 말해서 신장이 언젠가는 조져질 거라는 예상은 하면서 살았다.
내분비 중에 정신과 약이 직격탄을 날리는 곳이 간하고 신장이니까.
데파코트 용량 조절하다 간이 조져질 뻔 해서 간 기능 회복시키는 약도 먹어야했던 경험도 있다.
7.
뭐랄까.
내분비내과를 다니면서 느끼는 건, 시간이 지날수록 병이 늘어난다는 거?
원래 종합병원 내분비내과를 찾은 건 현재 다니고 있는 정신과에서 피검사하다 나온 갑상선 이상 때문이었다.
예전에 입원해서 검사했을 때도 조금 이상하다고 나온 것도 있고
그래서 검사해보자고 갔는데
정작 갑상선은 별 문제가 없었고 콜레스테롤과 중성지방에 문제가 있었다.
그리고 앞의 두가지가 약물로 어느 정도 조절되어 가던 중에
이제 신장이......
8.
솔직히 음, 양극성 장애 환자나 보호자나 일반 대중이나
이 질환이 감정 문제가 주된 증상이라고 생각한다.
감정에만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고.
물론 카테고리에 양극성 장애는 기분장애로 분류되어 있다.
하지만 10년차 양극성 장애 환자로서 말하건대
감정 문제는 일부에 불과하다.
뭐, 진단 기준 살펴보면 알겠지만
기분 변화 말고도 행동의 변화 또한 진단에 영향을 미친다.
특히 양극성 장애 환자들이 일상 생활에서 겪는 어려움은
증상 혹은 약물의 부작용으로 나타나는 인지 기능을 비롯한 정신/신체 기능들의 저하와
조증/우울 삽화 때 저지른 행동들의 결과로 얻게 된 병,
그리고 날이 갈수록 늘어가는 신체 질환들이다.
9.
양극성 장애 환자로 사는 게 왜 힘드냐, 라고 묻는다면
너무 많아서 대답해주기 힘들지만
그래도 줄이고 줄여서 말하자면,
병이 계속 늘어나니까 힘들다, 라고 말해줄 수 있겠다.
10.
집에 와서 맥스파이시 상하이버거를 먹으며 생각했다.
어차피 조져진 인생인데 키드니 조져진 게 뭐 대수야?
저염식으로 먹으라고 하는데
음, 제가 맵고 짠 거 진짜 좋아하거든요?
그래도 이건 좀 양보할 수 있다.
짠거 보단 매운 걸 좋아하니까
덜 짜고 매운 거 먹겠습니다...!
민간요법, 대체의학(특히 한약), 건강보조식품 금지?
이건 원래도 그래 왔으니까 상관 없다.
세상에서 나만큼 민간요법, 대체의학, 건강보조식품을 혐오하는 사람은 드물 걸?
하지만 내가 고개를 절래절래 흔든 건,
금연.
이미 정형외과에서도 관절 문제로 금연을 권유받았긴 한데
차라리 숨을 못 쉬면 못 쉬었지,
거의 유일한 위안인 담배를 끊으라고?
솔직히 요즘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내가 살기 위해서 담배를 피는 게 아니라
담배를 피기 위해서 사는 게 아닐까 할 정도다.
서머싯 몸은 말했다.
"어차피 사는 게 엿 같잖아요. 그걸 잠시나마 잊게 해주는 무언가가 있다면, 당연히 누려야죠."라고.
11.
7년차, 아니 9년차까지는 그럭저럭 에너지도 있었고
뭔가 해보자, 하다보면 뭐라도 되겠지 이런 생각도 있었다.
근데 10년차 되니까 진짜... 포기인지 체념인지 모를 그 무언가 사이에 있다.
최근 내가 글을 쓰는 거나 다른 중요한 것들에서 반쯤 손을 놓은 이유는
아니 시?, 노력하면 뭐하나, 어차피 재발하면 리셋되는데.
직설적으로 말해서 이전보다 멍청해진 탓도 있는데
그보다 더 내가 현타오는 건
아무리 준비하고 노력해도 이유가 있건 없건 우울/조증 삽화 한 번이면
모든 게 날라간다.
모래성 같은 내 일상+내 인생.
될 듯하다가 안 될때 겪는 좌절감은, 특히 그 실패의 포인트가 뻔히 알고 있는 것이지만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영역일 때 겪는 그 쓰라림은 경험해 보지 못한 사람은 모른다.
진짜 울화통 터진다.
내가 뭘 그리 잘못했길래 왜 나한테 지0이세요...?
12.
찐한 조증 삽화의 영향인지 정말 말도 안되게 멍청..해졌다.
폐쇄 병동에 입원해서 다시 k-wais 할때 하면서 아, 나 진짜 멍청해졌네 이럴 정도.
특히 동작성 지능이 정말.....와 이게 진짜 그렇게 되는 구나 싶더라.
역시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이상심리학 시간에 배웠던 게 이때 제대로 이해됐다.
13.
아무튼 조져진 키드니에 심심한 위로를 건네며
Adio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