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환경과 새로운 업무, 그리고 새로운 사람들까지. 기대감을 가지고 입사한 두 번째 회사. 광고회사에서 인하우스로, AE에서 마케터로 커리어를 전환하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회사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성장하고 있는 회사였고, 다양한 실험이 일어나는 곳이었으며, 무엇보다 내 관심 분야의 업종이었기 때문에. 나에게 주어질 다양한 챌린지들이 기대되었고 맡은 일에 즐겁게 임하면서 한 걸음씩 성장해나가는 내 모습을 상상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출근 첫날, 떨리는 마음으로 들어선 사무실 안은 굉장히 고요했다. 스몰 톡에 익숙해있던 나로서는 키보드 소리만 울리는 고요한 사무실 분위기가 조금 낯설었다. 자리에 앉아 근처 팀원들과 가볍게 인사를 나누고, 컴퓨터 세팅을 했다. 사용하는 프로그램이 정말 많아 프로그램을 설치하고 계정을 세팅하는 설치 하는데만 하루 종일 걸렸다. 그리고 퇴근 전 본부를 총괄하는 임원 분께 간단한 OJT를 받았다. 구체적인 업무 롤은 다음날부터 인수인계받을 것이라고 했다. 고작 일주일밖에 쉬지 않았는데 일머리가 굳진 않았을까 걱정되는 마음이었기에, 빨리 업무를 시작하고 싶었다. 출근 첫날은 예상했던 만큼 무난하게 지나갔다.
팀원 20명 중 2/3가 입사 6개월 미만의 경력직으로 구성되어 있어 조직에 적응하는 것은 그렇게 오래 걸리지 않았다. 나 혼자 경력직이 아니었기에 위안도 되고, 의지도 되고. 팀원들도 나를 마치 오랫동안 함께 한 팀원인 것처럼 잘 챙겨주어 금방 회사 생활에 적응할 수 있었다. 명함도 신청하고, 사원증도 촬영하고, 웰컴 키트도 받고. 입사 첫 주를 마쳤을 때 이 정도면 나름 성공적인 이직이라 생각했다. 이직 후 힘듦을 토로하는 사람들이 대부분 동료들이 힘들게 하거나, 분위기가 어렵거나 등 조직의 환경적 요인을 이야기하기 때문에 젊고 자유로우며 수평적인 이 조직은 나에게 꼭 맞는 곳이라 생각했다.
물론 이 생각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지만.
제가 해야 할 일이 이것.... 뿐이라고요?
입사 일주일 후, 업무를 인수인계받는데 응? 뭔가 이상했다. 나에게 주어지는 업무들에 ‘기획’의 요소는 단 하나도 없었다. 기획이 아닌 운영에 포커스가 맞춰져 있었다. 마케터인데 전략을 생각하지 않고, 콘텐츠를 기획하지 않고, 데이터를 분석하지 않는다니. 그저 빠르고 효율적으로 operating 하는 것이 나의 역할이라니. 내가 기대했던 업무 분장과 달라도 너무 달랐다. 기획자로, 마케터로 성장하기 위해 이직을 했는데 기획을 할 수 없는, 전략을 고민할 수 없는 마케터가 되라니. 경력에 사형 선고를 받은 듯한 느낌이었다. 일주일, 2주일, 3주일이 지나도 내 role 은 변하지 않았고 나에게 그 어떤 챌린지도 주어지지 않았다. 이 곳은 어마 무시하게 빠른 속도로 성장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성장 속도를 따라잡기 위해 모든 업무 프로세스가 세분화되어 있었다. 나는 그저 그 프로세스의 끝에서 이 공정이 더 빨리 돌아갈 수 있도록 스피드 하게 톱니바퀴를 돌려야 하는 역할에 지나지 않았다.
전 회사를 퇴사한 것은 후회가 없지만 뭔가 더 방향을 놓친 기분이다. 무엇이 문제일까? 회사는 어디나 다 똑같을 텐데.. 전문성을 키울 수 없는 업무들, 성장과 속도만 바라보는 이 조직에서 과연 난 성장할 수 있을까? 이 조직에서 내가 어떤 목소리를 낼 수 있을까? 그 어떤 열정도, 의욕도 생기지 않는다.
- 1월 말에 썼던 일기 중
한 달을 다닌 후 뒤돌아보니 그래도 이 곳에 많은 장점들이 있었다. 좋은 동료들과 괜찮은 연봉, 높은 업계 인지도, 크고 작은 다양한 복지 혜택, 낮은 업무 강도, 광고 회사에서 경험하지 못할 매일매일 칼퇴하는 삶까지. 지인들은 우스갯소리로 “너네 팀에 나 가면 안돼?”라고 할 정도로 객관적으로도 괜찮은 곳이었다. 1년만 버티면 이력서에 한 줄 추가할 수 있을 것이고, 그때 다른 곳으로 점프업 하자고 스스로를 다독였지만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다. 내가 이직을 선택한 단 하나의 이유가 충족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성장’을 위해 이직했는데 성장을 포기해야 한다는 것.
워라밸이 중요했다면, 높은 급여가 중요했다면, 회사의 타이틀이 중요했다면 힘들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많은 리스크를 감수하고 이직을 선택한 것은 성장하기 위함이었기 때문에 성장할 수 없는 환경에서 버티는 것이 더 이상 아무 의미가 없어졌다.
그래서결정했다.
다시, 과감히퇴사하기로.
이 세상 모든 속박과 굴레를 벗어던지고 자유를 찾아 떠납니다~
한 달하고 2주 지났을 때 회사에퇴사 의사를 건넸다. 그리고 3주가량의 인수인계 기간을 보내고 오늘 다시 퇴사를 했다. 작년에 퇴사를 할 땐 내가 두 달만에 퇴사를 하게 될지 누가 알았겠는가? 인생은 참 모를 일이다. 엄마는 코로나로 난리인 이 시국에 다시 힘들게 이직 준비를 할 거냐며 걱정했지만 난 두렵지 않았다. 또한 첫 이직을 후회하지 않는다. 이직을함으로써이곳을경험해봄으로써업에서가장중요하게생각하는것이무엇인지다시금깨달을수있었고앞으로 5년후, 10년후의미래를좀더구체적으로그려보는계기가 되었으므로. (그래도 다행스럽게 퇴사 시점에 도전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겨 next를 정하게 되었다. 이 이야기는 추후에 차차 풀어보겠다.)
블라인드 앱에 [이직 후 퇴사], [이직 직후 퇴사] 등의 키워드를 검색해보니 나와 비슷한 경험을 한 사람들이 꽤 많이 보였다. 이직 후 사람 때문에, 조직 환경 때문에, 또는 나처럼 업무 때문에 퇴사를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나는 이렇게 이야기해주고 싶다. 당신이이직을선택한단한가지이유를 다시 떠올려보라고.그리고 그것이 충족되고 있냐고 말이다. 만약 충족되지 않는다면 그저 이력서 한 줄을 위해 당신을 갉아먹는 하루하루를 보내지 말라고 당부해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