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수 한 달 차, 친한 지인으로부터 프리랜서 도움 요청을 받았다. 모 교육 브랜드의 소셜 미디어 콘텐츠를 기획하는 일이었는데 담당 에이전시가 정해진 기한 내에 커버할 수 없는 상황이어서 지인에게 요청을 했다고 했다. 일주일 안에 인스타그램, 페이스북, 블로그 총 3개 채널의 14개 콘텐츠 기획/에디팅을 해야 하는 일이었는데 마침 찌뿌둥하던 차에 용돈벌이나 해보자며 흔쾌히 Yes를 외쳤다. 며칠 후, 에이전시로부터 각종 자료와 함께 업무 착수 요청 메일을 받았다. "콘텐츠 기획이요? 에이 하루 이틀이면 금방 하죠~"라고 외쳤던 마음은 온데간데 사라지고 막막함과 귀찮음이 내 머리와 마음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교육 브랜드... 잘 알지도 못하는데 왜 한다고 했을까"
"일주일 동안 이걸 다 해야 한다니 어휴"
"귀찮아. 노트북 켜는 것도 막막해"
"역시 아직 난 일할 준비가 안 됐나 봐. 더 놀아야 해"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막막한 마음에서 출발해 귀찮고 게으른 마음을 거쳐 자포자기하기까지 도달하는데 얼마 걸리지 않았다. 그렇게 하루 이틀을 회피하다가 마감일이 얼마 남지 않았을 때 그래, 약속한 일은 해야지, 욕먹지 않을 정도로만 하자라는 반포기 심정으로 억지로 책상에 앉아 물 먹은 스펀지처럼 무거운 손가락을 들어 컴퓨터 전원 버튼을 눌렀다.
자료를 살펴보고 문의할 사항을 정리해 에이전시 쪽에 메일을 보내고 난 후 본격적으로 일을 시작했다. 기획안 양식을 만들고 어떤 소재로 콘텐츠를 만들 것인지에 대한 소재 선정 작업을 했다. 유아/초등용 콘텐츠를 만드는 교육 회사여서 그런지 캐릭터 IP를 활용한 콘텐츠들이 많았다. 자료를 살펴보면서 캐릭터가 귀엽기도 하고 유치하기도 하고, 33살의 내가 어린아이용 책을 읽으며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니 괜히 웃음이 났다.
소재 선정 작업을 마치고 나니 업무에 속도가 붙었다. 선정한 소재를 효과적으로 보여주기 위한 콘텐츠 흐름을 짜고 카피와 이미지 구성 등 콘텐츠 상세 기획 작업을 했다. 욕먹지 않을 정도로만 하자의 마음으로 시작했는데 막상 시작하고 나니 이게 최선일까? 콘텐츠 순서를 좀 바꿔볼까? 메인 카피가 너무 추상적인 것 같은데 더 직관적인 카피는 없을까?등 다양한 각도로 고민하고 있는 나의 모습을 발견했다.
그래 맞아, 난 원래 이런 사람이었지
<더 나은 방법을 고민하며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 말야.
6시간을 내리 집중하며 콘텐츠 기획에 몰두했다. 어느덧 대충 해야지 하는 마음이 자리 잡았던 자리에 더 나은 방법을 고민하고 최선을 다하는 마음이 자리 잡았다. 이중인격도 아닌데 왔다 갔다 하는 내 마음이 혼란스럽기도 했다. PPT와 EXCEL을 여는 게 두려워질 정도로 번아웃에 지쳐 퇴사를 했는데 한 달도 안되어 다시 이렇게 자료를 분석하고 콘텐츠를 기획하고 있을 줄이야 (물론 단기 업무이지만).
소셜용 이미지&영상 콘텐츠부터 텍스트 콘텐츠까지 이렇게 여러 형식의 콘텐츠 기획을 백수 시기에 경험하게 될지 누가 알았겠나. 문득 이런 기회를 얻게 되어 감사하단 생각이 들었다. 다행히 정해진 기간에 기획안 준비를 끝내 전달했고 큰 이슈 없이 잘 마무리했다. 어라?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겨우 겨우 끌려다니며 할 줄 알았는데 주도적으로 일을 진행하고 마무리한 내가 보였다.
막상 끝나고 나니 왠지 아쉬움이 느껴졌고 뭔가 다른 일을 더 하고 싶단 마음이 스멀스멀 기어나왔다. 일하기 싫은데 일하고 싶은 이런 아이러니한 마음. 예전 같았다면 그럴 거면 다시 회사로 가면 되잖아하며 나를 채찍질했겠지만 지금의 나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그냥 이렇게 왔다 갔다 하는 내 마음도 온전히 인정해주는 거지 뭐.
곰곰이 생각해보면 이 즐거움의 원천은 일을 해서 돈을 벌었다는 것이 아닌 내가 무언가를 생산해냈다는 자기 효용감이었다. 기획을 하고 기획한 내용과 아이디어를 시각화하는 일련의 창작 활동을 통해 누군가의 비즈니스에 도움이 되는 결과물을 생산해낸 것이다. 그것을 통해 "아, 나 아직 쓸모 있는 사람이구나"라는 자기효용감과 만족감을 느꼈기에 하는 일들이 즐겁게 느껴지고 일상이 더 풍요로워진 것이다.
일은 삶에서 증명하고 싶은 가치를 실현하는 수단이다. 좋아하는 일과 잘하는 것이 합쳐져 있어야 즐기면서 오래 할 수 있을 것 같다.
- 독립출판 <인디펜던트 워커> 142p
내가 무엇을 할 때 행복한지를 알아야 더 오래, 그리고 즐겁게 일할 수 있다. 일은 금전적 보상을 가져다주는 경제적 활동을 넘어 삶의 가치를 증명하는 가치 실현 활동이기 때문. 일과 삶, 일과 행복, 삶과 행복에 대해 딥 다이브 하며 답을 찾아나가고 있는 지금 이 시간에 감사하다. 마친내 이 고민의 정답을 마주했을 때 비로소 일하기 싫은 마음을 지워버릴 수 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