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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J Feb 20. 2016

선택의 감옥

2016.02월 셋째주 추천 Thought & Movie

생각하나 - 너가 선택한 목록
영화하나 - <birdman>(2014), <room>(2015)


글을 쓸 때 매번 매시간, 매분마다 되새겨 본다. 헛소리를 쓰지 않았기를. 허세로 물들지 않기를. 오글거리는 낭만과 힐링 이야기보다는 철학이 좋고, 말 많고 우울한 철학따위 보다는 담백한 진심의 공유가 좋다. 영화 <birdman>(2014)에서 구현되기를 희망한 초사실주의(이런 명칭이 있다기 보다는 영화속에서 언급된 단어를 사용한거임)를 보자면 배우 마이클키튼(Michael Keaton)의 실제 삶과 극중 캐릭터 리건의 모습이 닮아 있으며 리건 역시 그가 연기한 연극 안의 캐릭터와도 역시 닮아 있다. 마이크가 말한 '척'하는 것이 아니라 '진짜'가 되는 것처럼 초사실주의를 통한 진짜의 삶을 관객과 공유하고 싶어했다고 느낀다. 그러한 점에서 <birdman>의 결말은 영화라는 매체의 기능을 드러냄으로 진짜 우리와 소통하고 싶어하는, 허구를 통해 그 안에 숨겨진 감독의 모습을 드러내고 싶어하는 연출이라고 생각한다. 나도 원츄. HEY THERE?

이번 주에 내가 느낀 생각 하나는 선택에 관한 고통이다. 나의 선택이 나를 점점 초조하게 만들고 있는 빌어먹을 자학의 모습을 느낀다. 내 살을 깎아먹고 있는 건지는 좀 더 두고봐야 겠고, 멈출 수 없는 것을 알기에 선택을 믿는 수 밖에 없다. 풉 나는 선택의 감옥안에 살고 있는지 모른다.

리건과 마이크

자신의 삶에서의 선택, 그리고 그 선택에 맞쳐 살아가거나 아니거나. 선택은 내 카테고리를 정해주고 그 폴더 안을 기준으로 서성거리게 만든다. 영화속에서 리건은 배우의 감옥을 선택했다. 그 선택은 자신을 예술가이거나 연예인으로 만들었고 현재도 만들고 있는 중이다. 그가 경험하고 있는 '한때는 잘 나갔던 왕년의 영화배우'는 그가 선택한 삶으로부터 얻어진 타이틀이 되었다. (정확히는 타자들이 낙인찍은 타이틀이지) 낙인찍힌 '왕년의 영화배우'타이틀은 훗날 이 곳을 관광하는 가이드의 첨언정도로 소개될 것이다. 내가 선택을 감옥이라고 부르고 싶은 이유는 너도 알다시피 선택은 항상 어렵고 즐겁지 않아서다. 리건의 모습을 보고 있자면 그의 망상장애는 그를 옥죄고 있고 현실과 대중으로부터의 환호와 조롱, 비평가로부터 받는 비난은 점점 그를 극으로 몰고 간다. 아무리 자신보다 불행한 사람이 많다지만 다 헛소리, 불쉣이다. 나의 감옥안에서 고통받고 고문당하고 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고로 리건은 새가 되어 날았지. 그의 자살이 감옥으로부터 탈출한 것인지는 판단유보지만 신문에 써진 호평이 그의 감정에 아무런 자극을 주지 못한 걸 보면 감옥을 초월한 것 같기는 하다.

달걀뱀을 만들며 티비를 보고 있는 잭과 조이
방안의 잭

감옥의 특징은 이 공간이 곧 세상의 전부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room>(2015)에서 잭은 자신이 살고 있는 공간 속 물건들이 세상의 전부였다. 엄마, 램프, 화분, 달걀뱀, 카펫, 옷장, 티비, 싱크, 변기 등 방안의 물건이 잭에겐 전부고 그 외의 것은 진짜가 아니다. 감옥을 기준으로 진짜의 기준을 정한다. 잭에게 화분은 진짜지만 나무는 진짜가 아니고 그가 살고 있는 방에 비교해 바다는 너무 크기 때문에 이 또한 진짜가 아니다. 결국은 무엇이 진짜인지 구분점은 자기중심적이 되고 우리는 감옥에 있는지조차 잊어버린다. 너가 선택한 감옥은 뭐지? 돈? 사랑? 아님 좌파? 자신의 생각에 대한 우월감? 내가 진짜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은 무엇인지 생각해 보자. (물론 인식하기가 어려울 걸로 짐작한다. 그리고 그건 자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자기파괴이기도 한다는 것을 느낀다.) <birdman>의 리건이나 <room>의 조이는 결국 자살을 경험한다. 감옥의 탈출이 자기파괴가 된다는 의미로 해석될 모습들이다. 우리 모두는 자신의 방안에 살고 있다. 나는 그것을 현재 감옥으로 느끼고 있는 중이고.

나는 아이가 좋다. 강아지도 좋다. 고양이도 좋다. 키우는 것도 적극 환영이다. <room>의 잭을 보고 있으면, 혹은 내 조카를 보면 키우고 싶은 즐거운 상상이 든다. 하지만 키울 현실의 여유는 아직 없다. 우선적으로 나를 키울 자신조차 없는 내 모습을 쳐다본다면.. 다른 이를 키운다는 것은 아마도 서로의 정신건강에 해를 끼칠 것이 분명할테지. 그냥 가끔 같이 재밌게 지내는 모습을 상상하는 것만으로 만족해야 할 것 같다. 로망처럼. 내 방에서 자라나고 있는 나는 무엇을 알고 무엇을 모르는 것일까. 이 방이 주는 답답함을 담담함으로 맞설 수 있는 순간을 얼릉 맞이했으면 한다. 내가 세상 밖으로 나가게 된다면 잭처럼 잘 적응하기를 바란다. 적응이 잘 안된다면 삼손의 긴 머리카락을 건네줄 동반자라도 만나게 해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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