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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출의 왈츠: 아내영화의 나선>

나루세 미키오, <밥>, 1951

by 송전탑 Mar 17. 2025

 We were waltzing together to a dreamy melody

 우린 꿈속 같은 왈츠에 맞춰 춤추고 있었죠.

 When they called out ‘Change partners’

 그들이 파트너를 바꾸라고 말하기 전까지

 And you waltzed away from me

 당신은 내게서 춤을 추며 멀어져갔어요.

 Now my arms feel so empty

 이제 내 품은 비어있고

 As I gaze around the floor

 바닥만 바라볼 뿐이죠.

 And I’ll keep on ‘Changing partners’

 그래도 계속 파트너를 바꿀 거예요.

 Till I hold you once more

 당신을 다시 만날 때까지

       <Changing Partner>, Patti Page, 1953      


 나루세 미키오의 <밥>은 두 차례에 걸쳐, 출근하는 남편에게 도시락을 손에 쥐어주는 아내의 모습을 후경에 담는다. 그 후경의 틈새로 어떤 여성이 걸어 들어온다. 기모노를 입은 전근대의 여성이 ‘미치요’에게 묻는다. “저분은 누구시죠?” 하츠노스케의 조카 ‘사토코’가 등장하는 순간이다.

 1946년, 히로히토의 인간선언과 함께 더글라스 맥아더의 얼굴을 한 ‘신천황’의 질서가 일본에 새로이 자리 잡게 된다. 일본의 전후민주주의는 가부장제의 부분적 좌절에 따라 특정한 여성상을 돌출하게 만드는데, 일련의 ‘아내영화’들은 이 단면을 아주 민감하게 반영한 결과라고 말할 수 있다. 

 도이 타케오는 『일본인의 심리구조』에서 패전 이후의 근대 일본 남성성을 규정하는 데 있어 ‘아마에甘え’를 강조하는데, 그의 관점에 동의할 수 있다면 한 가지 질문을 던지고 싶다. 나루세 미키오는 어째서 ‘어머니영화’ 대신 ‘아내영화’의 형식과 이름을 채택했던 걸까?

 나루세 미키오는 이미 제목에서부터 암시하고 있는 <밥>을 통해 일본의 ‘아마에’하는 남성과 ‘호오로오(방랑)’하는 여성이 갈등하는 가정을 재현하고 있다. 영화는 결혼생활을 5년 동안 지속한 미치요와 하츠노스케의 권태로운 대화에서 출발한다. 미치요는 남편과의 정서적 관계를 꿈꾸지만, 하츠노스케는 신문의 경제면에 관심을 둔 채 아내에게 ‘밥’을 달라는 기능적 측면만을 기대할 뿐이다. 이는 분명히 아내영화보다 ‘어머니영화’라는 이름이 더 어울리는 대목이다. 그러나 우리가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미치요가 자녀를 두고 가정에 헌신하는 ‘어머니’가 되기를 거부하는 ‘아내’라는 점에 있다. 

 “사토코는 왜 그렇게 가벼운 거니? 아빠는 사토코가 미워. 너는 내가 더 이상 감당할 수 없구나.” 세계대전을 통해 복수의 가부장제가 충돌하면서 발생한 이데올로기의 균열은 미치요로 하여금 ‘사토코’라는 이름의 외상적 실재를 마주하게 만든다. 그동안의 행실을 지적하는 아버지의 꾸짖음에도 하품으로 응답하는 그녀의 모습이 그러한 균열의 표상일 것이다. <밥>에서 그려지는 미치요와 사토코의 관계는 대립이라기보다 전이에 가까워보인다. 사토코가 시도하는 가출의 실천(불)가능성을 분명히 인식했었던 미치요를 생각하면 말이다.

 정리하자면, 내가 ‘아내영화’라는 라벨을 지닌 <밥>에서 발견하는 것은 ‘아마에’에 천착하는 전후 일본 남성과 이데올로기의 균열을 하나의 출구전략으로 삼고자하는 여성의 경합이 ‘아내영화’의 내용과 형식을 이룬다는 점이다. 둘 중 하나만 없더라도 아내영화의 내러티브는 작동할 수 없는데, 이는 이미 ‘아내’라는 표현에 남편과의 관계가 암묵적으로 전제되어있기 때문이다.

 도이 타케오의 분석대로 이제 아내영화의 남성들이 수행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아들의 역할이지 아버지의 역할이 될 수 없다. 오랜만에 도쿄에 찾아온 미치요에게 인사를 건넸던 여성의 남편 역시 아들을 둔 채 실종되었음을 상기해보자. 남편 찾기를 포기한 여성과 미치요는 이내 전근대의 풍습을 따르는 길거리의 부부를 함께 바라본다. <밥>은 여성주체의 해방을 표방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영화 속의 미치요는 <산쇼다유>의 안주처럼 강제된 선택지들을 다시 마주한다. 결말부에서 회귀하는 풍습의 행차, 그리고 남성이 되어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길거리의 미망인 사이에서. 영화가 미치요에게 인도하는 길은 이전과 같은 사람인지, 아니면 다른 사람인지 알 수 없는 하츠노스케의 곁으로 향한다.

 사라진 남편의 삽입서사가 암시하고 있는 것처럼, 전전의 질서가 불가능하다는 현실에 당면한 전후의 일본은 GHQ의 왈츠 아래 기존의 파트너를 바꿀 것을 요구받는다. ‘파트너를 바꾼다는 것’은 다음의 두 가지 가능성을 함의한다. 기존의 자리를 차지한 새로운 파트너에 만족하든가, 아니면 돌아올지 여부도 모르는-돌아오더라도 처음의 그 모습을 보장할 수 없는-기존의 파트너를 하염없이 기다려야 하는 것이다. 계속 파트너를 바꾼 끝에 기존의 파트너를 다시 만난 경우라고 할 수 있는 결말부의 미치요는 되돌아온 것처럼 보이지만 정확히 그 자리라고 부를 수는 없을 어떤 나선의 좌표에 도달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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