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GV에 10분 늦게 도착했다. 영화는 이미 시작되었고, 내 좌석을 찾아가기가 쉽지 않았다. 입구에서 남은 시간 영화를 관람했다. 그리고 그 늦은 10분은 계속 나를 괴롭혔다. 결국 5일 뒤 다시 두 시간 가까이 달려가, 마지막 시간의 영화 상영시간 23시에 그 10분을 다시 찾았다. 마음이 편안했다. 하지만 다시 만나는 그 슬픔과 분노는 더 두터워졌다.
김태윤감독의 영화 <또 하나의 약속>
새벽 1시 즈음, 멈추어진 에스컬레이터에 내 구두의 또각거리는 소리가 건물 전체에 울려 퍼진다. 두 시간 가량을 성난 마음으로 흐느적거리다 건물 밖으로 나왔다. 내 앞에 펼쳐진 길은 텅 비어 있었다. 지나는 자동차도, 사람들도 없는 깊은 밤의 그 거리는 참으로 태평해 보였다. 나는 이 길거리에 순간 버려진 느낌이 들었다. 낯선 이방인이 되어 하늘을 본다. 별빛도 여전하다.
인간의 탈을 쓴 이름 없는 괴물들의 잔영들로 애꿎은 자동차의 계기판은 140을 향한 채 이리저리 움직이며 공기의 저항과 싸움을 하고 있다. 영화로 인해 그 순간 다가오는 분노가 아니라 그동안 일상 속에서 인식하고 있던 일들의 반복되는 분노의 감정이었다. 기업의 윤리, 사회적 책임 의식 따위는 거론조차 할 수 없는 거대한 기업이라는 괴물들에 의해 희생된 생명들의 혼령들이 떠도는 밤이다.
1. 우리는 길들여진 존재들이다.
반려동물을 집안에 들이게 되면 사람과 동물, 모두에게 새로운 삶이 주어진다. 생활 패턴에 변화가 오면서 조정이 필요해진다. 동물을 키우는 사람뿐만 아니라 동물도 그 사람의 삶의 방식에 맞게 변화되어 간다. 서로의 삶을 변화시키면서 정서적으로 의지하고 친해진다. 우리나라를 생각하면 내가 마치 기업의 반려동물로 전락한 느낌에 사로잡힌다. 기업이 원하는 방식을 따르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는 사회, 철저히 길들여진 도구와 다름없다.
현재 일어나고 있는 사회 문제들은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생긴 결과들이다. 그러니 나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태어날 때부터 나의 부모와 가족들로부터 삶에 반응하는 방법들을 습득하도록 배워왔다. 그리고 교육을 받으면서 사회가 인간답다고 규정하는 길로 끌려간다. 본능이 이끄는 나만의 것을 부정하고, 복잡한 계산에서 나온 이미 만들어진 정답으로 삶은 채워져 간다. 그렇게 진행되는 삶이 안전하다는 것을 익히고 길들여진다.
그러나 의구심 없이 따라온 사회의 그림자 속에는 잃어버린 나의 참모습이 어디엔가 널브러져 있었다. 나는 그런 우리들의 초상을 영화 <또 하나의 약속>에서 발견하고, 무거운 마음으로 글을 쓴다. 이 영화는 제작두레 형식으로 개인들의 마음이 모여 완성되었다. 사회적으로 큰 문제가 되고 있는 반도체 공장의 산업재해 문제를 처리해 가는 과정의 아프고 서글픈 이야기이다. 삼성반도체 기흥공장에서 1년 8개월 근무하고 백혈병이 발병, 2007년 23세로 사망한 故황유미의 실제 상황을 영화화했다.
영화 <또 하나의 약속>의 엔딩 크레딧에 제작두레 참가자들
박정희 장군은 1961년에 쿠데타로 권력을 장악했다. 그 후 민간인 신분으로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여 세 번 당선되었다.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통해 ‘한강의 기적’을 이루었다고 알려져 있지만 실상은 다르다. 노동자들의 희생이 이루어낸 경제 성장이다. 이렇게 국가 성장과 경쟁력을 위한 경제신화는 대한민국의 강박관념으로 고착되었고, 오랜 시간 동안 부정적 측면을 기형적으로 확장시켜 왔다.
개인의 희생을 국가 성장을 위한 미덕으로 여기며 국가의 부강함이 사회를 윤택하게 할 것이란 믿음은 허황된 것이었다. 자본 축적의 역사적 과정에서 자본가가 노동자를 착취하는 사회관계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 일어난 오해의 결과는 극단적인 양극화로 나타났다. 이것은 정부가 국민을 기만해 온 것이며 정경유착의 자연스러운 귀결이기도 하다.
국부(國富)를 위한 것이 아니라 기업과 개인의 부(富)를 위해 전력 질주한 것이다. 주요 수출 산업이었던 섬유와 의류 산업 노동자들을 낮은 임금과 장시간의 위험하고 비위생적인 근로 환경에서 희생자로 만들었던 것이다. 국가는 반세기를 거쳐 희생해 온 노동자들을 외면하고, 고질적으로 노동의 가치를 하락시키고 결국에는 실종 상태로 만들어 왔다.
대한민국에서 노동자로 살아간다는 것을 당당하게 드러낼 수 없는 현실, 그것은 직종에도 등장하지 않는 유령의 이름이 되었다. 아이들은 아버지의 직업란에 ‘노동자’로 쓸 수 없고, 자신이 미래에 노동자로 살아가게 된다는 사실을 결코 인지하지 못하면서 성장한다. 국가가 조장하는 경제신화에 노동자는 없고 경영자만 있기 때문이다.
노동자로서 실존할 수 없는 시대가 그들의 미래라 하여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이 영화를 보고 질문을 던질 수 있어야 한다. 삼성 반도체에서 근무하던 노동자들의 죽음이 가리키는 것은 무엇인가. 무노조의 기업이 노동자의 권리를 빼앗는 행위에 침묵을 지키는 정부의 직무유기가 어떻게 정당화될 수 있는 지를 알아야만 한다. 거의 모든 대기업들과 삼성의 노동 탄압은 현재 진행형이다.
제123주년 노동절인 1일 오후 서울광장에서 열린 전국노동자대회를 마친 참가자들이 대한문 앞 쌍용자동차 분향소를 찾아 추모하고 있다. 2013.5.1/뉴스1
2. 노동자가 죽어 가면 자본가도 없다.
제레미 리프킨은 그의 저서 ‘노동의 종말’에서 기술의 발전으로 인해 인류는 노동으로부터의 소외와 추방이라는 암울한 미래를 맞이하게 된다고 비관적인 전망을 했다. 이런 비관적인 미래는 노동자를 자본의 도구로 전락시키는 노동자를 돌아보지 않는 사회의 끝일 수도 있다. 그러나 ‘자본주의의 종말’이기도 하다. 자본은 노동에 의해 축적되어 왔기 때문이다.
노동은 이 세상을 유지시키고 새로운 변화를 가져오게 하는 근본적인 힘이다. 노동이 없다면 변화와 진보, 발전은 있을 수 없다. 이 세상에서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는 활동은 노동 외엔 없기 때문이다. 개인에게 있어서 노동은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는 수단이자 존재의 의미이기도 하다. 자본주의 시대를 살아가는 개인들은 시간과 노동의 압박에서 과도한 경쟁으로 내몰리고 있는 것이다.
‘고용 없는 성장’을 지속시키는 경제구조를 바꿀 수 있는 사회적인 합의와 해결을 위한 부단한 노력은 반세기를 지나왔다. 인간을 중심에 둔 노동을 바라보는 시선과 인식의 전환, 인간의 특별함을 오만함에 치중하여 욕망 충족만을 위한 삶의 가치 지향에도 성찰이 필요하다. 자본주의가 만든 경쟁만을 위한 황폐한 현실은 노동의 가치뿐만 아니라 자연과의 부조화로 인한 인류 문명의 종말까지를 초래할 수 있다.
우리들이 만들어낸 사회 관계망은 생태계와도 뗄 수 없는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우리는 자연 속의 일부이며 자연이나 다른 생명체 없이 살 수 없는 존재이다. 이런 현실들을 자각하고 깨달아 인간이 갖고 있는 특별함을 모든 생명체를 향한 조화를 위해 발휘해야 한다. 또한 자본주의 체제의 문제점들을 공론화하여 합의해 나가 보완해야만 한다. 노동의 기쁨으로 삶의 충족감을 느낄 수 있는 사회로 변화될 수 있을 때, 노동자는 더 이상 죽음으로 존재감을 드러내지 않게 될 것이다.
삼성반도체 피해자 가족들과 인권단체 '반올림' 회원들
[보탭니다]
2014년 2월 영화를 보고 쓴 글입니다. 다시 이 글을 발행하는 이유는 최근 주목받고 있는 Jtbc의 활약 때문입니다. 그들의 활약과 함께 재벌 삼성을 경영하고 있는 삼성家를 똑똑히 제대로 기억하기 위해서입니다. 삼성이 키우고 있는 종편 Jtbc가 과연 재벌 삼성家과 관련된 수많은 의혹과 정경유착의 고리를 파헤칠 수 있을지 가장 궁금합니다.
이 궁금증이 제대로 해소되기까지 나는 Jtbc를 이끌어가는 손석희 앵커에 대한 평가를 뒤로 미룹니다. 그의 선택이 삼성의 파이 키우기에 일조했다는 결과로 이어지기를 결코 바라지 않기 때문입니다. 삼성그룹이 망하는 것이 아니라 삼성家가 그 대가를 치르는 겁니다. 이 사실을 잘못 이해하여 국가의 경제가 잘못될 것이라 생각하면 안 되는 겁니다.
삼성 그룹이 한국의 좋은 기업으로 그 이름을 드높이기를 바랄 뿐입니다. 자본과 결탁하는 정치는 투명할 수 없습니다. 정경유착의 고리를 끊어내야 하는 이유는 죽음으로 답을 알리는 너무 많은 노동자의 희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지금과 같은 국정농단 사태와 비선 실세의 부역자들이 나라를 말아먹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