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상한 책방 20.

뒷모습

by 이창우

누군가는 뒷모습을 남기고 떠나간다. 하염없이 바라보다 눈길을 떨군 채 뒤돌아 가게 되는 순간이 있다. 그 마음이 어떤 빛이었는지 생각해 보지만 흐릿하거나 표현할 수 없는 색으로 번져있다. 그런 대상이 한쪽에는 우주가 다른 한쪽에는 재현이었다.


재현이 여행길에 보낸 그림엽서가 십 여일 지나 내게로 도착했다. 다른 길을 찾아 발걸음을 돌린 그에게서 온 소식으로 세월을 거꾸로 거슬러 간다.


누가 부르면 마음이 가볍게 움직인다. 노란 은행은 파란 바람에 이끌려 길 위로 구른다. 표현하기 어려운 소리가 나를 자극한다. 마르고 건조한 보도블록과 또르르 말린 노란 은행잎이 닿는 순간 마찰음과 기괴한 조화. 그 순간 같이한 사람에게서 발견한 소리 없는 웃음. 그나마 사람과 조화를 만들어낸 공간에서 숨 쉬는 생명.


회상에서 깨어나면서 조금 달라진 지금에 나를 들여다본다. 서울 탈출을 앞두고 잠시 나눈 짧은 만남에서 재현은 주소를 달라고 했다. 떠나가는 사람에게 내 주소가 왜 필요한지는 묻지 않았다. 그와 나는 살아가는 방법도 지향하는 것도 다르다.


그는 한국사회에서 요구하는 성공한 사회인으로 잘 살아갈 기회가 주어져 있는 사람이다. 그 스스로 만든 기회이기도 하지만 언제든 상황에 따라 변할 수 있는 사람이라 생각해 왔다. 이 사회에서 부여한 엘리트 의식과 기질이 그에게는 벗어던지기 어려운 갑옷처럼 들러붙어있다.


지난 늦가을 재현이 갑자기 연락이 와 이틀 후면 여기 없을 것이라는 말을 할 때조차 나와 상관없는 일을 굳이 내게 말하는 이유가 궁금하지도 않았다. 재현은 내가 알아차릴 수 없는 물음표만 툭 던지던 대상이라고 기억한다.


우리에게 대단한 사건이라도 있다면 어땠을까. 너무 밋밋해서 재현과 나는 아주 가끔 소식을 주거나 받거나 굳이 소식이 오지 않아도 기다리는 사람은 아니다. 그래도 꽤 긴 세월 이름과 같이 한 순간을 꺼내며 웃을 수 있는 대상이다.


사람을 향한 내 마음이 조금도 흔적을 남기지 않던 시절. 갑작스러운 누군가 죽음으로부터 빠져나올 생각이 없던 시절에 재현은 그냥 그랬다. 요즈음 여행지에서 엽서를 사용하는 사람이라니. 몇 자 적지 않은 알아보기 편하지 않은 못난 글씨를 보며 웃는다. 그다음에 다가오는 감정은 미묘하다.


머물고 있는 곳에 관한 몇 마디 안부를 적은 것이 전부인데 내 마음이 술렁인다. 그림엽서에 담긴 보이지 않는 마음을 상상하고 있으면 흔적 없는 아픔이 몸을 휘젓기도 한다. 서로가 가까이하려고 다가서는 듯하면 대체로 자석처럼 밀쳐내는 일이 잦았다.


사람을 마음에 담아 두지 않는 일은 스물을 지나면서 애쓰지 않아도 작동되던 일이다. 어차피 나는 혼자였고 스스로 고통받는 자이고, 그것으로 살아있음을 확인하며 내일을 마주하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나에게로 이어지지 않은 마음은 낙엽처럼 때가 되면 땅 위를 뒹굴다가 바스러진다.


누군가 내 삶에 남긴 흔적을 뒤늦게라도 발견하는 것은 좋은 것일까. 뒷모습은 내가 만든 기억으로 윤곽을 드러내는 것은 아닐까. 만들어낸 기억이 흐릿해질 즈음 뒤돌아 보는 얼굴이 낯설다면 어떻게 해야 하지? 내 마음을 드러내지 못할 대상이라면 뒷모습을 바라보는 내가 너무 애처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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