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리서도 사람의 목소리는 향기롭다. 같은 공간이 아니라 해도 마음이 이어지면 곁에 있어주는 것만 같다. 길냥이들이 찾아주는 책방은 사람 흔적 없어도 따뜻하다.
그리움에 실체를 알 수 없다면 정말 그립다고 할 수 있을까. 무엇인지 알 수 없는 감정에 휘둘린다. 나와 잘 맞는 사람이 존재하기는 하는 것일까. 어떤 사람이 잘 맞는 것이지?
불쑥 튀어나오는 이름이 그리운 것일지도 모른다. 어느 날 갑자기 멈추었는데 뚜렷하게 남은 기억은 없다. 아마도 기억을 거슬러가면 스물, 그 시절이 전부다. 꺼내고 싶지 않은 스무 살 트라우마.
가까이 있는 누군가를 잃었을 때는 애도하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하던데 방법을 찾지도 못한 채 지나왔다. 그저 죽음이라는 뭉뚱그려진 검은 덩어리가 깊이 박혀버려 있다.
삶은 반드시 열심히 노력하고 최선을 다하며 살아야 하는 것일까. 행복을 추구하며 살아간다는 것은 지금은 행복하지 않다는 말이다. 언제나 행복할 수는 없고 찰나 아닌가. 행복하다고 말해버리는 순간 슬그머니 비껴나가고 있는.
행복하다면 굳이 행복 타령은 하지 않을 텐데. 오늘은 많은 생각이 나를 흔든다. 단순하게 살아가는 일이 어쩌면 가장 힘든 일인지도 모른다. 주어진 하루가 이렇게 고스란히 나를 위해 존재할 수 있다는 게 놀랍다.
바다와 강이 만다는 하구. 마치 바다 강은 넓은 호수처럼 드러누워 있다. 산책길이 조성되어 걷기도 자전거 타기도 좋은 길이다. 걷다 보니 오늘은 꽤 멀리까지 나왔다. 돌아갈 일이 까마득하게 느껴지지만. 다시 올 때는 자전거를 타고 와야겠다.
무거워진 걸음으로 책방에 왔을 때는 이미 검푸른 하늘에 어둠 속으로 끌려들어 가 있는 깊은 동굴 앞 같다. 밖에서 들여다보니 세 칸 책꽂이가 꽤 좋은 가림막 역할을 하고 있음을 발견한다. 이제야 내 공간이 바깥 시선에 어찌 보이는지 알게 되다니.
허기진 배를 채우고 커피를 내리고 다시 안과 밖을 나눈 채 혼자다. 불 밝히지 않고 밖을 바라보면 멈춘 거리가 고스란히 보인다. 여전하다.
연애 시작했어.
잘 됐네.
나처럼 이 회사 인턴이야.
자정 가까이 전화를 해 묻지도 않은 말을 한다. 정윤이가 멀리 있다는 실감. 이 시간에 달려올 수도 있었을 텐데. 서울에서는 아무리 멀어도 아파트 근처로 와서는 무작정 불러대던 정윤이다. 귀찮고 성가셔도 밖에 내가 만날 사람이 있다는 게 싫지 않았다.
그래서 왜 전화한 건데?
연애 선언한 지 2주가 지났는데 실수라는 생각이 들거든.
이런. 그럼 그렇게 말하면 되겠네.
못 하겠어 차마.
그 말하려고 이 시간에 전화질이냐?
이재인. 말할 사람이 너 말고 생각나지 않는 걸 어떡하냐?
누가 큰소리 낼 입장인지 기가 막히다.
그냥 듣고 있으면 되는 일이다. 언제나처럼 정윤은 혼자 말하면서 내 생각을 묻는다. 하지만 후에 알게 되기까지 진지하게 말하던 나만큼 그는 행동에 옮기지는 않았다. 적어도 연애만큼은.
이정윤. 너에게는 사람이 왜 그리도 쉽게 붙냐?
난들 아니? 내가 매력이 넘치는 거겠지.
이집트신화가 갑자기 왜 생각이 나는지. 정윤에게 소울 메이트 타령을 하며 아닌 것은 아니라고 말해 주는 게 서로에게 좋은 잘하는 이별이라고 말해준다. 나처럼 잘 이별하지 못해 두꺼운 어둠에 갇히지 말라는 말은 꾹 밀어 넣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