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말의 힘
[인생복습 ④] 사랑 - 애국심
대한민국은 2015년 광복 70년을 맞았다. 1926년 5월 20일 간행된 만해 한용운의 ‘님의 침묵’은 89년 되었다. 나에게 ‘님’은 무엇이며, ‘침묵’은 무엇일까.
나의 詩 읽기는 세대를 달리하며 가슴으로 다가온다. 개인마다 차이가 있겠지만 생애 주기가 절반이 넘어가면 지독한 개인주의자의 대상이 개인에서 사회로 자연스레 나아가는 것인가 보다. 내게 만해의 시가 그러하다. 시뿐만이 아니다. 고전의 의미도 다른 빛으로 폐부를 찌른다. 그렇게 말해 주고 싶은 시간이 와 있었다.
내게 시(詩)는 이해되기 전에 느낌이고, 누군가와 감동의 나눔이다. 나는 사랑 타령이 좋다. 만해 한용운의 '님의 침묵'처럼 늘 타령을 한다. 내게 님은 너무 많아서 늘 님들에게 사랑 타령을 한다. 침묵하는 님이 너무 많은 까닭이다. 내 앞에 반짝이는 그들에 눈과 눈빛, 입과 그 언저리, 눈썹 모양까지, 움직이는 손의 흐름, 그리고 얼굴에 담은 표정들에는 그들만의 세계가 있다. 힐끗 보다가 시선을 거두어야 하는 다른 세계이다.
나는 얄밉도록 변덕쟁이이다. 하루는 님에게 앙탈을 부리다가 또 하루는 지고지순한 사랑의 모습이 되어 웃음을 흘린다. 또 다른 어느 날에는 냉소를 보내며 단절을 선언한다. 다시 또 새로운 날이면 설레는 마음으로 꿈꾸듯이 님을 부른다. 그렇게 지나온 시절들에 쌓인 나만의 아픔에, 아린 상흔들이 모여 굉음을 내며 산화된다. 나는 또 다른 님 앞에 있다.
차가운 심장을 느낀다. 이런 느낌은 일상에서 아주 드물게 다가왔던 것 같다. 적절한 말이 늘 떠오르질 않아 두리번거리면서 그저 깨어 있다. 아무 생각이 없다. 기억상실증. 서가를 둘러본다. 눈에 들어오는 책이 없다는 게 낯설다. 이토록 명료하게 있어야 하는 이런 시간은 예외적이다. 아주 자연스럽다. 그래서 너무 차갑다. 내가 아닌 내가 있었다.
더 좋은 낙관주의가 있을까. 이보다 더 나아질 것 같지 않다면, 그게 낙관이 될 수 있는 걸까. 내가 살아나기 위해, 무얼 인식하거나 이해하기 전에 내게로 오는 느낌이 필요했다. 이해할 수 없어도 느낄 수 있는 것이 더 많았던 시간을 살아왔나 싶다. 늘 나의 님은 갔어도 긍정과 낙관으로 님을 보내지 못하며 그리움에 담아 오래도록 들여다본다.
내가 하염없이 바라보는 나의 님은 여전히 나를 향한 눈빛을 보내지 않는다. 철탑 위에서 소리쳐 불러도, 부정의의 현실을 들이대도, 알바 댓글, 그딴 거로 선전·선동하며 내 귀와 눈을 짓무르게 하지 말아 달라고 목소리 높인다. 그래도 나의 님은 끄떡도 하지 않고 여전히 뒤돌아보지 않는다. 우아한 자태로 격을 높이며 횡설수설로 입심만 부린다.
지금 나의 분노가 모두의 분노로 될 수 있을까. 당분간은 위로하는 나의 울음으로 대신할 수도 있겠다. 님의 침묵은 나의 사랑을 거부하는 몸짓인가. 알 수가 없다. 나의 눈물은 말라붙어 버렸어도 이내 모두의 통곡으로 이 땅을 울릴 것이기에 나는 서럽다. 그래도 멈출 수 없는 님을 향한 짝사랑을 안개로 가득 채워진 이 밤에 여전히 건넨다.
사랑 타령을 가능하게 한 일곱 가지 무지갯빛 이론을 들어 보시라. ‘무지개 사랑학’은 무지개의 일곱 가지 사랑으로 세상을 희망과 행복이 가능한 모두의 정의로운 사회를 지향하는 한 개인의 당당한 사랑이다.
빨강 사랑은 나를 나답게 만든 나를 향한 마음이다. 주황 사랑은 온유한 사랑이다. 내 주변에서 시작되는 사람을 향한 마음이다. 노랑 사랑은 이기적인 마음, 가족, 나의 그대, 나만의 님을 향한 희망과 설렘이다. 초록은 사회를 향한 사랑이다. 개인주의가 굳건하게 만들어진 후에는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을 가지고 사회를 향한 시선을 멈추지 않는 마음이다.
파랑 사랑은 평정을 의미한다. 사랑은 치명적이다. 그것 때문에 한쪽으로 치우치는 마음을 바로잡아주는 마음이다. 남색은 지식을 향한 사랑이다. 평생 공부를 벗 삼아 공부하는 삶을 가능하게 하는 마음이다. 보라색은 빨강과 파랑이 만났을 때 가능한 사랑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완전한 사랑이기도 하고 그래서 무로 돌아가는 ‘0’의 의미이기도 하다.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어 갈 대상을 향한 희망이 실현되는 사랑이기도 하다.
2015년 사이먼 커티스 감독 영화 <우먼 인 골드>는 나치에게 약탈당했던 크림트 그림이 68년 만에 개인에게 국가에서 환수된 E. 랜돌 쉰베르그와 마리아 알트만의 실화이다. 나의 사랑학 이론 중 ‘초록 사랑’을 가장 최근 애증으로 만나게 해 준 영화이기도 하다.
1998년 오스트리아의 이미지향상을 위해 예술품 환수 법률개정을 통해 국가 이미지를 홍보한다. 미국으로 탈출했던 마리아는 그녀의 그림을 환수하기 위해 오스트리아로 간다. 오스트리아에 도착하자 기자 후베르투스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숙모님의 이름과 유대인의 초상화인 것을 숨긴 채 잠깐 다른 이름 ‘우먼 인 골드’로 현재는 벨베데레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지만, 집안의 물건만 훔친 게 아니라 역사에서 지워버린 거죠.”
“무슨 이유로 우릴 도와주는 거죠?”
“아주 특이한 애국심에서 나왔다고 해두죠.”
오스트리아의 기자 후베르투스는 오랜 시간이 지난 후 환수 확정판결을 받은 후 그의 아주 특별한 애국심의 이유를 밝힌다.
“15살에 아버지가 나치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어요. 제3 제국의 열렬한 전사라는 걸,.. 평생 아버지 죄를 갚는 일념으로 살고 있어요. 어떻게 아버지가 그런 짓을 했는지 생각하며 아버지와 반대의 길을 걸으려 노력하고 있죠.”
기자는 아주 오랜만에 조국이 자랑스럽다는 말을 한다. 그래, 그렇지 않던가. 정의를 선택했을 때 국가는 나의 사랑에 응답하는 거다. 나의 짝사랑. 초록색 사랑이 이루어지는 그 순간들이 더 많아지는 세상을 꿈꾸면서 광복 70년의 진실, 사회 정의를 기억하며 나의 애국심은 깊어지는 것이니. 자부심 그것이 국가에 대한 사랑. 이 사회를 사랑하는 마음 아니겠는가.
어떤 사람은 아버지가 배신한 국가에서 그 시절을 반복한다. 자기 삶을 내던지며 아버지 국가를 이용한 거짓 사랑을 답습한다지만, 진정한 사랑을 배우지 못한 선택이라는 점은 확실하다. 그 선택에 많은 사람이 국가에 대한 자부심을 느낄 수 없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