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전적으로 내가 하고 싶은 마음이나 욕구 따위가 기우는 방향을 취향이라고 하던가. 그 취향이라는 것이 얼마나 다양한지 그것이 마구 흔들릴 때 변덕스럽다고도 한다. 그런 의미로 나는 꽤 변덕스러운 인간이다. 책을 선택하는 취향은 작가 중심보다는 제목에서부터 욕구가 일기 시작한다. 한 권 책에서 그 다음 연결고리는 그 책이 마음에 들었을 때 탐구 욕구를 일게 하기에 그 작가에 다른 작품들을 따라가며 읽는다.
영화도 그렇다. 한 편 영화에서 원작으로 그 원작에서 또 이어지는 연결은 한 무더기를 만들곤 한다. 예를 들면 2003년이던가 피터 잭슨 감독의 <왕의 귀환>을 처음 보고 매료되어 시리즈를 다시 찾아보고 나서 영화 원작으로 접근하는 방법이다. 그렇게 돌킨 세상을 만나 '반지의 제왕'시리즈를 읽어야만 했다. 그리고 그 책이 출간되기까지 근원을 찾아 '호빗' 시리즈를 찾아 읽는다.
음악 취향은 너무 변덕스러워서 늘어가는 CD 컬렉션 같아 보이기도 한다. 결코, 수집가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렇기에 음악 장르는 구분되지 않는다. 전혀 상관없다는 말이다. 김경호와 서태지 음반은 거의 다 갖추어 모였지만 그들의 음악만을 듣는 것도 아니다. 음악은 그날 그 시간에서 언제나 다르게 선택되고는 한다. 선택된 단 한 곡 음악이 하루를 채우는 경우도 있지만, 일주일을 그 음반에만 꽂히는 일은 흔한 일이다.
이제 다시 이누도 잇신 감독의 영화 <시니 바나 ; 죽은 뒤의 명예>로 돌아가 본다.
영화에서 살아있을 날이 얼마 안 남았고 언제 치매에 걸릴지 모르니 정신이 맑을 때 자신의 장례식을 미리 준비하는 노인은 그것이 자기 취향이라고 말한다. 아마도 사전에 미래를 대비한 평소 그가 살아온 삶의 모습의 연장선에서 결정된 일로 보였다. 유골 항아리를 사 놓고 장례식에 대한 모든 절차를 미리 계획해 놓는다. 그 후 주변의 노인들에게 미션을 남겨두기도 한다.
자신이 살아온 습관들이 미래의 나를 이루는 중심이 되는 것은 어쩔 수가 없겠지. 이 영화를 보면서 만나는 감정이 지금이기에 가능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나의 취향을 돌아보면 거의 바꾸지 않아도 될 평범한 시간이었나 보다. 다시 말하자면 나를 간섭하거나 나의 취향을 바꾸지 않아도 될 만큼의 환경에 놓였던 것이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렇다. 시간은 신기하게도 내가 느끼는 만큼만 그 흐름을 인지하게 하는 재주를 가졌다.
하지만 시간의 화살표를 되돌릴 복습 인생은 아니고 싶다. 나는 현재에서 지나온 나의 시간을 굳이 다시 꺼내지 않아도 되는 행운아이기에 그렇다고 생각한다. 늘 지금을 살려고 했다. 때로는 무모하기도 했고 대책 없는 사람이 되기도 했지만, 굳이 내일을 위해 쏟을 힘을 남기는 일은 그다지 내 취향이 아니었다고 해야 할까. 죽음은 삶의또 다른 방식이라 생각하기에 나는 죽음을 준비할 생각은 없다.
여기에서 또 다른 취향으로 노인의 시간을 맞고 있는 영화를 들여다본다. 존 매든 감독의 영화 <베스트 엑조틱 메리골드 호텔>이다.
“잘 듣고 배워요. 티는 바짝 말린 허브에요. 그러니 다시 생명을 불어넣으려면 끓는 물에 타야죠. 펄펄 끓는 물이요. 이 나라에선 어딜 가든지 성의 없이 미지근한 물과 티백을 내놓더군요. 그러니 오줌처럼 누런 미지근한 물의 색깔이 변할 때까지 티백을 담갔다 뺐다 해야 하잖아요. 나같은 늙은이한테는 그런 시간도 아까워요."
그 사람 취향이다. 이 또한 그 사람이 살아온 생활 습관 중 하나일 거다. 아마도 바쁜 일상에서 차를 느긋하게 마셔야 할 만큼 시간적 여유가 없었던가 생각한다. 물론 그렇지 않은 습관일 수도 있지만. 나는 차를 거의 마시지 않는다. 티백 차를 우리는 동안을 즐기는 편이아니기 때문이다. 내 취향대로 진행되지 않는 경우도 허다하다. 그래서 타인이 가진 취향을 방해하고 싶지 않아서 애쓰기는 했던 것 같다.
혼자서 살아갈 수 없는 세상이니 적어도 나를 벗어난 공간에서 마주하는 사회생활은 어느 정도의 배려와 관용이 필요하다. 내가 허용하는 만큼 그들도 나를 허용해 주지 않던가. 나는 화를 내는 일을 싫어하는 편이다. 나를 위해서 대상에게 화를 안 내는 거였다. 그 대상을 위해서가 아니었던 것 같다. 분노하는 나의 모습이 가장 마음에 안 드는 이유이다. 이런 이유로 나는 타인에게 착하다는 말을 들어왔던 것일지도 모른다.
나와 다른 사람에게는 차라리 침묵으로 대신하는 것이 좋은 선택이라는 것을 일찍부터 터득했나 보다. 내 눈에 들어오지 않는 대상들에게는 적잖이 무관심했다. 그래야 살아날 수 있었다. 개인 취향마저도 사회적 잣대를 들이대는 여기에서 당신 취향은 안녕하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