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무'라는 잠재적 욕망
[인생 복습 ③] 무기력 - 자기 연민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며 즐겁게 해 온 일들이 일순간 무기력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그때 되돌아보면 그 상황이 오기 전까지 지속하던 순간들이 흔적을 남겨 놓기 마련이었다. 다만 그 흔적을 외면하거나 알아차리지 못한 경우에 후덜덜해져 푹 주저앉는 거였다. 한참을 그 상황에서 휘청거리다가 우울하게 몇 날을 보내고 지인들에게 구원의 손을 내밀기도 한다. 혼자 쌓아놓은 상념들은 의외로 단순하기 마련이었다.
또 언젠가는 가도 가도 끝이 안 보이는 길 위에 서 있다는 느낌의 순간이다. 도대체 이 짓을 내가 왜 해야 하는 거지? 이런 질문의 답을 계속 회피하고 있다가 불쑥 멈추게 되는 때 만나기도 했던 것 같다. 대부분 이런 경우의 무기력은 어떤 대상이나 어떤 일들에서 만족감이 바닥을 드러낼 때 찾아드는 거였다. 이렇게 찾아온 무기력은 뜻밖에 간단하다. 만족감이 없다면 안 하면 되는 일이었다.
오랜 시간 가까이 있는 대상이 정체불명으로 느껴지는 순간 끊임없이 손짓하며 말을 건네는 일이 한순간 멈춰질 때도 무기력해진다. 친근했던 대상이 아주 멀리 있다는 실감이 들 때도 불현듯 무기력해진다. 그러고 보면 이 무기력은 일상에서 순간순간 일격을 가하는 침입자와 같았다. 그 침입자에 맞서는 일이 삶이란 건가 싶다. 은연중에 방어책으로 기운이 팔팔 살아날 영화를 찾게 되는데 신기하게도 심리적으로 찾아내는 영화마저도 무기력을 더하는 경우가 있다.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 감독의 대표작으로, 원 제목은 ‘일식’인데 한국에서는 1964년 말도 안 되는 영화 제목 ‘태양은 외로워’로 상영되었다. 프랑스 배우 알랭 드롱의 다른 영화를 떠올리게 하기 위해 그리 됐다는 말도 있다. 오독이 아닌 하나의 전술로 스며든 번역의 묘미쯤으로 해주자. 제목과 상관없이 흑백영화가 주는 영상의 단조로움은 현란함에 찌들 대로 찌들어 자극을 주지 못한다.
가끔 흑백영화는 이미 무기력에 빠진 시간을 벗어나려는 내 의지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오히려 막아버리기도 한다. 이 영화로 나의 무기력은 자기 연민까지 이르게 되고 이 알 수 없는 우울함에 다시 고꾸라지기도 했으니까. 평소 내게 영화는 적어도 무기력을 벗어나는 약간의 변화를 주는 대상일 수 있었는데 아니었다. 익숙한 대상에게서 위안은커녕 빨려 들어가게 만드는 촉매제가 되어 버리기도 한다.
‘무기력’이라는 말 자체에서 묻어 나오는 기운도 그렇다. 이런 시간이 최근에는 개인적인 문제보다 사회적인 이유가 무척 많았던 것 같은데 내 삶에 무기력을 건네는 주범은 한국사회의 정치판이었다. 2007년부터 이어지는 선거의 결과에서부터 가장 크게 무기력으로 저 바닥까지 고꾸라졌던 2012년 대선까지. 그 여파는 전방위적으로 무럭무럭 번지고 있고 그 모양새에 무기력해지기도 한다.
내가 이렇게 한들 뭐가 바뀌겠어...
정부의 행태에서 반복되는 사회 부정의에 무기력한 나와 일상에서 번지는 슬픈 감정이 자기 연민으로 번지는 기운까지 합세한다. 결국, 무기력증은 감흥 없이 무감각해진다. 그런 일상이 반복되는 가운데 스스로 부여하는 의미들을 부여잡고 싶은 마음을 채우는 일을 시도하기도 한다. 포기하느냐 다시 찾아 나설 선택을 하느냐는 평소 내가 쌓아둔 ‘열정’이라는 힘에 의지하게 되는 것 같다. 열정, 아름다운 말이다.
그.러.나.
말의 힘을 잃은 사회에서 열정은 립 서비스
그래도 립 서비스를 이용해 내 안의 힘을 밖으로 꺼내보려고 기를 쓰기도 한다. 주위를 둘러본다. 내 삶에 지속 가능성을 주어 이 무기력을 딛고 일어날 무언가가 있어야 했다. 없다. 앉아만 있어도 주룩 흐르는 땀이 싫다. 여름이 싫다. 또 뭐가 있을까 머릿속을 두리번거린다. 그래, 퀸의 보헤미안 랩소디를 들으면 나아지지 않을까? 흠, 귀찮다. CD를 찾아 플레이하는 일. 그 걸음걸이가 나에게서 시작되었다면 끝이 안 보여도 지속할 수 있는 선택의 가능성을 찾아보려고도 한다. 휴우. 그냥 이렇게 있지 뭐.
살바도르 달리의 <기억의 영속>
무기력은 다양한 상상력으로 표현되거나 대체할 수 있었다. 내 일상에서도, 누군가의 예술 작품으로도 표현되어 무기력을 벗어나려는 노력이 계속 이어져 왔다고 볼 수 있다. 무기력을 따라가 보면 그 끝에는 허무와 죽음이 있다. 하지만 무기력은 마지막에 자신도 알 수 없는 삶을 포기하는 선택, 엄청난 용기를 건네기도 하는 강한 힘이기도 하다. 이런 정체불명의 무기력은 대체로 자신을 주인공으로, 더는 상상할 수 없을 때 만나기도 한다.
인생 복습을 시도하고 있는 내게 이누도 잇신 감독의 영화 <시니 바나>는 의미심장하다. 영화에서 장수원(고급 노인 요양원 형태)의 노인들은 세상과 단절된 안락한 환경에서 죽음을 막연히 기다리는 정적인 시간의 무기력함을 보여 준다. 이 글을 이어가면서 대비되며 떠오른 또 다른 시선의 영화는 존 매든 감독의 <베스트 엑조틱 메리골드 호텔>이다. 그들은 남은 노년의 시간을 역동적으로 보여 준다. 그런데 한국 사회를 돌아보면 노인에 대한 공경과 효가 생활 정서에 녹아있음에도 실상 노인은 단순히 ‘쓸모’에 의해 그 시선을 달리한다.
노년에는 돈이 있어야 해.
한국 사회에서 노년은 여러모로 무기력한 존재이며 회의적이다. 사회의 강자가 되어있지 않다면 그나마 인간 존엄은 별 볼 일 없게 되는 것 같다. 세대 간의 이해할 수 있는 공감대가 너무 적어서 그 단절의 벽을 넘으려 하지 않는다면 노년은 죽음으로 가는 문턱에서 죽음을 구걸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이 현상은 세대 간의 공감대를 형성할 수 없었던 사회 정서를 굳건하게 지키려는 권위주의자들의 결과물이기도 하다.
노후 준비를 돈이라고 생각하지 못한 나의 노년은 아예 시작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래, 달리의 그림에서 만나게 되는 나의 무기력은 자기 연민으로 오는 일상에서 실현하고 싶은 잠재적 욕망의 초현실주의일지도 모른다. 현실을 초월하며 살아가는 것도 나쁘진 않아. 인생 복습 시기를 맞은 나는 내 안에 은밀하게 누워있는 욕망을 부추기며 살아내고 싶긴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