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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당

아는 사람만 아는 곳

by 이창우

책방은 어떤 면에서는 꽤나 은밀한 공간이 되기도 한다. 꿍짝이 잘 맞는 둘이면 하나의 세계가 만들어지기도 한다. 탕수육을 먹는 일에서 조차 찍먹이냐 부먹이냐 수다를 떨면서 시작되는 이야기다.


자주 일어나지는 못하지만 가끔 맞아떨어지는 우리가 있으면 하늘이 빠르게 갈라지면서 달라 보인다. 작당모의가 웃자고 하는 말이 아니라 실행까지 된다면 멋지기 때문에 놀러 오는 사람이 있게 마련이다.


잡동사니처럼 다락방에 자리 잡은 물건들이 친숙하게 느껴지면 삐딱해지고 싶은 마음이 생기기 마련이다. 개구쟁이인 적은 없었던 유년의 기억을 소환하면 묵직했던 주머니 불쑥 튀어나온 바지 옆구리가 보인다.


길을 걸어가면서 주워 담았던 작은 돌멩이들을 씻으면 여러 모양의 공깃돌이 된다. 다락방 바닥에 깔아놓은 엄마가 아끼던 담요가 많은 공기 놀이터가 되는 순간인데 슬프게도 도무지 떠오르지 않는 얼굴들이 있다.


지난 시절 한 순간이 현재와 마주하면서 집안에서 부모님 모르게 해 왔던 은밀한 많은 공기놀이처럼 아직까지 남아있는 추억이라는 그리움이 흑백사진으로 채워지면 웃을 수 있으니 그것으로 되었다.


작당하고 겨울을 도모하고자 했던 짧은 가을이 지나가 버리고 겨울 초입을 망쳐버린 12.3 비상계엄이 1년이다. 사회가 개인의 영역을 이토록 과감하게 침범할 수 있는 일이 어떻게 가능했을지 365일을 지켜보고 있다.


한 해를 돌아보며 다음 해를 기대하는 내 나름의 겨울맞이는 절단되고 말았다. 이 역시 외부 요인으로 내 의지는 전혀 반영되지 않았다. 수동적이지는 않은 삶이었음에도 무력한 개인으로 전락이었다.


삶은 겪을 것을 치르면서 성장한다고는 하지만 웬만하면 겪지 않아도 될 일은 선택할 여지가 있다고 늘 생각해 왔다. 거대한 충돌 앞에서 피하기보다는 마주함이 더 낫다고 인정하는 편이다.


충돌하는 사회와 개인의 힘겨루기는 애당초 가능하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 최소한의 나를 지켜내는 일에 현실은 걸림돌이 되기는 해도 뛰어넘을만하다.


낮은 담장을 넘으려는 일은 한순간의 집중과 도움닫기에 힘을 줄 내 안에서 만들어내는 용기에서 나온다. 그 힘을 잃어버리지 않으려는 노력은 내게 형성된 이론, 내 삶의 철학에서 비롯된다.


작당이 가능한 은밀한 공간에서는 아마도 백장미의 향기가 차오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적어도 내가 머물고 있는 이 지역의 정서에서 백장미의 힘이 모아지리라는 희망사항으로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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