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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C Apr 25. 2016

차가운 도시, 상트페테르부르크 : 러시아

이곳에 다시 온다면 그 계절은 분명 겨울이 될 것이다.

모든 위대한 여행자가 그러했듯이,
 나는 내가 기억한 것보다 많은 것을 봤으며 
내가 본 것보다 더 많은 것을 기억한다.

- 벤저민 디즈레일리

    상트페테르부르크는 러시아의 시작이 될 수도 있고 끝이 될 수도 있는 도시이다. 유라시아 대륙의 동쪽 끝, 우리나라와 가까운 블라디보스토크에서부터 시베리아를 가로질러 온다면 이곳 상트페테르부르크는 러시아의 끝이자 유럽으로 들어가는 관문이 될 것이다. 하지만 나처럼 유럽에서 러시아로 넘어온다면 상트페테르부르크는 러시아 여행이 시작되는 곳이다. 지구에서 가장 넓은 영토를 가진 나라의 서쪽 끝. 어쩌면 북쪽 끝이라고 해도 될 법한 곳에 과거에 '러시아 제국'이라 불리던 나라의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가 있었다.

  


0 장소 :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핀란드만(Gulf of Finland)을 지나온 것이 불과 몇 시간 전이었지만 그것이 꼭 꿈만 같이 느껴졌다. 탈린을 떠나 러시아로 오는 길에 보았던 핀란드만의 풍경. 새벽 4시, 잠결에 눈을 떴을 때 창밖으로 보이던 바다는 선홍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그것이 수평선 너머에서 떠오르는 태양 때문인지 아니면 수평선 아래로 사라져버린 태양이 만들어내는 색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백야의 태양빛이 푸르스름한 옥빛 바다와 하늘에 스민 모습은 이 세상의 것이 아닌 것 같아 보였고 나는 그 환상 속에서 밤새 빠져나오지 못했다는 것이다. 


  내게 있어 상트페테르부르크는 꼭 거쳐가야 할 도시였고 한편으로는 아쉬움이 남는 도시였다. 하루 종일 내리는 비. 비를 맞으며 시작한 러시아 여행이었다. 나무로 된 호스텔의 마룻바닥은 축축했고 커다란 건물은 눅눅한 공기로 가득 차 있었다. 나는 마트에서 사 온 음식을 데워 먹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갑작스러운 추위는 나를 움츠려 들게 만들었고 나는 침대 속으로 들어갔다.   


※ 네바 강에서 바라본 겨울궁전
※ 펠리스 광장에서 바라본 겨울 궁전

※ 에르미타주 박물관(겨울공전)으로 들어가기 위해 줄을 서 있는 사람들(왼쪽). 펠리스 광장의 풍경(중간/오른쪽).

※ 해군성(Admiralty) 앞의 청동기마상. 표트르 대제가 말을 타고 유럽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모습이다. 상트페테르부르크는 습지를 매립하여 만들어진 도시인만큼 도시는 운하가 많다. 백야에 운하를 타고 도시를 둘러보는 것도 하나의 낭만이다. 해가 지지 않는 밤 운하에서 배를 타는 모습(오른쪽/사진.뉴욕타임즈)


  눈을 떴을 때도 잿빛 구름은 사라지지 않았다. 이틀이 지나고나서야 나는 상트페테르부르크의 파란 하늘을 볼 수 있었다. 바람이 세차게 부는 거리. 구름이 빠른 속도로 도시의 하늘을 훑고 지나갔다. 피부에 닿는 바람은 차가웠다. 6월 중순에 불어오는 바람이라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그런 바람이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는 운하가 많았고 나는 운하 사이를 지나 겨울궁전을 향해 갔다. 에르미타주 박물관으로 불리는 겨울궁전. 이 차가운 도시와 너무나도 잘 어울리는 이름의 궁전이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러시아의 거대함을 잘 보여주는 규모의 박물관이기도 했다. 


  도시 곳곳에는 표트르 대제의 흔적이 배어 있었다. 어쩌면 표트르 대제의 흔적이라기보다는 서유럽의 흔적이라 말 할 수도 있을 법했지만 어쨌든 이 도시는 표트르의 도시였다. 그는 상트페테르부르크를 이야기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유럽과 맞닿은 이 도시는 러시아 제국의 서구화 정책 추진을 위한 핵심 도시였으며 유럽 진출의 발판으로 삼기 해서 만든 계획도시이다. 상트페테르부르크라는 이름은 성 베드로의 도시(St.PetersBurg)라는 의미이며, 어린 시절 유럽의 선진국들을 여행했던 표트르 대제가 러시아를 유럽 최고의 국가로 만들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만든 도시인만큼 유럽의 느낌이 물씬 풍기면서도 한편으로는 러시아만의 독특한 느낌이 강하게 묻어나는 곳이기도 하다.   

※ 네바 강을 가르는 다리. 바람이 세차게 불고 있다(왼쪽). 네바 강변에 정박해 있는 범선(오른쪽).

※ 겨울 궁전 건너편, 바실예브시크 섬은 활기가 넘쳤다. 웨딩 촬영을 나온 신부가 있었고 거리의 악사들이 아코디언을 연주하고 있었다.

 ※ 피터와 폴 요새

 겨울 궁전의 뒤쪽으로 흐르는 네바 강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궁전을 집어삼킬 듯했다. 물결이 넘실대는 강을 건너면 페트로파블롭스크 요새(피터와 폴 요새)가 있다. 사람들은 요새 주변을 거닐며 산책을 즐기고 있었다. 강 건너 겨울 궁전에서는 느낄 수 없던 여유가 있는 곳이다. 요새 옆 광장에서는 아코디언 악사들이 만들어내는 음악이 울려 퍼졌고 청춘남녀들은 연인을 기다리거나 데이트를 즐기고 있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카잔 대성당과 피의 성당을 둘러보는 일을 빼놓을 수 없었다. 시내 중심가에 위치한 카잔 대성당은 바티칸의 성 베드로 대성당을 본떠 만든 곳인 만큼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상징적인 건물이라고 할 수 있었다. 도시의 다른 건물들과는 그 모습이 다르기 때문에 눈에 띄는 건물이기도 하지만 그 어마어마한 규모가 보는 이의 시선을 압도한다. 한편, 시내의 운하를 따라가다 보면 피의 성당을 만날 수 있다. 한 눈에 봐도 러시아스러운 건물. 러시아 정교회의 상징적인 건물이라고 할 수 있는 '피의 성당'이다. 이 성당의 모습은 동화 속 혹은 신밧드의 모험 같은 만화에서나 나을 법한 모습을 하고 있는데, 정식 명칭이 '피 흘리는 사람의 구세주 성당(The Church of our savior on the spilled blood)'인 만큼 실제 역사 속에서도 '피(Blood)'와 관련이 깊은 곳이다. 내가 마침 이곳을 찾았을 때 잿빛 구름이 몰려와 우중충한 분위기를 만들어 버려 피의 성당은 우울해 보였다.(피의 성당과 관련된 이야기 - 나무 위키)


※ 카잔 대성당.

※ 운하 저 끝에 피의 성당이 보인다.

※ 성 이사악 대성당. 황금색 돔이 두드러지는 성당이다. 거리에서 한 예술가가 이사악 대성당을 그리고 있다(오른쪽).


  대륙의 북서쪽 끝에 있는 도시는 차가웠지만 아름다웠다. 이곳을 다시 찾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6월 중순의 날씨조차도 차가웠지만 이곳에 다시 온다면 그 계절은 분명 겨울이 될 것이다. 추위와 너무나도 잘 어울리는 이곳 상트페테르부르크는 겨울에 마주했을 때 더 아름다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 답다. 나는 이 말을 좋아한다. 가끔 누군가로부터 "너 답다"라는 이야기를 들을 때면 그 의미가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괜스레 기분이 좋아진다. 긍정의 '너 답다'는 말은 "너만의 매력이 있다"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남들과는 다른 나만이 가진 매력. 나만의 향기를 다른 사람들이 느낀다는 것이다. 

  여행을 하다 보면 가끔씩 어떤 도시나 마을에서 그곳만이 가진 독특한 향기를 맡을 수 있다. 향기는 여행자들이 그곳에 더 오래 머물고 싶게 만들며 더 자세히 들여다보고 싶은 마음이 들게끔 한다. 너 다운 매력이 있는 도시에서 여행자들은 발길을 멈추게 된다.


  상트페테르부르크도 너 다운 매력이 있는 곳이었고 나는 이곳에 더 머물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나에게는 시간이 별로 없었다. 이제 곧, 시베리아 횡단 열차가 유라시아 대륙의 동쪽을 향해 떠날 시간이었다.

※ 모스크바로 출발하는 열차가 있는 '모스카바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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