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LC Apr 22. 2016

기다리지 않으면 로맨스는 없다 : 에스토니아 탈린

이야기는 같은 여행지를 선택했다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유럽에서의 마지막 밤에 누군가를 만났어.
믿을 수 있겠어?

- 영화, '비포 선 라이즈'.

  혼자 떠나는 여행이 설레는 이유는 만남에 대한 기대가 있기 때문이다. 혼자라는 것은 때론 두렵고 외로운 일이지만 또 다른 누군가를 만나 함께할 수 있는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우리는 여행에서, 나는 아닐 것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누군가를 만날 수도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갖는다. 내가 로또 1등이 되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로또 종이의 숫자를 보며 내심 1등이 되면 무엇을 할까를 상상하는 것처럼 말이다. 우연이든, 혹은 우연을 가장한 필연이든 여행지에서 누군가를 만나 이야기를 나눌 때. 최소한, 둘 사이에는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한 가지 통하는 사실이 있다. 이야기는 같은 여행지를 선택했다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0 장소 : 에스토니아 탈린-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탈린에서의 하루도 저물어갔다. 발틱 3국을 여행하며 일주일 내내 찌뿌둥한 하늘을 보게 되면 어쩌나 하는 걱정을 했지만 탈린은 나의 걱정을 말끔히 씻겨주었다. 발트해에서 불어오는 산뜻한 바람. 기분이 좋아질 수밖에 없는 탈린이었다.

 

  러시아의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떠나는 버스를 타기 위해 나는 탈린의 버스 터미널로 향했다. 밤 11시 20분 버스, 오랜만에 야간 버스를 타고 이동하는 것이었다. 여행자들, 특히 동양인 여행자들에게 악명이 높기로 유명한 러시아였기에 약간은 긴장한 상태로 터미널에서 버스를 기다렸다.

  도시의 크기만큼이나 아담한 탈린의 버스 터미널은 대합실과 승강장이 커다란 통유리로 구분되어 있었다. 대합실에 앉아 있는 사람들은 승강장으로 들어오는 버스를 볼 수 있었고 승강장 앞을 걸어가는 사람들을 볼 수도 있었다. 물론 반대로 승강장에서도 대합실을 볼 수도 있었다.

   종종 배낭여행객들이 탈린에서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넘어간다고는 했지만, 그날 밤 커다란 배낭을 메고 터미널을 찾은 사람은 나 혼자였다. 나는 대합실에 앉아 버스가 플랫폼으로 들어오기를 기다렸다. 11시가 다 되어갈 무렵 대합실의 전광판에 내가 타야 할 버스가 도착했다는 메시지가 떴다. 승강장에는 내가 타야 할 버스가 불을 밝히고 서 있었다. 그때, 커다란 배낭을 메고 통유리창 너머를 걷고 있는 한 여행자를 보았다. 유리창 너머에 비친 그녀의 모습. 그녀는 내 앞을 스치듯 지나갔고 내 시선은 그녀의 뒷모습을 좇았다.


  길게 풀어헤쳐진 검은 생머리. 160cm 정도 되어 보이는 키를 가진 크지 않은 체구의 그녀. 몸집에 비해 커 보이는 붉은색 배낭. 하얀색 피부에 검은 눈동자를 가진 그녀를 발견한 나는 갑작스레 설레어왔다. 그녀를 자세히 볼 틈이 없었기에 어느 나라 사람인지 선뜻 가늠되지는 않았지만 하얀 피부와 유난히 진했던 눈동자 그리고 커다란 배낭을 메고 당차게 걷는 그녀는 한국 사람이라기보다는 일본인이나 하얀 피부의 히스패닉처럼 보이기도 했다. 언제부턴가 큰 배낭을 메고 당돌하게 여행을 하는 여자들에게 큰 매력을 느끼고 있던 나로서는 반가운 만남이었다.


※ 밤 11시. 아직은 밝은 빛이 감도는 탈린이다. 붉은 배낭을 멘 그녀가 버스쪽을 향하고 있다.


  나는 버스를 향해 걸어갔다. 그녀는 버스에 오르지 않고 서 있었다. 우리는 가볍게 인사를 나누며 서로를 바라보았다. 버스 기사는 나의 버스 티켓을 확인하더니 짐칸에 배낭을 넣었고 버스에 오르라고 했다. 출발시간까지는 20분 남짓 남아있었다. 그녀는 버스 짐칸에 배낭을 싣지 않았고 버스에 오르지도 않고 있었다.

  그녀는 버스 기사에게 티켓을 보여주며 무언가를 이야기하고 있었고 버스 기사가 표정을 찌푸리며 단호하게 "No"라고 말하는 것이 들렸다. 그녀는 대합실과 승강장 사이를 몇 차례 왔다 갔다 했고 다시 버스 기사와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버스 기사는 얼굴을 잔뜩 찌푸릴 뿐이었고, 그녀도 실망 섞인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버스의 창을 통해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나는 버스에서 내려 그들에게 다가갔다.

  무슨 일이냐는 나의 물음에 그녀는 아쉬움 가득한 표정으로 내게 상황을 설명해 주었다. 그녀가 가진 티켓은 내 것과는 다른 것이었다. 목적지는 나와 같은 상트페테르부르크였지만 그녀는 내 버스보다 30분 늦게 출발하는 버스의 티켓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티켓을 바꾸기 위해 터미널의 매표창구로 갔지만 밤늦은 시간이라 국내선 티켓 창구에만 직원이 있었고 국제선 티켓 창구 직원들은 모두 퇴근하고 없었기에 티켓을 바꿀 수 없었고 새롭게 구입할 수도 없었다. 그녀는 버스 기사에게 지금 출발하는 이 버스를 타게 해 달라고 졸랐지만 그는 단호하게 거절을 하며 "노"라고 말하고 있었던 것이다.

  버스 안에는 5명이 앉아 있었다. 나는 자리도 많이 남는데 같이 타고 가면 되지 않겠느냐고 부탁을 해 봤지만 버스 기사는 완고했다. 그는 이제 곧 버스가 출발해야 하니 나에게 빨리 버스에 오르라면서 우리 둘 사이를 갈라 놓았다.    


  그녀는 올드 시티의 언덕 위에서 나를 보았다고 했다. 언덕 위, 구시가가 한 눈에 바라보이는 포토존에서 내가 외국인 커플 사진을 찍어줄 때 바로 내 뒤에 있었노라고 했다. 그리고 구시가를 돌아다니는 나를 종종 보았다고 했다. 혼자 이곳저곳을 두리번거리며 거리를 쏘다니는 내게 말 붙일 기회가 없었다고 했다. 그리고 이곳, 버스터미널에서도 이야기를 나눌 시간은 많지 않았다. 나는 버스에 올라야 했다. 버스의 엔진은 우렁차게 움직이고 있었다. 나는 아쉬운 마음을 안고 버스에 올라 그녀를 바라봤다. 그녀 역시 벤치 앞에 서서 나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새까만 눈동자는 옅은 어둠 사이에서 더욱 도드라졌다.


  그녀가 갑자기 배낭을 뒤지더니 메모지와 펜을 꺼내 무언가를 적었다. 그러고는 버스 안으로 뛰어올라왔다. 버스 기사가 뭐라고 소리쳤지만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러고는 내 손에 메모지 한 장을 쥐어주며 말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봐"

  문이 닫혔고 버스는 승강장에서 조금씩 멀어져갔다. 그녀는 내게 미소를 보이며 손을 흔들었다. 나도 그녀에게 손을 흔들며 말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버스가 터미널을 벗어났을 때 그녀가 전해준 종이를 펼쳐 보았다. 베레나. 그곳엔 그녀의 이름과 페이스북 주소가 적혀있었다.


  버스는 6명의 승객을 싣고 선홍색으로 빛나는 발트해를 곁에 두고 달렸다. 어둠이 찾아오지 않는 대륙의 북쪽 끝. 겨울 궁전이 있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도착했을 때는 진눈깨비가 날리고 있었다. 버스는 얼마나 빨리 달렸던지 도착 예정 시간보다 두 시간이나 일찍 도착했다. 탈린을 떠날 때 30분만 기다리면 되겠다는 생각을 했던 나로서는 당혹스러운 일이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추위를 이겨낼 재간이 없던 나는 도저히 두 시간을 버틸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녀에게 페이스북으로 연락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한 나는 추위를 핑계로 지하철을 타고 호스텔로 향했다. 호스텔에서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한 뒤, 거주 등록을 했고 그제야 정신이 좀 든 나는 그녀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추위와 씨름하던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의 하루가 완전히 지나갈 때까지 그녀로부터 답장은 오지 않았다.

※ 상트페테르부르크에는 진눈깨비가 흩날렸다.





매거진의 이전글 백야의 도시에 찾아온 봄 : 에스토니아 탈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