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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선준 Mar 17. 2020

직장생활 길어질수록
꼰대가 되는 결정적 이유

언니들의 슬기로운 조직생활

꼰대의 변:

반항아였던 김 부장은 어쩌다 꼰대가 되었나


신입 사원 시절의 나는 윗사람에게 맞서는 게 두렵지 않았다. 이치나 상식에 맞지 않는 이야기를 하는 대리나 과장에게 조목조목 따지고 끊임없이 질문해대던 직원이었다. 임원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다. 지적이 억울할 땐 상사를 불러내서 이건 아니라고 이야기할 수 있었고, 여자라고 무시하는 이들에겐 무시하지 말라고 대차게 반항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나에게 “언니, 만약 그런 대찬 사람이 후배로 들어온다면 어떨 것 같아요?” 하고 누군가 묻는다면 “저런 싸가지 없는 아이가 있나” 하고 혼낼 것 같다고 대답한다.



물론 농담 삼아 웃으며 말하긴 하겠지만.

직장생활을 20년 가까이 한 지금, 내가 달라진 건 사실이다. 좋게 말하면 철이 들었다고 할까, 좀 나쁘게 얘기하면 세속적으로 됐다고 해야 할까. 당돌한 ‘요즘 것들’을 보면 나의 어린 시절과 별반 다르지 않다고, 오히려 당시의 내가 더 당돌했다고 자신할 수도 있는데, 세월이 지났어도 나는 여전히 불의와 싸우는 여전사처럼 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리고 난 정말 후배 직원들에게 쿨하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날 갑자기 내 생각이 꼰대 같다고 느껴지고 그 사실을 절감할 때마다 기분이 결코 유쾌하지 않다.


생각이 유연하면 나한테도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기에 유연해지고자 많이 노력하는 편이라고 철석같이 믿었다. 문제는 20대나 30대하고 얘기하다 보면 ‘나도 꼰대가 되어서 이런 얘기를 들으면 불편한 건가?’ 하는 지점들이 점점 많아진다는 것이다.



김 부장은 성장이 없는 시대를 겪어보지 않았다


최근 커리어에 관해 30대들과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항상 ‘노력=성공’이라는 공식을 믿는 나는, 되는 일이 없다며 힘들어하는 후배가 안타까워 조언을 해주고 싶었다. 좀 더 긍정적인 마음을 갖고 노력해보라고 했다. “나도 여기까지 오기 위해 죽을 만큼 노력했어”라고 덧붙인 게 화근이었을까. 후배는 “죽을 만큼 노력해도 세상이 보상해주지 않는 경우도 있어요”라는 말로 답했다. 그들은 내가 ‘노력한 만큼 보상이 되돌아오는’ 시대를 살았기 때문이라며 동의하지 않는 눈치였다. 맞다. 난 그들이 경험한 세상, 성장이 없는 시대를 겪지 않았다. 그런데도 나는 그들이 살 수 없었던 시대의 기준으로 이야기를 한다.


나도 모르게 튀어나오는 얘기들이 그 옛날 내가 그토록 듣기 싫어하던 잔소리와 닮았다는 걸 느낄 때마다 놀라곤 한다. 아래 세대에게 쿨하게 보이고 싶지만 세월이 주는 무게감이라는 건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을 최근 들어 자주 하게 된다. 그리고 어느 순간, 이른바 ‘꼰대’라 불리는 사람들이 한편으론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 가끔은 연민도 든다. 심지어는 ‘나도 꼰대가 되어야 하나’ 하는 씁쓸한 생각이 들 때도 있다.


요즘에는 일상이 되다시피 한 대형마트도 해외여행도 없던 시절의 옛날 옛적 무용담을 늘어놓는 것만이 꼰대는 아니다. 권위가 전부라 믿으며 견고한 위계질서에 안주하는 사람들도 꼰대다. 그런데 오로지 할 줄 아는 것이라곤 아랫사람 갈아 넣는 것과 윗사람 비위 맞추는 것밖에 없던 사람이 차장 시절부터 팀장 보직을 받는 걸 보면서 여전히 위계질서와 군대 문화가 견고하다는 생각에 씁쓸할 때가 있다. 리더십의 도구로 권위밖에 쓸 줄 모르는 사람들이 더 높은 자리로 가고, 복종을 강요할수록 더 많이 복종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대다수인 조직에서 ‘내가 꼰대가 되지 않고 견딜 수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꼰대는 시스템이 만든다. 나는 감히 변명하고 싶다. 90년대의 X세대를 누구나 기억할 것이다. 노란 머리를 하고 배꼽티와 힙합 바지를 입고 압구정을 누비던 세대, 꽉 막힌 시스템을 당장이라도 깨부술 것 같았던 ‘서태지와 아이들’의 가사를 내면화하며 젊음을 보낸 그 세대가 지금의 차장, 부장이다.



수십 년간의 조직생활에서 얻은 것


20여 년간의 조직생활은 내게 깎이고 타협하고 적당히 포기하는 법을 배우게 했다. 세월의 무게감에, 견고한 질서와 권위의 안락함에 저항하기 쉽지 않은 건 사실이다. 물론 나이가 들어도 부당함에 맞설 수 있는 ‘똘기’와 정의를 마음에 품고 살 수는 있다. 아니, 그러고 싶다. 하지만 가끔 우리 할아버지의 말씀이 떠오른다. 젊을 때는 가슴이 뜨거워야 하지만, 나이가 들면 머리가 차가워질 필요가 있다는.


어쩔 수 없이 꼰대가 되어가고 있는 것 같지만 최대한 유연해지려고 노력하며 ‘꼰대의 변’을 쓴다. 그리고 큰 조직에서 살아가는 용기 있는 이들이게 덧붙인다. 꼰대가 되고 싶지 않다면 마음 단단히 먹자고, 우리. 모르는 새 경직된 시스템에 길들어가는 내 유연함을 지키자고.



‘그만둬?’와 ‘가만히 계속 참아?’ 사이의
가장 슬기롭고 현명한 조직생활


*이 글은 <언니들의 슬기로운 조직생활>에서 발췌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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