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까지가 최선일까
"자기는 보면 늘 이런 공포마케팅에 잘 휩쓸리는 거 같아"
며칠 전 저녁, 내가 보낸 링크를 열어 본 남편이 툭 내뱉은 한 마디가 내 마음을 건드렸다. 남편이 요리할 때마다 종종 쓰던 코인육수에 좋지 않은 성분이 들어있다는 피드였다. 알고 있으라는 의미에서 보내준 거였는데 피드 뒤쪽에 공구하는 코인육수가 소개되어 있었다. "역시 공구글이었네. 그럴 줄 알았어."
공구 피드인지도 몰랐다. 아마 알았다고 해도 그것을 사자는 말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저 우리가 사용하는 그 코인육수에 똑같은 성분이 들어있는지 확인해 보자는 뜻이었다. 그 위험성을 알고서도 입에 넣을 사람은 아무도 없을 테니까. 그런데 남편은 이런 나를 줏대 없이 공포마케팅에 휘둘리는 사람으로 단정 지었다. 그래, 한동안 잊고 지냈는데 우리는 늘 이런 식이었다. 남편에게 나는 늘 예민하고 불안이 많은 사람이었고, 나에게 남편은 무심하고 즉흥적인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게 바로, 내가 남편에게조차 육아를 전적으로 맡기지 못했던 근본적인 이유였다. 믿을 수 없었다. 이 사람이 나만큼 안전하게 아이를 돌볼 수 있을지에 대해서.
아이가 기어 다니기 시작하면 위험할까 봐 유아 매트를 구매하자고 했을 때도 남편은 우리 땐 이런 거 없이 잘만 컸다고 이야기했다. 이유식을 시작하면서 사들인 아이 전용 냄비와 식기들을 우리 것과 철저히 구분해서 세제까지 따로 사용했을 때도 남편은 이해하지 못했다. 알고 있었다. 나의 모든 행동을 유난스럽다고 생각했다는 걸. 다만 남편은 가정의 평화를 위해 많은 것을 묵인했고, 나는 그의 비자발성을 모르는 척하는 것으로 암묵적인 합의가 이루어졌다. 그러다 그가 무심코 이유식 냄비에 라면을 끓이던 날 참았던 모든 것이 봇물처럼 터져 나왔다. 격하게 화를 냈다. 남편은 아직도 그날을 잊지 못하겠다고 한다. 작은 실수를 했을 뿐인데 그렇게까지 화낼 일이었나 싶은 것이겠지. 그렇지만 그 분노는 단순히 이유식 냄비에 라면을 끓인 행위로 인한 것이 아니었다. 아이를 위해 밤잠 설쳐가며 열심히 공부하고 검색했던 나의 노력을, 나의 최선을 '유난'이라는 단어 하나로 싸잡아 후려친 지난날의 남편에 대한 분노였으니까.
우리는 정말, 너무나도 다른 사람이다. 나는 모든 일에 최선을 다했다고 느끼지 않으면 스스로를 용납할 수 없는 사람이고, 남편은 조금 더 현실적인 사람이다. 유기농 채소가, 유해물질이 없는 프리미엄 유아매트가 좋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더 질 낮은 것을 살 수가 없었다. 반면, 이 집안의 가장이었던 남편은 경제적인 부분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어떤 것이 아이에게 가장 좋을까를 물었다면, 남편은 우리에게 가능한 선택은 무엇일까를 고민했다. 그것이 바로 우리 둘의 차이이자, 갈등의 시발점이었다. 남편은 늘 대안을 고려하는 사람이었고, 나는 마음에 들고, 옳다고 판단하면 반드시 해야 하는 사람이었다. 남편에게 선택은 여러 가능성 중 하나였지만 나에게 선택은 일종의 기준이었다. 한 번 선택한 것을 되돌리는 것이 이전의 내 판단을 부정하는 것처럼 여겨졌다. 그렇게 몇 년을 싸우다 서로 합의점을 찾아 평화가 만들어졌는데 그날 남편의 말로 트리거가 당겨졌다. 늘 나의 최선을 유난으로 매도했던 그 당시의 남편에게.
그 당시 왜 그렇게 '혼자' 힘들었는지 생각이 영 떠오르지 않았는데 반갑지 않은 우연이지만, 남편의 그 말 한마디로 과거의 우리를 떠올릴 수 있었다. 스스로도 지키기 버거운 기준을 세워두고 그 기준을 충족하지 않으면 곁을 내어주지 않던 나는 자발적인 독박, 아니 고립 육아를 하고 있었던 거다. 아이를 위해 나만큼 공부하고, 나만큼 애써줄 사람은 없을 것이므로. 남편도 믿지 못하고, 어쩌다 주어지는 단 몇 시간의 자유에도 아이 걱정으로 불안해하면서. 아이를 위해서라고 믿었지만, 어쩌면 나는 나만의 기준을 지키기 위해 싸우고 있었던 건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