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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은 불빛 Jan 09. 2024

짜깁기당하는 인류의 생각들

책 <샘 올트먼의 생각들>

1. 도대체 누가 쓴 걸까


놀라운 책이다. 1) 종이책 기준 300쪽이 안 되는 분량인데, (IT/블록체인 전문가를 자처하는) 4명의 공동 저자가 있다. 그런데 막상 어떤 저자가 어떤 부분의 집필을 맡았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설명도 되어 있지 않다. 2) 한 가지 주제에 대해서도 여기저기 챕터에 분산되어 서술되어 있어, 도무지 한 명의 편집자가 주관을 가지고 책을 마무리했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3) 용어 설명을 위한 미주가 일부 달려 있긴 하다만, 참고문헌이나 자료, 기사 출처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4) 신문 연재 기사처럼 개별 챕터만 읽는다면 나름의 완결성이 있으나, 하나로 연결된 사고 체계로서 책이라는 느낌은 전혀 들지 않는다.


챗GPT 시대를 맞이하여, 트렌드를 반영한 책 수십 권이 허겁지겁 출판된 현실 속에서도 이 책은 유독 저자, 인간의 흔적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2. 압도적으로 큰 생각


샘 올트먼은 19세에 루프트를 창업하고 엑시트까지 성공하였으며, 30세가 되기 전 와이콤비네이터의 대표가 되었다. 엔젤투자자로서 에어비앤비, 레딧, 스트라이프, 인스타카트, 핀터레스트 등 여러 스타트업의 초기 펀딩에 참여했다. 실리콘밸리에서 거둘 수 있는 성공은 이미 30세가 되기 전 다 이룬 그에게, 그저 시장에서 돈이 될 것 같은 스타트업 연쇄창업은 시시한 일이다. 그의 생각은 전지구적, 전인류적으로 중요한 프로젝트인 인간을 능가하는 인공지능(오픈AI), 에너지 비용을 혁신적으로 낮출 핵융합(헬리온), 죽음의 극복(레트로 바이어사이언스)을 향하고 있다. 회사의 크기가 아니라, 생각의 크기가 중요하다.


3. 사라진 노동과 기본소득


인공지능은 인간 문명의 특이점이다. 올트먼이 생각하기에 더 이상 노동은 생산요소가 되지 못한다. 부가 발생하는 원천은 자본과 토지이고, 제품을 만들고 서비스를 제공하는 비용은 제로로 수렴한다. 농업혁명 이후 노동에 속박된 삶을 살 수밖에 없었던 인간은 드디어 노동에서 해방된다.  


그럼 인간을 무엇을 하느냐? 올트먼은 민주주의를 유지하기 위한 자본주의를 제시한다. 국가는 세금을 자본을 보유한 기업과 토지소유자에게만 부과한다. 그 부를 기본소득으로 재분배한다. 사람들은 부를 재분배받은 다음 각자의 인생을 풍족하게 추구하면 된다. 부는 구매력을 의미하고, 이미 영으로 수렴한 비용 덕분에 제품의 가격은 극도로 낮아지기 때문에 가능한 체제다. 인류는 과거의 어리석은 선조들 같이 구매력을 증대시키기 위한 생존 투쟁을 벌일 필요 없이, 기본소득을 받아서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을 돌보는 삶을 살 수 있다. 예술과 자연을 사랑하고, 사회 전체를 위한 일에 힘쓰는 일에 집중하면 된다.


4. 기본소득으로서 주식의 현물배당


좀 더 구체적으로 보면, 올트먼은 전 국민을 수익자로 한 펀드를 만들 것을 제안한다. 일정 규모 이상의 기업에 대해서는 매년 시가총액의 2.5%를, 개인 소유 토지에 대해서도 매년 토지 가치의 2.5%를 세금으로 걷는다. 그리고 모든 시민에게 배당금을 지급하는데, 특히 기업이 부담하는 세금에 대한 배당은 현금이 아닌 해당 기업의 주식으로 현물배당된다. 기업은 현금 유출을 피해 해외로 도피할 필요가 없고, 소수의 자본가만 아니라 모든 시민이 주주가 되는 확장된 형태의 거대 주주자본주의가 탄생한다.


대단히 흥미로우면서도 도대체 어떻게 가능할지 의문이 든다. 상장 회사에 대한 주식 배당 이슈만 한정해서 본다면, 이는 신주 발행을 통한 현물배당인가, 자기주식 배당인가. 만약 신주 발행이라면 기존 주주 가치의 희석화는 어떻게 할 것인가. 아마 새로운 형태의 종류 주식이 될 것인데, 주식을 배당받은 시민은 이익의 배당, 잔여재산의 분배, 주주총회에서의 의결권의 행사라는 주주의 권리를 어디까지 인정받을 수 있을까. 생활 안정을 도모한다는 기본소득의 취지상 배당받은 주식의 양도는 불가능한 것으로 정해야 하는가. 혹시 양도 가능하다면 양도소득세를 부과할 것인가. 배당받은 주식에 대한 현금 배당은 비과세로 할 것인가. 배당금 지급액은 기업 입장에서는 법인세 감면을 위한 비용 처리를 할 수 있을까. 기업에 배당가능이익이 없더라도 배당은 법률상 강제되는가. 발행주식 총수에 대한 결정권은 누구에게 있는가.


아무튼, 실현 가능성을 차치하고 올트먼의 생각은 토지공개념을 주장한 헨리 조지와 자본소득으로 인한 불평등 타파를 주장한 토마 피케티와 닿아 있다. 정말 압도적으로 진화한 기술의 힘으로 인류는 불평등 그 자체마저 종식시켜 버릴 수 있을까.


5. 그대로 베끼기


책은 올트먼의 일과 성공, 창업에 대한 생각으로 마무리된다. 명쾌하고 설득력 있으며, 사회에 막 진입한 초년생에게 특히 유용한 조언들이다. 훌륭한 아이디어란 무엇인가, 제품은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가, 일은 어떤 태도로 임해야 하는가, 누구와 같이 일하고 어떤 기준으로 채용해야 하는가, 리스크란 무엇인가, CEO는 무엇에 집중해야 하는가, 인생의 기회비용은 무엇인가, 당신은 세상에 어떤 가치를 가져다줄 것인가. 메모해 둘 좋은 인사이트가 가득한 챕터다.


문제는 이 챕터의 내용이 트먼이 2014년 스탠퍼드대학에서 강연하고, 홈페이지를 통해서도 강연 영상을 모두 공개한 ‘How to Start a Startup’을 그대로 번역만 해서 옮긴 것이라는 점이다. 물론 누구든지 공표된 저작물은 보도, 비평, 교육, 연구를 위해 인용할 수 있다. 하지만 이를 상업적 목적으로, 임의로 편집한 2차적저작물로 만들어서, 무단으로 복제, 배포, 출판하는 것은 올트먼 본인의 동의를 받지 않는 한, 저작권 침해가 명백해 보인다.



6. 해킹당하는 인간


이 책의 에필로그는, 누구인지도 모를 저자가, 에필로그의 30% 가량은 챗GPT가 작성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정말, 에필로그만 그러할까.


그저 시류에 편승한 책이라고 보면 그만이기는 하다. 생성형 인공지능과 오픈AI, 스타트업 문화를 이해하는데 개론적으로 적당한 지식을 전달해 준다는 장점도 있다. 다만 계속 드는 생각은 이 책이 앞으로 인공지능이 무한정 생성해 내는 할루시네이션으로 인한 탈진실과 인공지능에 의해 해킹당하는 지식 체계의 모습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굳이 애써 찾아보고, 문장을 공들여 만들며, 생각을 하나씩 쌓아갈 필요 없이, 몇 초만에 생산되고 소비되고 버려지는 콘텐츠들. 그렇게 인공지능은 인류의 사고력을 불태우는, 새로운 프로메테우스의 불처럼 변모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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