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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나 Nov 04. 2022

그림책이 나에게 말을 걸다

<나는 강물처럼 말해요>를 처음 만난 어느 봄날

어느 화창한 봄날이었다. 미세먼지 하나 없는 맑고 깨끗한 날이었고 나무는 초록옷을 입고 길가엔 드문드문 봄꽃이 고개를 내밀고 나 좀 보라는 듯 활짝 피어있었다. 싱그럽게 피어나고 봄을 알리느라 분주한 창 밖 상황과는 달리 출장을 다녀오던 나는 차에 앉아 그 싱그러운 풍경들을 나와 상관없다는 듯 무심하게 바라보며 운전대를 잡고 잘 뻗은 도로위를 달리고 있었다. 나는 그 당시 그 찬란하고 아름다운 풍경들이 나에게는 무채색처럼 느껴졌다. 그때였다. 내가 차에 탈때마다 켜놓은 라디오 주파수95.3에서 잔잔한 음악과 함께 부드러운 정지영의 목소리가 흘러나왔고 나는 그 목소리에 귀를 귀울였다.   

  

아무도 없는 조용한 곳에 아빠와 단둘이 있으면 마음이 편안해져요. 하지만 발표시간이 자꾸 떠올라요. 그 많은 눈이 내 입술이 뒤틀리고 일그러지는 걸 지켜보았어요. 그 많은 입이 나를 비웃었어요. 배 속에 폭풍이 일어난 것 같아요. 두 눈에 빗물이 가득 차올라요. 아빠는 내가 슬퍼하는 걸 보고 나를 가까이 끌어당겼어요. 그러고는 강물을 가리키며 말했어요. “강물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보이지? 너도 저 강물처럼 말한단다.”나는 강물을 보았어요. 물거품이 일고 소용돌이치고 굽이치다가 부딪쳐요. 나는 울고 싶을 때마다 이 말을 떠올려요. 그러면 울음을 삼킬 수 있거든요. 나는 강물처럼 말한다. 나는 말하기 싫을 때마다 이 말을 떠올려요. 그러면 말할 수 있어요. 나를 둘러싼 낱말들을 말하기 어려울 때면 그 당당한 강물을 생각해요. 물거품이 일으키고 굽이치고 소용돌이치고 부딪치는 강물을요. 그 빠른 물살 너머의 잔잔한 강물도 떠올려요. 그곳에서는 물결이 부드럽게 일렁이며 반짝거려요. 내 입도 그렇게 움직여요. 나는 그렇게 말해요. 강물도 더듬거릴 때가 있어요. 내가 그런것처럼요. <나는 강물처럼 말해요>그림책의 한 부분을 읽어드렸습니다.

     

나는 울고있었다. 정지영의 낭독을 듣는 내내 눈물을 멈출 수가 없었다. 스스로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내가 왜 울고 있는지 말이다. 사무실로 들어가려면 직진으로 가 굴다리를 지나야 하지만 나는 굴다리위로 올라가는 길로 차선을 바꿨다. 지금 당장 저 책을 사야겠다는 마음이 들었기 때문이다. 운전을 하며 옷소매로 눈물을 닦고 크게 숨을 내쉬었다. 나는 좀 지쳐있었다. 아니 많이 지쳐있었다. 아침에 또 아침밥을 잘 안먹는 첫째와 실랑이를 하다가 아이를 혼내고 신랑 밥을 차려주고 과일까지 준비해주고 나오면서 나는 물 한잔 마시지 못했다. 둘째를 겨우 어린이집 차에 태워보내고 부랴부랴 출근을 하고 사무실에 와서는 또 숨 돌릴 틈도 없이 오전 일정이 있어 출장을 나갔다가 일을 보고 사무실로 들어가는 길이었다.      


그렇게 봄이 와도 그 찬란한 봄의 기운을 느낄 새도 없이 일과 가정을 오가며 챗바퀴처럼 사는 내게 그 아침, 그림책이 내게 말을 거는 것 같았다. ‘그럴 때도 있어. 물거품이 일고, 굽이치고, 소용돌이치고 부딪히며 사는 때도 있는거야. 그런 시절은 누구에게나 있어. 그러니 괜찮아. 언젠간 물살 너머의 잔잔한 강물처럼 너에게도 물결이 부드럽게 일렁이며 반짝이는 그런날들이 올거야. 그러니 괜찮아.’      


그림책이 그런 방식으로 나에게 말을 건다는 것을 나는 처음 감각적으로 경험했다. 한 문단의 짧은 글이 나에게 그렇게 큰 위로가 될지 상상할 수 없던 일이었다. 나는 서점으로 가 그림책 코너 앞에 섰다. 온 벽 가득 책이 꽂힌 책 장 앞에서 천천히 흐르는 강물처럼 천천히 책등의 책 제목을 하나하나 읽으며 그 책을 찾았다. 평소에 나라면 업무 시간에 서점에 가는 이런 일탈은 상상도 할 수 없지만 그 날만은 나에게 모든 것을 허용해 주고 싶었다. 나는 충분히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존재였다.      


삐뚤빼뚤한 하얀색 글씨가 인상적인 ‘나는 강물처럼 말해요’책을 발견하고는 손을 뻗었다. 가슴이 두근두근했다. 10분전에 정지영의 낭독으로 들었던 책을 내 손에 쥐다니. 서점이 멀지않은 곳을 지나고 있어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고는 혼자 피식 웃었다. 책을 가슴에 꼭 안고 계산을 했다. “봉투에 넣어 드릴까요?”라는 서점직원의 물음에 괜찮다 이야기 하고 다시 책을 가슴에 안았다. 그리곤 얼른 차에 탔다. 차에 타자마자 번쩍 정신이 든 나는 사무실 방향으로 차를 돌렸다. 시계를 보니 출장을 다녀와야 할 시간이 훌쩍 지나있었다.     


사무실로 들어가는 길, 꼭 닫혀 있던 창문을 열었다. 시원하지만 차갑지 않은 기분좋은 봄바람이 차창으로 들어왔고 창 밖으로 보이는 이제 막 잎과 싹을 틔우기 시작한 나무들이 나를 향해 손짓 하는 듯했다. 신호를 기다리다 발견한 보도블럭 돌 틈사이를 비집고 피어난 노란 민들레가 오늘따라 유난히 예뻐 보였다. 내 옆자리에는 평화로운 표정을 한 아이가 눈을 감은 듯 아닌 듯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흔들리는 물살에 몸을 담근 표지의 ‘나는 강물처럼 말해요’책이 놓여있다. 무채색이던 세상에서 빛을 발견했다. 그러나 언제 또 일상에 치여 다시 나의 세상이 무채색으로 변해 버릴지도 모른다. 그래도 괜찮다는 마음이 들었다.      


그때마다 그날을 떠올리며 꺼내어 읽어 볼 수 있는 그림책이 한 권 생겼고, 나도 나 스스로에게 괜찮다는 마음을 내어줄 수 있다는 깨달음을 한 줌 얻은 날이었다. 그림책은 그렇게 내게 말을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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