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등으로 급전 빌렸다가 갚지 못해 노예로 전락
수메르 등 고대 사회에서 ‘자유’는 ‘노예 해방’을 의미
흉년 등으로 노예 크게 늘어나면 사회 불안도 심화
사회 붕괴 막기 위해 채무 면제하고, 경작권도 돌려줘
인간은 자유를 갈망한다. 그렇지만 온전한 자유를 누리는 사람은 많지 않다. 북한을 비롯한 일부 국가들을 빼곤 정치적 자유를 보장하지 않는 나라는 없다. 정치적 자유는 반쪽일 뿐이다. 정치는 물론 경제적인 속박에서도 벗어나야 진정한 자유인이라고 할 수 있다.
자유의 어원을 따져보면 경제적인 속박에서 벗어나는 게 얼마나 중요한 지 알 수 있다. 인류 역사에서 ‘자유’ 라는 단어가 처음으로 등장한 것은 수메르(BC 5300-1940) 문명 때다. 수메르어(語)로 자유는 ‘아마기(amargi)’다. 원뜻은 ‘어머니 품으로 돌아가라’다. 수메르 시대 때 자유란 채무노예(Debt Peon)가 노예신분에서 벗어나 어머니, 즉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는 것을 가리켰다.
수메르 시대 때유프라테스강 어귀의 도시국가 ‘라가시’는 이웃나라 ‘움마’와의 전쟁에서 승리했다. 라가시의 왕 ‘엔메테나(Enmetena)’는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모든 부채에 대한 무효화를 선언했다. 그는 “나는 라가시에자유(amargi)를 가져왔다. 어머니에게 아이들을 돌려줬고, 아이들에게 어머니를 돌려줬다”라며 자신의 공(功)을 칭송했다.
채무노예 해방은수시로 이뤄졌다. 엔메테나에 이어 왕위에 오른 우루이님기나도 BC 2350년 새해를 맞아 모든 채무에 대한 면제를 선포했다.
바빌로니아도 이런 전통을 계승했다. 바빌로니아의 왕 함무라비는“강한 사람이 약자를 억압해선 안 된다”며 채무 면제 조치를단행했다. 채무노예를 해방했을 뿐 아니라 농민들에게 자신의 땅에 대한 경작권도 돌려줬다. 바빌로니아에서는 채무 면제가 이뤄질 때마다 부채를 기록한 점토판(粘土板) 문서를 깨뜨리는 이벤트도 펼쳤다.
성경도 여러 곳에서채무노예 해방을 언급하고 있다. 대표적인 게 느헤미야다. 느헤미야가 유대 총독으로 부임해보니 유대는 채무노예 문제 때문에 심각한 위기에 시달리고 있었다. 가난한 농민들이세금을 내지 못하자 어린 자식들을 노예로삼기 위해 끌고 가는 사례가 빈발했다.
느헤미야는 이런 사회적위기를 바빌로니아식 해법으로 해결한다. 바로 부채 면제 조치다. 채무노예는자유인 신분을 되찾고, 농지도 원래 소유주에게 돌려줬다. 출애급기, 신명기, 레위기 등은 이런 채무 면제 및 채무노예 해방조치가 7년 또는 49년 단위로 취해졌다는 것을 보여준다.
채무노예 해방은그만큼 빚 때문에 노예로 전락하는 사람들이 많았고, 대부행위도 빈번했다는 것을 방증한다. 수메르인들은 인류 최초로 대금업을 시작했다. 채권자는 주로 사원(寺院)이었다. 신(神)을 내세워 축적한 자산을 이자놀이에 활용했다. 신도들이 바친 현물도 무시할 수 없는 자산이었다. 상인들은 이런 현물을 넘겨받아 해외에 판매한 후 그 수익을 사원에 배분했다. 형식은 배당이지만 실질적으로는 이자였다.
사원과 상인간의 자금거래는 평범한 서민들로까지 대상을 확대됐다. 상인이나 정부 관리는 급전이 필요한 농민들에게 담보를잡고 돈을 빌려주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담보가 곡물, 가구(家具), 염소 같은 가축에서 출발했다가 점차 논밭, 가옥(家屋) 등으로 확대되더니 나중에는 채무자의 가족까지 담보로 잡았다. 빚을갚으면 노예 신세에서 벗어날 수 있지만 그렇지 않으면 평생 노예로 살아야 했다. 이미 논밭, 가축 등 주요한 생산수단을 모두 빼앗긴 터라 빚을 갚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상당수 서민들은결혼식 또는 장례식에 쓸 돈을 빌렸다가 채무노예로 전락했다. 프랑스의 인류학자 장 끌로드 갈레(Jean-ClaudeGaley)에 따르면 1970년대까지만 해도 히말라야 인근 지역에서는 이런 채무노예 제도가남아 있었다. 가난한 집 처녀는 결혼할 때 혼수 자금을 빌리면서 자신을 담보로 제공한다. 신부는 첫날 밤을 보내자 마자 대금업자의 집에서 첩살이를 시작한다. 대금업자는그 여자에게 싫증이 나면 근처의 벌목장으로 팔아 넘긴다. 그녀는 이곳에서 1~2년간 몸을 팔아 빚을 다 갚고 난 후 그제서야 시집으로 돌아가 정상적인 결혼생활을 시작한다.
특히 흉년이 들면 채무노예가 크게 늘어났다. 가장이 노예로 전락하면 가족은 해체 위기를 맞는다. 농민들은 빚을 갚지 못할 것 같으면 정든 고향을 떠나 가족과 함께 유민(流民) 대열에 합류했다. 유민이 늘어나면 사회 불안은 심화될 수 밖에 없다. 수메르와 바빌로니아 왕들은 즉위하자마자 시스템, 즉 왕국의 내파(implosion)를 막기 위해 채무노예 해방 조치를 취했다. 재미있는 것은 이런 사면 대상에서 상인들간의 채무는 제외됐다. 오직 개인 채무만 면제해줬다.
이런 채무면제는비단 메소포타미아에만 국한된 현상은 아니다. 왕망은 AD 8년전한(前漢)을 무너뜨리고 신(新)나라를 세우면서전국적인 가계부채 위기 극복을 명분으로 내세웠다. 왕망은 등극과 함께 이자가 원금보다 많을 경우 채무를면제하고, 노예 매매도 금지했다.
전국민의 절반 이상이빚 때문에 몸살을 앓고 있다. 아버지는 하우스푸어(HousePoor)에 워킹푸어(Working Poor), 아들은 장미빚–장기 미취업 빚쟁이-인생이다. 경제적 속박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점에서 이들도 채무노예나 마찬가지 신세다. 이들은 언제 어머니 품으로 돌아갈수 있을까. 은행을 비롯한 금융권 인사들은 ‘도덕적 해이’를 운운하며 펄쩍 뛰겠지만 개인 채무에 대해서는 수시로 면제 조치가 단행됐다. 이건 엄연한 역사적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