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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택 Jan 08. 2022

3개의 심장, 3배의 행복

임밍 아웃을 통해 진정한 가족의 의미를 새기다

 아내의 임신은 하루하루가 축제와 같은 날로 만들었다. 아들일까? 딸일까? 이름은 어떻게 할까? 누구 닮으면 좋을까? 우리는 창가에 앉아 밤하늘의 별들을 바라보며 행복한 미래를 그려보았다. 그저 서로 바라만 봐도 좋았다. 

 

 세상을 다 가진 듯한 기분을 만끽하고 나니 한 가지 고민이 생겼다. 이 임신 소식을 주변에 언제 어떻게 알려야 할지 였다. 인터넷에 검색해보니 임신을 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겪게 되는 과정이라고 한다. 일종의 퀘스트 중 하나같았다. 내 주변 사람들이 나에게 임신 소식을 알렸을 때 몇 주 되었다고 알려도 귀담아듣지도 않았는데, 그제야 그게 굉장히 중요한 포인트였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단순히 임신을 확인한 5~6주 차에 곧바로 주변에 알리기에는 임신 초반 기간이 상당히 위험하다는 것을 익히 들어왔다. 실제 한 친구는 임신 소식을 6주 차에 회사 동료들에게 바로 알렸지만 오래가지 않아 유산을 했다. 뱉은 말을 다시 담는 일이 얼마나 힘들고 고통스러운지 곁에서 지켜보았다. 실제 자연 유산 비율도 매년 증가하는 추세라고 한다. 게다가 자연 유산의 80% 이상은 임신 12주 이내의 초기에 발생한다고 하니 안정기라로 불리는 구간에 도달하기 전까진 임신 사실을 숨기고 있는 게 약간의 국룰과도 같았다.

 

 엔드게임 보고 난 이후 보다 더 입이 근질거린 경우는 또 처음이었다. 이 기쁜 소식을 어서 빨리 사람들과 나누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임신 초반 기간 동안에는 아내의 몸 상태가 우선이었고, 혹시나 하는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케어하는 게 최선이라 판단했다. 그렇게 우리는 임밍 아웃을 유보하기로 했다. 




 그렇게 인고의 시간을 거쳐 문득 지금쯤 임밍 아웃을 해도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던 15주 차가 되던 시기, 아침에 일어난 아내가 갑자기 큰 복통을 호소했다. 임신 기간 동안 가끔씩은 복통을 호소했기에 조금 있다가 진정되겠지 하며 아내는 출근을 강행했다. 하지만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 전화가 왔다. 

 

도저히 못 견디겠으니 태우러 와줘”

 

 너무 놀란 나머지 주변 병원에 전화를 돌렸다. 안타깝게도 이날은 일요일이어서 대부분의 병원은 문을 닫았고 응급실 운영만 한다고 했다. 응급실 또한 산부인과 진료과가 있는 게 아니라서 어쩔 수 없이 대학병원 응급실로 전화를 걸었다.

 

 “오셔서 접수하시고 PCR 검사 음성이 뜨셔야 진료 가능합니다. 10만 원 정도의 비용이 발생하며 1~2 시간 뒤에 결과가 나옵니다. 그 전까진 대기하셔야 합니다”


 코로나가 야속했지만 당장 급히 진료를 받는 게 시급했기 때문에 조금은 힘들더라도 버텨서 진료 대기를 해보기로 했다. 링거를 맞으며 대기를 좀 하고 1시간 정도가 지났을까 PCR음성이라며 진료실로 이동했다. 다행히 이날은 우리의 주치 교수님이 당직을 서고 계신 날이었다. 교수님은 초음파를 찍어보며 진단을 내려 주셨다.


 아이들은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대신 한창 아이들이 자라 팽창하는 16~20주 차에다가 아내가 원래 가지고 있단 자궁 외벽의 혹이 압박을 받아 통증을 호소했다고 했다. 교수님은 진통제와 안정을 취하며 경과를 지켜봐야 한다고 입원을 권유하셨다. 입원이라는 이야기에 뒤통수를 한대 후 드려 맞은 듯한 얼얼함이 느껴졌다.


 정신없이 입원 수속을 밟고 집으로 가서 캐리어에 입원 중 필요한 이것저것 생필품들을 챙겨 왔다. 준비해오는 동안 아내는 환자복으로 환복 하여 입원실로 이미 위치해 있었다. 그리고 병실 이름은 '고위험 산모 입원실'이라고 적혀있었다. 


 5인실 병실에서 보호자들이 병간호를 하는 동안 어쩔 수 없이 함께 입원한 산모들 상태를 엿들을 수 있었는데, 자궁 경부 길이가 너무 짧아 조산 위험 때문에 묶는 수술을 한 산모라던지, 임신성 당뇨로 치료 중인 산모도 있었다. 정말 무탈하게 퇴원을 했으면 좋겠다는 소망이 들었다. 


 그렇게 3박 4일의 입원 기간이 지나지 교수님께서 퇴원을 권하셨다. 실제 치료와 안정을 취해서 통증도 많이 가라앉았기 때문이다. 교수님은 다태아라는 것과 아내가 큰 혹이 있다는 것 때문에 이러한 이벤트가 더 있을 수 있다고 2주에 한 번씩 내원해라고 하셨다. 그리고 추후 남은 기간 동안 무리하지 말고 누워만 있으랬다. 퇴원 수속을 밟고 진통제와 질정을 처방받았다.


 아내는 육아 휴직을 앞으로 당겨 1월까지만 출근하기로 했다. 그래도 최대한 오래 버텨서 돈을 벌어 오려고 했던 씩씩한 아내지만 이번 일을 겪고 무리하지 않는 게 최선이라 판단했다. 그렇게 인고의 시간을 거쳐 안정기가 왔다고 생각한 시기에 이러한 이벤트를 겪고 나니 더더욱 임신 사실을 알리는 것이 조심스러워졌다. 




 병원 살이를 끝내고 어느덧 16주에서 17주 차로 넘어가게 되었다. 생각보다 몸과 마음이 제법 단단해진 아내는 이제는 걱정 말라며 임밍 아웃을 하자고 한다. 성별도 정확히 나오는 20주 차에 천천히 알리자는 나의 권유에도 이번엔 제법 의지가 확고해 보였다. 이번 이벤트를 겪고 휴직까지 앞당기고 그 좋아하는 나들이도 안 가고 정말 이제 임밍 아웃을 통해 더더욱 조심하고 건강한 몸 관리를 실천하고자 하는 의지 같았다.


 인스타에 공식적으로 임밍 아웃을 했다. 이후 직장 동료와 주변 지인들에게 축하의 연락을 많이 받았다. 아주 행복했다. 단순히 기쁜 소식을 함께 나누고 축하를 받아서가 아니라, 이러한 인고의 시간을 겪고 임밍 아웃을 통해 우리 스스로가 단단해지고 대견스러워서였다. 임밍 아웃의 타이밍은 언제일까? 주변 사람들에게 의무적으로 임신 사실을 알리고자 했던 것은, 사실 아직 임신을 했다는 것이 어색하고 확신이 들지 않았던 우리 부부에게, 진정 하나의 가족으로 느낄 수 있도록 하고자 했던 것은 아녔을까? 3개의 심장이 뛰는 아내의 몸처럼 3배의 행복함을 가져다준 임밍 아웃의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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